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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Owen의 기독론(3)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결과인 그리스도의 위격, 81쪽~

형람서원 2025. 1. 1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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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결과인 그리스도의 위격 81

Chapter III: The Person of Christ the most ineffable Effect of Divine Wisdom and Goodness — Thence the next Cause of all True Religion — In what sense it is so.. . . . . . . . . . . . . . . . . . . . . . . . (PDF) 39(35)

The person of Christ is the most glorious and ineffable effect of divine wisdom, grace, and power; and therefore is the next foundation of all acceptable religion and worship. The Divine Being itself is the first formal reason, foundation, and object of all religion.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능력의 가장 영광스럽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것은 모든 받아들일 수 있는 참된 종교와 예배의 직접적인 기초가 된다. 신적 본질 그 자체는 모든 종교의 첫째 가는 형식적 이유이며 대상이다(81쪽).

=> 이 문장에서 오웬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적 존재 그 자체"에서 종교와 예배 행위에서 구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민감한 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표현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웬은 Yet the divine essence(신적 본질) is not으로 "신적인 본질은 그 자체로 종교적 예배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82쪽/35;45, Yet the divine essence is not, in itself, the next and immediate cause of religious worship)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The Divine Being(신적 존재)이 예배의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 81쪽 각주에서 번역자는 신의 존재(Being, existence)와 본질(eseence, nature)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설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웬은 신적 존재는 예배 대상이 될 수 있고, 신적 본질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 차이는 매우 심각하다.

"신적인 본질은 그 자체로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어느 피조물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이다"(82쪽). For, in itself, the divine nature is hid from all living, and dwelleth in that light whereunto no creature can approach. 오웬이 피조물로부터 감춰있는(hid) 신적 본질이 루터가 제시한 숨어 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나타남(현시, manifestation)은 감춰진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에 의한 것(by outward acts and effects)이다.

But of all the effects of the divine excellencies, the constitution of the person of Christ as the foundation of the new creation, as “the mystery of Godliness,” was the most ineffable and glorious. 그러나 신적인 탁월성들의 모든 결과들 중에서 새창조의 기초로서, "경건의 신비"로서 그리스도의 위격의 구성은 가장 영광스럽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83쪽). => "신적인 탁월성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는 오웬의 표현은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높이지만 예배의 대상으로 높이지 않는다. 믿음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며, 예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83쪽> -35(39)

But of all the effects of the divine excellencies, the constitution of the person of Christ as the foundation of the new creation, as “the mystery of Godliness,” was the most ineffable and glorious. I speak not of his divine person absolutely; for his distinct personality and subsistence was by an internal and eternal act of the Divine Being in the person of the Father, or eternal generation — which is essential unto the divine essence — whereby nothing anew was outwardly wrought or did exist. He was not, he is not, in that sense, the effect(효과) of the divine wisdom and power of God, but the essential wisdom and power of God himself. But we speak of him only as incarnate, as he assumed(추정하다, 취하다) our nature into personal subsistence with himself. His conception in the womb of the Virgin, as unto the integrity of human nature, was a miraculous operation of the divine power.(그가 동정녀의 태 안에서 인간 본성의 완전성으로 잉태된 것은, 신적 능력의 기적적인 움직임이었다) But the prevention of that nature from any subsistence of its own — by its assumption into personal union with the Son of God, in the first instance of its conception — is that which is above all miracles, nor can be designed by that name.(그러나 그의 위격이 인간 본성에 막힘이 되기 때문에 모든 기적보다 위에 있으며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다. 즉 동정녀 임신은 첫 예증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위격적 연합으로 추정(assumption)하는 것이다. A mystery it is, so far above the order of all creating or providential operations, that it wholly transcends the sphere of them that are most miraculous. Herein did God glorify all the properties of the divine nature, acting in a way of infinite wisdom, grace, and condescension. The depths of the mystery hereof are open only unto him whose understanding it infinite, which no created understanding can comprehend

* the Son assumes a human nature and dies a sacrificial death, assume(취함)

