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잉글랜드, 뉴잉글랜드에서 언약도, 필그림, 퓨리턴으로 구분해 보자
형람서원 고경태 박사
학문의 중요한 한 기능은 분류이다. 근대 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다변화되었고, 현대 사회가 되면서 상상할 수 없이 다변화되고 있다. 이제 모든 개인이 하나의 분류점을 가질 정도로 다변화되었다. 학문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 분류를 정당하게 세우고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교회에서는 다변화가 아닌 하나로 묶여지는 현상이 있다. 1948년에 시작된 WCC(세계교회들협의회)라는 우산 아래로 교회들이 모여들고 있다. 개혁파 신앙은 선명한 자기 믿음의 체계 수립을 지향한다. 즉 개혁파는 상당한 학문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칼빈주의 강연>에서 개혁파의 특징을 학문을 사랑함의 증거로 처음 행위를 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필그림은 처음 짓는 건물이 예배당(언덕 위의 도시, a city on the hill)이었다.
1. 최근(24.12.03) NEWSM에서 "pilgrim과 puritan이 같지 않다"는 내용이 있었다. 마이애미 대학 역사학 교수 마이클 카라필로(Michael Carrafiello)의 분석이었다. 그의 분석은 뉴잉글랜드에 들어온 청교도들의 성향의 차이를 좀 더 세밀하게 분류한 것이다.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들어온 사람을 필그림(pilgrim)으로, 1620년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을 퓨리탄(puritan)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것은 페리 밀러(Perry Gilbert Eddy Miller, 1905-1963)가 칼빈과 청교도를 분류한 것 - 밀러 테제(Miller Thesis) - 보다 더 정교하게 분류한 것이다.
(참고. Michael Carrafiello: How the first Pilgrims and the Puritans differed in their views on religion and respect for Native Americans)
카라필로는 초기 뉴잉글랜드에 다른 두 성격의 진영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그는 메이플라워에 타고 있는 사람 중 40명이 필그림이었고, 65명이 불신자(nonbelievers)가 있었다는 것이다. 필그림들은 그들을 이방인(strangers)이라고 부르며, 함께 폴리머스 식민지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620년 이후에도 잉글랜드에서 신자들이 유입되었는데 그들을 퓨리탄으로 분류한다. 카라필로는 "pilgrim과 puritan"의 분류를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로 분류했다. Pilgrim 지도자 윈스럽(Edward Winslow, 1595-1655)는 원주민을 “신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믿을 수 있고, 재빠르며, 총명하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퓨리탄은 원주민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며 개종을 거부하거나 저항할 때는 가혹하게 대했다고 했다. 두 진영이 같은 추수감사절을 지켰지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리 밀러나 카라필로는 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일반학문의 분류는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다. "pilgrim과 puritan"은 교회사의 한 족적이기 때문에, 교회사적 관점으로도 분류해야 한다. "pilgrim과 puritan"은 회중주의를 지향했다. 그들은 회중파를 이루었는데 두 부류, 세빛파와 옛빛파(New Lights & Old Lights), 나뉘었다. 그리고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1649)의 핸 허친슨(Anne Hutchinson, 1591-1643)의 재판을 눈여겨 볼만하다. 앤 허친슨은 뉴잉글랜드의 무율법주의 논쟁의 희생양 중 한 사례이다. 허친슨의 교사는 코튼(John Cotton, 1585-1652)이었다. 코튼은 non-separating nonconformity(비분리파 비국교도)로 활동하다가, 1633년경에 찰스 1세의 박해를 피해 뉴잉글랜드로 도피했다. 그런데 뉴잉글랜드로 도피한 코튼을 따라 앤 허친슨도 이주했다. 그녀는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오직 은혜만을 외쳤다. 결국 교회분열의 죄로 정죄받았다. "언덕 위의 도시"를 건축하려 했던 필그림은 separating nonconformity(분리파 비국교도)였고, 그들은 평등을 추구하며 원주민과 화합을 지향했지만 크리스텐덤 사회를 지향하면서 다른 믿음에 대한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을 가졌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찰스 1세는 국교도(conformity)가 아닌 성향은 박해하며 추방하며, 뉴잉글랜드로 이주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nonconformity(청교도, purtitan in England)에는 분리파(English Dissenters or English Separatists)와 비분리파(Non-separating Puritans)가 있었다. 이들의 선조는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이다.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준 위인은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와 블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이다. 한 라인은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로 잉글랜드 장로파가 있다. 존 후퍼는 청교도의 아버지이고, 윌리엄 퍼킨스는 회중주의의 아버지이고, 카트라이트는 잉글랜드 장로파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청교도하면 회중주의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1948년에 잉글랜드 장로파가 무력에 의해서 축출되어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 언약도(Covenanters)는 1660년부터 1688년까지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믿음을 지켜 장로파 신앙 체계를 유지시켰다.
