하석준 목사
제 목 :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잠에서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250119)
성 경 : 데살로니가전서 5 : 1 – 11
저는 초·중·고등학교 때 성경공부를 하면서 ‘여호와 이레(창22:8-14)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을 바치려 할 때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으나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물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 ‘여호와 닛시(출17:13-16)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도와 전쟁 승리.
’ ‘여호와 삼마(겔48:35)하나님께서 자기 성읍 곧 영원히 교회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
’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웠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하실 때 우리의 필요를 미리 준비하여 두셨다는 의미다. ‘여호와 닛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하실 때 우리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승리하게끔) 해주신다는 의미다.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곧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의미다(=임마누엘과 같은 의미).
따라서 저는 믿음 생활이 느슨해지거나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비몽사몽 할 때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다. ‘여호와 닛시’-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신다. ‘여호와 삼마’-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고 보호해주신다는 말을 하며 비몽사몽의 믿음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고자 성경을 읽는다. 또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와 주장을 받고자 기도한다.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주 예수를 맞이하는 무리와 함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주 예수를 맞이하는 무리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믿음의 핵심 가치를 붙들고서 말이다.
1절, 2절, 3절을 보자.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1)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2)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3).” 우리 주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500여 성도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 보좌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는 모습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다(행1:11). 그러나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나 시기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아무도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나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주 예수께서 오실 때가 되면 어떤 징조가 있고 어떤 방식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마24:3-51). 따라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서신을 쓰면서,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짜나 시기를 쓰지 않기로 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 예수께서 언제 오시든지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교회였다(1). 주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 주 예수께서 오실 날을 알면 세상이 정지되고 정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오실 날을 가늠할 수 없다. 주 예수께서 정하신 날에 오실 것이다(2).
만약 우리의 죽음 시간을 알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사는 일이 멈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을 특정하여 알려주지 않으셨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평안하다 즉, 세상의 일과 쾌락에 취하여 주 예수께서 오시지 않아도 좋다고 할 때 오실 것이다. 사람들이 안전하다 즉, 아무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없다고 할 때 주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천국과 내세의 삶이 필요 없다고 할 때 주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임신한 산모는 대개 자기의 출산의 날을 센다. 그래도 어느 날 출산할지 모른다. 출산 일보다 앞당기거나 늦게 출산의 고통이 시작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날에, 기대하지 않는 날에 오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께서 행하실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의 구원 사역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믿음 생활을 훼방하는 불신자들을 그냥 두시지 않는다. 그들을 심판하셔서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하신다(3).
4절, 5절, 6절, 7절, 8절을 보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5)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6)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7)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을 구하며 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모 학식 재산 등 모든 걸 벗고 한 인간으로서 인격 즉, 영혼의 무게 재며 산다. 영혼의 무게를 잰다는 말은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을 인생의 핵심 가치로 여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인생의 핵심 가치는 돈이다. 돈이 힘과 권력이다. 고로 돈이 우상이 되었다.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죄짓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시 오실 주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산다. 바로 그런 삶이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빛의 사람이다. 죄짓지 않는 사람이다. 죄짓는 일은 보편적으로 밤에 이루어진다. 밤에 술에 취하고 부끄러운 일을 한다(4).
그리스도인은 낮의 사람이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다. 배려하고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어두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빛에 속하고 낮에 속하여 바른 삶 곧 하나님 섬김을 본분으로 사는 사람이다(5).
6절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전혀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딘 상태로 사는 사람이다.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의 징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잠에 취해서, 세상에 취해서 비몽사몽으로 산다. 특히 죄로 인한 저주와 죽음의 심판에 예리함이 없어서 자기 성찰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른 믿음의 자리에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 바로 그 삶이 깨어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이다(6).
사람이나 짐승이나 식물도 밤에 잔다. 하나님께서 낮에 활동으로 인한 피곤을 풀도록 밤에 다 자게끔 정하셨다. 그런데 반역죄인 된 사람들은 밤에 술을 마시고 취해서 맑은 정신이 아니다. 죄악의 향수 가운데서 음탕한 행위를 추구한다. 밤에 어두움에 숨어서 죄악의 술에 취하여 부끄럼 없이 활동한다(7).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빛의 사람이고 낮의 사람이다. 욕망이 일어나도 그 욕망을 주 예수의 피에 호소하며 이겨내며 사는 사람이다.
바로 그 삶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믿음의 사람은 모든 일을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진행하고 믿음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믿음의 삶의 원리이다. 고로 믿음이 반짝거리는 호심경전쟁에 임하는 장수의 갑옷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이다. 가슴 쪽에는 심장이 있으므로 적군의 화살이나 총알을 맞더라도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귀한 생명 보호장치
을 가슴에 붙이고 머리에는 구원의 소망 곧 부활과 영생의 몸을 입는다는 굳센 믿음의 투구를 쓰고 산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9절, 10절, 11절을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9)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10)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하라(11).” 하나님께서 반역죄인 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셔서 믿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역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실 때는 심판하시기 위해서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진노 곧,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자와 구원의 방식을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창3:15). 따라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말씀한 이유다(행4:12).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믿음의 신비를 선사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신다. 우리를 죄짓지 않은 사람 곧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서 부활하여 영생의 몸을 입게 해주신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사람에게 죄 용서와 의롭게 됨과 영생에 이르도록 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 고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받도록 세우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9).
하나님께서 우리 곧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백성 삼기 위함이요. 사람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기 위해서다(=창조 경륜). 따라서 우리가 곧 사람이 창조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그 존재 목적을 다 한 것이다(전12:13,고전10:31).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우리의 존재 목적을 성취한 것이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영생의 몸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바로 그 영생의 몸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됨은 반역죄인 된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의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상에 죽음과 부활하심이다. 그 구속 사역으로 아담과 그 후손의 반역을 무효화하셨다. 따라서 그 구속 사역을 믿는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 하나님 섬기는 본분을 다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법은 잠을 자거나 깨어있으나 다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잠을 자거나 깨어있거나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의존하고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모든 의존과 의식이 주 예수여야 한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 언제나 주를 섬기는 법이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진행하고 믿음으로 결정하는 삶이 바른 신앙이고 언제나 주를 생각하는 삶이다. 곧 자나 깨나 주를 의존하고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10).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권면하여 바른 믿음을 갖게 하고, 바른 믿음 생활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믿음 생활은 신자들끼리 서로 교제하며 함께하는 것이다. 교회는 믿음 공동체이고 생명공동체이다. 고로 교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의 지체요 생명공동체다. 그 생명공동체들끼리 바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챙겨야 한다. 각 지체를 서로가 세워야 한다. 그래야 삐거덕거림이 없이 믿음의 덕을 세우며 살 수 있다. 그 믿음의 덕을 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구원얻는 사람을 교회에 더하게 하신다. 바로 그 전도자의 삶을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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