오웬은 신적 인격 divine person absolutely,을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인격 안에 신적 존재의 내적이고 영원한 행동에 의한 personality and subsistence로 평가했다. 오웬은 아버지의 영원한 출생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사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사용한다. 그리고 그 출생에서 새로운 존재가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예배의 대상인 Divine Being을 아버지로 한정하는 것이다. 오웬은 personality(인격) and subsistence(실상, 위격)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동의어이다. personality and substance는 다른 개념이다. 바르트는 분명히 ‘존재의 양태’라는 용어가 의도된 의미를 객관적으로 신적 본질과 동일한, 말하자면 인격의 습관적인 의미와 동일한 '실제하는 관계들’(subsistent relations, CD I/1 364)과 동일화시킨다(김용준, "칼 바르트의 신적 위격 개념 Seinweise"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평"). 오웬과 바르트의 개념이 유사하다. 그것은 신의 내부 운동(행동)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을 실상(subsistent, hypostasis)로 보기 때문이다. 위격적 존재'(subsistentia, subsistence)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영광"을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가 그 표현이 지나침을 보고서, 율법폐기론적 체계로 판단하며 그 진영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로 제시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을 십자가로 집약시키는 것이다. 오웬이 말하는 그리스도 인격의 영광은 천상에 있는 영광으로 보인다.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었다.

I speak not of his divine person absolutely; for his distinct personality and subsistence was by an internal and eternal act of the Divine Being in the person of the Father, or eternal generation — which is essential unto the divine essence — whereby nothing a new was outwardly wrought or did exist. 그런데 오웬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적 인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speak not)라고 한다(83쪽). 그리고 personality and subsistence을 제시했다. 아버지의 위격 안에서 혹은 신적 본질에서 본질적으로 영원한 출생에서 신적 본질의 영원한 외적 내적 행동이, personality and subsistence이다.

subsistence 이란 단어 번역에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생존, 생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신학에서 subsistantia는 위격으로 번역한다. 하나님 안에 삼위가 있다(tres in Deo esse hypostases, three persons(hypostases) in God, in God three hypostases), 위격적 존재(subsistantia, subsistence)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체(substantiam, substance)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위격적 존재(subsistantia, subsistence)와 실체(substantiam, substance)을 잘 구별해야 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Filium Dei)을 그 본체의 형상(히 1:3, hypostaseos Patris nominans)이라고 부름으로써, 명백하게 성부의 실체(aliquam Patri subsistentiam)에서 성자(a Filio)를 구별하였다.

eternal generation, 오웬은 "영원한 출생"은 신적 본질에서 나온 본질(eternal generation — which is essential unto the divine essence)로 제시했다. whereby nothing a new was outwardly wrought or did exis(바깥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있거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문장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His conception in the womb of the Virgin, as unto the integrity of human nature, was a miraculous operation of the divine power. But the prevention(방지) of that nature from any subsistence of its own — by its assumption into personal union with the Son of God, in the first instance of its conception — is that which is above all miracles, nor can be designed by that name. A mystery it is, so far above the order of all creating or providential operations, that it wholly transcends the sphere of them that are most miraculous. Herein did God glorify all the properties of the divine nature, acting in a way of infinite wisdom, grace, and condescension(겸양). The depths of the mystery hereof are open only unto him whose understanding it infinite, which no created understanding can comprehend.

오웬은 동정녀 탄생을 인간 본성의 진정성, 신적 능력의 기적적 작동으로 제시했다. 오웬은 성육신을 기적과 신비로 묘사했다. *assumption이란 개념은 쉽지 않은 개념이다. "Our Lady of the assumption이면 승천한 마리아"이다. assumption을 취함 으로 번역하고 있다. presumption(추정), assumption(가정), anticipation(예상) [Inst 3.2.6.]에 있는 praesumpta de veritate Dei persuasio를 문병호는 “선취된 감화”, 고영민은 “미리 가지고 있는 확신”으로 번역했다. 성육신할 때에 인간성을 “취하셨다”(assumed)고 표현하고, “취하심”(assumptio, assumption)이라는 말. Assumption of Limitless Resources(무한한 자원을 취함, 밀리오리 조직신학, 김세윤), assumption은 "어떤 증거없이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오웬은 활동(acting)이란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칼 바르트와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칼 바르트는 신의 내적 활동을 구상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신의 행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행동에 의한 신언의 가능성이다. 바르트의 두 명제, Dei loquentis persona(하나님이 말하는 인격, Deus dixit)와 “하나님은 스스로 주로서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 als der herr, KD., I/1, 323)” 바르트는 §28,1 "행위 속에 신 존재(Gottes Sein in der Tat)"에서 산존재는 철저히 그의 계시 행위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음