우리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큰 교파, 장로파, 회중파, 침례파, 감리파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는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으로 잉글랜드국교회주의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감리파는 국교회 사제로 별세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후예들이다. 존 웨슬리와 함께했던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웨일즈 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of Wales)로 칼빈주의-감리교(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추구했다. 이 가르침은 로이드 존즈 박사(1899-1981)가 우리시대의 대표 위인이다.
회중파는 잉글랜드가 아닌 뉴잉글랜드에서 형성된 교파이다. 세빛파와 옛빛파로 두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청교도 성향의 분리파 청교도와 비분리파 청교도의 성격으로 보인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들어온 성향은 분리파 청교도이다. 회중파 중 한 섹션은 유니테리언을 표방하고 있다. 회중파의 논쟁에서 알미니안과 유니테리언이 급진적으로 번창했고,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이 유니테리언으로 경도되었다. 지금 하버드 대학은 유대인의 대학으로도 볼 수 있다.
회중파의 격돌에서 유사한 정치체계인 침례파가 급성장하는 계기를 가졌다. 회중파와 침례파는 동일한 회중주의이지만, 침례 방식에서 차이를 갖는다. 미국 침례파는 특수침례파가 강하게 형성되었고, 또한 세대주의 성향의 침례파도 잘 형성되어 있다. 대각성운동에서 침례파 교회들이 급성장해서 미국 개신교에서 가장 많은 성도 숫자를 갖고 있다.
장로파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들어간 사역자들이 모여서, 1706년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장로파는 회중파보다 더 신학논쟁이 심화되어 여러 신학 성향으로 많은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는 미국 장로교의 영향으로 프린스턴을 중심으로 구 프린스턴(1920년대 기준)으로 한 장로파와 프린스턴으로 한 장로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근원은 영국과 미국을 통한 신앙적 성향이다.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로이드 존즈 박사(웨일즈 장로교)와 존 스토트 목사(성공회 사제)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박형룡 박사의 가르침을 받아 네덜란드의 신학으로 한국 장로교 신학을 이루려는 성향이 발생했고, 구프린스턴을 이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전통의 성향이 있는데, 후자의 성향이 반틸 박사 이후로 신학이 변화되었다. 현대주의 신학 체계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청교도주의로 경도되었다. 한편 미국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교인 칼빈대학교는 여성안수를 통과시켰고, 동성애에 대해 관용적 입장을 갖고 있다. 보수적인 한국 신학교의 다수의 교수진들은 청교도주의에 관용적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칼빈대학교(멀러 테제) 그리고 리폼드 퓨리턴 대학 설립자인 조엘 비키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그들의 문제점으로 학문적 기능인 명료한 분류가 아닌 통합적으로 역사와 현재를 보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현 제 신학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 신학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학자는 반틸 박사 이후로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없다. 칼 바르트 신학을 포용하는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이다. 칼 바르트를 포용한 복음주의는 복음을 전도하는 것을 지양하고 세계를 포용하는 것을 지향한다. 모든 것을 분류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을 지향한다. 분류기능이 없는 학문은 학문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학자의 소양 중 하나는 명료한 자기 의식이다. 신학자는 자기 의식을 밝히는 것이 의무에 속한다.
디모데전서 4:12-16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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