” But this assumption of our nature into hypostatical union with the Son of God, this constitution of one and the same individual person in two natures so infinitely distinct as those of God and man — whereby the Eternal was made in time, the Infinite became finite, the Immortal mortal, yet continuing eternal, infinite, immortal — is that singular expression of divine wisdom, goodness, and power, wherein God will be admired and glorified unto all eternity. Herein was that change introduced into the whole first creation, whereby the blessed angels were exalted, Satan and his works ruined, mankind recovered from a dismal apostasy, all things made new, all things in heaven and earth reconciled and gathered into one Head, and a revenue of eternal glory raised unto God, incomparably above what the first constitution of all things in the order of nature could yield unto him. (박홍규 84쪽, PDF 40(36)). 이 문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박홍규는 assumption을 '취함'으로 번역한 것 같은데, assumption 은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assumption은 마리아 승천에서 사용하는 어휘로, '추정'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의 아들과의 한 위격 안에서의 본질적인 연합으로 취하는 것"(박홍규), "이렇게 신성과 인성이라는 무한히 구분된 본성을 하나이며 똑같은 개별적 위격을 구성하여, 이것을 통해 영원히 시간이 되고, 무한이 유한이 되고, 불멸이 소멸되는 것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영원과 무한과 불멸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놀라운 결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영원히 경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여기에서 모든 첫째 창조에 변화가 생겼다"(84쪽).

=> 오웬이 하나님은 영원히 경배를 받고 찬양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84쪽). 그런데 오웬은 영원한 찬양을 예수 그리스도께는 적용하지 않으려 한다.

=> 오웬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첫째 창조가 변화된 것"으로 제시했다. "새로운 피조물"의 새하늘과 새땅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첫창조의 변화"는 연방신학의 한 패턴이다. 첫창조가 변화한 것은 천사들이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사단의 활동으로, 창조가 파괴된 것이다. 파괴된 첫 창조를 회복하는 머리(Head)로 모여서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리는 길이 열리게 된다. 오웬의 견해를 따르면 그 길을 여는 역할을 그리스도 예수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웬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동정녀 수태, conception of the Virgin) 거룩한 존재에 대해서 탐구대상이 아니라 찬미 대상(an object of our admiration)으로 제시했다(85쪽). 박홍규의 번역본을 확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that holy thing which had no subsistence of its own, which should be born of her, should “be called the Son of God,” becoming one person with him는 거룩한 것, had no subsistence of its own(어떤 위격(존재)를 갖고 있지 않은 그)이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한 인격이 된다는 것, 인데 이것은 성육신의 신비를 해체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홍규의 번역에서 "탐구해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본문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뒤에 A mystery it is, and that of those dimensions as no creature can comprehend은 있다.

This Word was made flesh, not by any change of his own nature or essence, not by a transubstantiation of the divine nature into the human, not by ceasing to be what he was, but by becoming what he was not, in taking our nature to his own, to be his own, whereby he dwelt among us, (85쪽) "우리의 본성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심"은 탁월한 묵상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에 대한 좋은 연결이 아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구주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임마누엘을 이루신다. 즉 성육신은 신비의 깊음도 좋지만,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겸비가 드러나야 한다.

In the expression of this mystery, the Scripture doth sometimes draw the veil over it, as that which we cannot look into. So, in his conception of the Virgin, with respect unto this union which accompanied it, it was told her, that “the power of the Highest should overshadow her:” Luke I. 35. A work it was of the power of the Most High, but hid from the eyes of men in the nature of it; and, therefore, that holy thing which had no subsistence of its own, which should be born of her, should “be called the Son of God,” becoming one person with him. Sometimes it expresseth the greatness of the mystery, and leaves it as an object of our admiration, 1 Tim. iii. 16: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A mystery it is, and that of those dimensions as no creature can comprehend. Sometimes it putteth things together, as that the distance of the two natures illustrate the glory of the one person, John i. 14: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But what Word was this? That which was in the beginning, which was with God, which was God,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and without who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who was light and life. This Word was made flesh, not by any change of his own nature or essence, not by a transubstantiation(변화) of the divine nature into the human, not by ceasing to be what he was, but by becoming what he was not, in taking our nature to his own, to be his own, whereby he dwelt among us. This glorious Word, which is God, and described by his eternity and omnipotence in works of creation and providence, “was made flesh,” — which expresseth the lowest state and condition of human nature.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is mystery of godliness! And in that state wherein he visibly appeared as so made flesh, those who had eyes given them from abov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The eternal Word being made flesh, and manifested therein, they saw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What heart can conceive, what tongue can express, the least part of the glory of this divine wisdom and grace? So also is it proposed unto us, Isa. ix. 6: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He is called, in the first place, Wonderful. And that deservedly: Prov. xxx. 4. That the mighty God should be a child born, and the everlasting Father a son given unto us, may well entitle him unto the name of Wonderful.(pdf 36, 번역 84-85).

This glorious Word, which is God, and described by his eternity and omnipotence in works of creation and providence, “was made flesh,” 이 문장도 쉽지 않다. 그것은 "말씀(Logos)께서 성육신이 되셨다"는 명시적 표현이 아니다. 오웬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인데, "영광스러운 말씀"을 부가시키면서, "성육신의 주체"에 대해서 명시적 표현을 약화시켰다. 그래서인지 개혁신학에서 "성육신의 주체"는 하나님의 구원협약으로 제시했다. (참고, 서철원 <기독론>, 56-64.에서 "성육신의 주체"를 2위격 하나님으로 교부들이 진술한다고 밝혔다) "성육신의 방식"은 동일하다. "성육신의 원인(동인)", 죄에서 구원함에 대한 설명은 없다. 즉 오웬의 신학에서 죄죽임과 그리스도의 영광은 강조되지만, "십자가 피로 구속하신 죄사함"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육신은 곧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겸양이다.

오웬은 성육신, 인간 본성을 취하여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성육신이 되었다고 제시했다(85쪽). - 성육신의 목적 - 인간 가운데 거주함. he dwelt among us

오웬은 성육신의 신비의 영광을 강력하게 제시한다. 오웬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믿는다고 말할 때에, 신적 지혜의 지극한 효과에 대해서 경배할 것으로 제언했다(86쪽).

humbly to adore the mystery of infinite wisdom and grace therein

This is the gl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 the basis and foundation that bears the whole superstructure . the root whereon it grows.(88쪽). 오웬은 신적 지혜의 영광을 기독교의 영광, 기초, 뿌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인격이 교회와 관계에서 유일한 번석이고 기초라고 반복했다. God manifested herein, that no gracious relation between him and our nature could be stable and permanent, unless our nature was assumed into personal union and subsistence with himself. This is the only rock and assured foundation of the relation of the church unto God, which, now, can never utterly fail. Our nature is eternally secured in that union, and we ourselves (as we shall see) thereby. 오웬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이 현시되는 기초로 구도화한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obscure representation) 인간의 본성의 고양까지 제시했다(89쪽 - 37). it was all but an obscure representation of the exaltation of our nature in Christ . as the apostle declares, Heb. ii. 6.9.

This is the gl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 the basis and foundation that bears the whole superstructure — the root whereon it grows. 오웬은 "이것은 기독교의 영광이요, 기독교의 모든 구조를 받쳐주는 기초요 기반이며, 기독교가 자라는 뿌리이다"(88쪽)라고 제시했다.

오웬은 성육신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의 연합의 영광을 강조한다. 구약 성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조시킨다. 그리스도의 위격 구성은 찬미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능력의 결과(95쪽)이다.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The object of vision is the whole mystery of the divine existence and will; and its operation is a perfect conformity unto God — a likeness unto him — wherein our blessedness shall consist. Faith hath the same object, and the same operations in its degree and measure. The great and incomprehensible mysteries of the Divine Being — of the will and wisdom of God — are its proper objects; and its operation, with respect unto us, is conformity and likeness unto him. And this it doth, in a peculiar manner, in the contemplation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Jesus Christ; and herein we have our nearest approaches unto the life of vision, and the effects of it. 오웬은 매우 복잡한 문장을 제시한다. 결국 오웬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시대에는 contemplation(묵상, 관조觀照)에 대해서 조금 더 민감하게 받아드리기도 한다. 믿음의 대상을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신학자로 높게 평가하기가 그렇다. 성경대로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믿자(바라보자, Solus Christus)"라고 하면 된다. 오웬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진술하는데, 그리스도의 위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지혜, 은혜, 능력에 대한)이 된다. 오웬은 대상에 대한 명료한 지식 구성이 아니라, 영광의 찬미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Take away the consideration hereof, and we despoil the Christian religion of all its glory, debasing it unto what Mohammedanism pretends unto, and unto what in Judaism was really enjoyed. The faith of this mystery enables the mind wherein it is — rendering it spiritual and heavenly, transforming it into the image of God.(박홍규 90-91쪽). 오웬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제거한 패턴으로 이슬람과 유대교를 제시했다. 그런데 500년 뒤에 기독교, 특히 영미 기독교에서 크리슬람(Chrislam)과 유대교를 지향하는 새관점학파가 득세한다. 그들의 공통된 조상에 존 오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웬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후손과 부당한 연계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명시적 표현을 해서 연관이 없음을 스스로 구도화시켜야 한다. "신비로운 믿음"이 아니라 "명확한 믿음"을 제시해야 한다. 이해 가능한 믿음 체계가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혜에 따른 믿음 고백이다.

비록 오웬이 이성으로 취하는 믿음 체계가 아님을 강조하지만, 그는 신비를 제시하면서 확실한 믿음 고백에 대한 제시는 피하고 있는 것이다. 오웬은 "복음의 모든 주요 신비들에 대한, 특히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의 신비들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전복시키려는 수단"에 대해서 제시하는데, 교리는 신비가 아니라 명시적으로 고백되어야 할 믿음 문장이다.

오웬은 믿음이 그 신비, 그리스도의 위격의 신비의 영광을 받아드리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믿음은 선포된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선물이다.

오웬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터(고전 3:11)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 활동, "그의 수난(oblation)과 중재(intercession)"을 제시한다.

There was true religion in the world after the fall(38), 타락 이후에 참된 종교 주어졌다(89쪽)는 오웬의 견해는 부당하다. 참된 종교는 타락 이전부터 존재했다. 오웬의 이 작은 명제는 심각한 오류들을 양산했다. There was true religion in the world after the fall, both before and after the giving of the Law; a religion built upon and resolved into divine revelation. 비록 그가 신적 계시에 기반한 종교를 말하지만, 타락 이전에 종교가 없었다는 주장은 창 2:3 안식 규례에 배치된다.

Wherefore, as all the religion that was in the world after the fact was built on the promise of this work of God, in due time to be accomplished; so it is the actual performance of it which is the founda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which gives it the pre-eminence above all that went before it. 오웬의 이 표현, "타락 이후에 세상에 있던 모든 종교는 때가 되었을 때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큰 오해를 양산시킬 것이다. * 슐라이마허가 유일신교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로 말할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탁월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종교다원주의 체계에서는 모든 종교가 유일신교로서 구상화되었고, 기독교의 탁월성을 주장하는 것을 교만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시작이 칼 바르트에게서 정점을 확보했는데, 그 시작점이 존 오웬으로 보인다. 우리는 기독교의 탁월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방편임을 믿고 고백하며 전파한다. 예수를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며 대상이며 마지막이다.

All false religion pretended always unto things that were mysterious. 모든 거짓 종교는 신비를 내세운다(90쪽). 오웬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신비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Eleusinian mysteries(엘레우시안의 밀교), 아테네에서 20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바다가 보이는데, 바다 너머의 큰 섬이 살라미스섬이다. 그 섬을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15분쯤 북쪽으로 가면, 엘레우시스 유적지에 도착한다

Take away the consideration hereof, and we despoil the Christian religion of all its glory, debasing it unto what Mohammedanism pretends unto, and unto what in Judaism was really enjoyed.(90쪽).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 오웬의 intercession과 mediation을 번역자가 동일하게 중보(中保, 한자도 동일하게)로 번역했다.

* 오웬은 히브리서를 사도의 저작으로 본다.

In this inquiry, the acts of the mediatory office of Christ are, in the Gospel, first presented unto us — especially his oblation and intercession.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그 대답을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직무의 행동에서 처음 접한다. 특별하게 희생과 도고(oblation and intercession)이다. * 오웬은 구원의 길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활동으로 제시하는데, 그 범위를 희생과 도고로 제시한다. 이 희생과 도고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that come to God by him)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한다는 것이다.

Wherefore, it is not these things in themselves that can give us rest and peace, but their relation unto the person of Christ. 오웬은 좀 더 과격하게 헌신과 도고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구원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계에 두었다.

* 오웬은 행 20:28의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구속하셨다"를 아버지로 이해한다(96). His blood alone could purge our consciences from dead works, who did offer himself

unto God, through the eternal Spirit: Heb. ix.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오웬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비춰진 영광을 설파하면서도, 히 9:14 승천하여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는 연결지어 말하지 않고, 성경 본문의 내용만을 제시한다.

히 9:14의 "그리스도의 피"와 행 20:28의 "하나님의 피"는 같다고 연결해야 합당하다. 오웬은 피에 대해서 제시하면서도 결국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결론시킨다. 우리의 죄책 대에서 구원에서(our relief against the

guilt of sin), consideration of intercession and propitiation(도고와 속죄의 고려)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유도한다. * Sin, as a transgression of God's law, places humanity in a state of guilt, a liability to God's judgment. 죄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반역)한 것이다. 그 자리에 guilt 상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인간성이 된다.

* 오웬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영화로우시다(요 1:18). 오웬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을 알도록 했다.

* 그리스도의 인격.... in the constitution of the person of Christ(그리스도 인격의 구성/헌법)

[[ 다음과 같은 순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우리는 이 경우에 양심이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의 배교에 대해 느끼도록 각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것들을 비난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리할 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고 쉽게 생 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들에 대해 싫어하신다는 것을 영혼에 깨 닫게 하실 때 너무 늦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것들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한다.

2. 구원의 방법은 복음에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중보(仲保, mediation)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평화가 획득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배교한 죄인이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된 자들과 더불어 유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실제로 알게 되었을 때 불신앙의 능력을 통해 끊임없는 반대들이 일어나 그를 불안하게 할 것이다.

4. 그러므로 그에게 안식과 평화와 만족을 주기에 원칙적으로 적합 한 것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구성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이 무한한 결과를 올바르게 고려하며 이것를 믿는 데 있다. 이것은 처음 부터 마음으로 하여금 "믿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의도되었던 어떤 목적이 성취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게 너무 힘드신 것이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와 같은 일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 아니면 그런 수단을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 적이 있으신가? 이것에 대해 어떤 반대도 제기될 수 없다. 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그가 그러하듯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서 붙잡는 것으로, 그 안에서 평화의 안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 (97-98쪽).

*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성모의 승천(피승천). Assumption은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사도 헌장 Munifoicentissimus Deus(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에서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불렀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 승천(Ascension)과 달리 하느님에 의해 ‘올림을 받음’(Assumption)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가톨릭신문). 성모 승천에 대해 밝힌 인물은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315~403)로 알려진다. 이외 4~5세기경 쓰여진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이 승천했다는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된 것은 투르의 그레고리오(538~594)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멜리토의 저작 사본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레타의 안드레아(660~740) 등이 쓴 논술 ‘하느님의 명칭들’에서 성모 승천을 증언하는 몇몇 구절들이 발견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634~~733)의 작품들과 7세기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당시 신자들이 성모 승천 교리를 받아들였음이 증언되고 있다. 요한 다마세노(655~750)의 강론 역시 성모 승천 교리에 대한 교회 초기의 전승을 엿볼 수 있다. 즉 마르치아누스 황제(396~457)와 풀케리아 황후가 예루살렘의 세례자 유베날리스에게 성모의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성모가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콘스탄티노플 근처 발케르네에 경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관련하여 신학적 근거가 세워진 것은 8~9세기경 아우구스티노의 서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대 알베르토(1296~1280),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보나벤투라(1217~1274), 교황 베네딕토 14세(1740~1758)에 의해 성모 승천 교의가 재확인 됐고 이러한 작업들을 바탕으로 1870년경부터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제기됐다. 1854년 12월 8일 발표된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확정된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는데 보다 큰 밑 배경이 됐다. 비오 9세의 교서 후 로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육체적인 승천도 교의로 규정돼야 하고 공포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쇄도했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로부터 1941년까지 수많은 이들이 그같은 교의 선포를 건의했다. 113명의 추기경, 300명 이상의 대주교와 주교들, 3만2천 명 이상의 사제와 남자 수도자들, 5만 명 이상의 여성 수도자와 800만 명 이상의 평신도들이 건의자에 포함됐다.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가톨릭 세계 모든 주교들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존경하올 형제 여러분, 귀하께서는 성모님의 육적 승천을 우리의 신앙 교의로 규정하고 선포해도 좋은지 지혜와 슬기를 다하여 잘 판단하시기 바라고, 여러분이 거느린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를 원하는지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설문지의 답변 결과는 ‘거의 만장일치’로 발표됐고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성모 승천에 관한 교의가 교황이 주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자들 건의와 청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눈여겨 볼만 하다.(가톨릭신문에서) 성모 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믿을 만한 전승(傳承)과 구세사(救世史)에 있어서 성모의 역할, 성모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성모의 위치 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이다. 즉 마리아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성자를 잉태하여 생명창조주를 낳으신 마리아의 육체에 무덤의 부패를 면하게 하신 것이다.(가톨릭사전)

Assumption of the human nature into union, the only act of the person of the Son towards it 성령께서 아들에게 한 유일한 행위, 인간 본성에 연합의 추정(존 오웬의 성령론, 3장).

The humanity of Christ refers to the reality that in his incarnation, the Son of God assumed a complete human nature with all its limitations (but without in any way surrendering his divinity), so that he might serve as humanity’s representative, substitute, and example.

* An assumption is something that you assume to be the case, even without proof. assumption은 증명없이 가정하는 어떤 것이다. Although 'presume' and 'assume' both mean "to take something as true," "presume" implies more confidence or evidence backed reasoning. An "assumption" suggests there is little evidence supporting your guess. presume과 assume 모두 참으로서 무엇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presume은 배경이 합리적인 증거나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추정'은 당신이 추측하는 것에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Titian, 1516-1518.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or Frari Assumption

하나님은 자비하사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의 주체가 되게 하셨다 // 오웬에게 성육신의 주체는 하나님의 자기 행동이다.

칼빈은 성육신의 주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Calvin, Commentary, John 1:1-5(CO 47.470-471).

성육신은 신성과 인성이 아니라 영원하신 말씀이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인격이 주체이다. 문병호, 『기독론: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531.

성육신의 전제와 근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에 있다. 성육신의 주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시다.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바빙크에 따르면, 성육신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이다. 기원, 시작, 효과에 있어서 그것은 전체 삼위일체의 사역이다. 그러나, 성육신의 주체와 목적에 있어서 성육신은 성자에게 고유하다. 성육신은 제2위 성자 하나님께 고유한 것이다.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인성을 입으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제2위이신 하나님, 곧 로고스이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표현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 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1984) 333.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중보에 대해서 일치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성육신의 주체, 방법, 중보의 구도에서는 차이가 쉽게 발생한다.

"차라리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의 신비를 겸손히 찬양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경배 받아야 할 결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을 찬미하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믿는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큰 자비가 필요할 것이다"(86-87쪽). 오웬은 "성육신의 목적"을 하나님의 찬양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서철원은 교부들의 견해를 받아 성육신의 목적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으로 제시했다. 즉 오웬은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데, 서철원은 성육신에서 죄인을 구원하신 신비에 대해서 고백한다.

* 구속 언약에 관한 오웬의 다섯 가지 특징에서 첫째 항목에 주의를 기우리지만, 좀 더 예민한 부분은 둘째 항목이다. 오웬의 둘째 항목에서 "언약의 원리로서 아버지(the Father as principal of the covenant)", 즉 성부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에 관해서 오웬은 다섯 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설명한다.

Regarding the pactum salutis (or covenant of redemption), Owen explains that there are five characteristics:

● 성부와 성자는 택자의 구원이라는 공통의 목표에 대하여 상호간에 동의한다.(히 2:9-10; 12:2; 슥 6:13; 13:7; 시 55:14; 잠 8:22-21);

● the Father and the Son mutually agree to the common goal of the salvation of the elect (Heb 2:9-10; 12:2; Zech 6:13; 13:7; Ps 55:14; Prov 8:22-21);

●언약의 주체로서의 성부는 성자에게 성부의 뜻을 행함으로서 택자의 구속의 보증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수행하도록 요구하신다.(미 6:6-7; 베전 1:18; 히 10:4; 롬 3:25; 빌 2:6-7; 갈 4:4; 롬 8:3; 히 10:9; 사 49:5; 요 14:28; 사 53:10);

●the Father as principal of the covenant requires the Son to accomplish all that is necessary to secure the redemption of the elect-to do the Father's will (Mic 6:6-7; 1 Pet 1:18; Heb 10:4; Rom 3:25; Phil 2:6-7; Gal 4:4; Rom 8:3; Heb 10:9; Isa 49:5; John 14:28; Isa 53:10);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실 것에 대한 상급을 약속하신다.(사42:4; 시 16:10; 89:28; 히 5:7; 사 53:10-11; 히 12:2; 사 42:1-4; 히 7:28);

●the Father promises to reward Christ for accomplishing his will (Isa 42:4; Ps 16:10; 89:28; Heb 5:7; Isa 53:10-11; Heb 12:2; Isa 42:1-4; Heb 7:28);

●성자는 성부로부터 주어진 과업을 받아들이셨으며(시 40:7-8; 16:2; 사 50:5; 빌2:6-8)

●the Son accepts the work given to him by the Father (Ps 40:7-8; 16:2; Isa 50:5; Phil 2:6-8); and

●성부는 성자께서 완성하실 과업을 수용하실 것에 동의하신다.(사 49:5-6; 시 2:7 행 13:33; 롬 1:4; Ps 2:8; 요 17:1, 4-6, 12-16; 히 9:24).

●the Father agrees to accept the Son's work upon its completion (Isa 49:5-6; Ps 2:7 Acts 13:33; Rom 1:4; Ps 2:8; John 17:1, 4-6, 12-16; Heb 9:24).

오웬이 인용하고 해석한 수 많은 본문들 가운데 명백한 것은, 성경이 성부와 성자가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데 동의하셨음을 보여주고있다는 기초적인 생각들이다.

Evident from the cornucopia of texts that Owen cites and exegetes is the basic idea that Scripture shows that the Father and Son agreed to redeem the elect.

출처: https://byfaithalone.tistory.com/entry/존-페스코가-말하는-존-오웬의-그리스도와의-연합과-칭의2부-1 [byfaithalone:티스토리]

정리.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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