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형람성경] 이사야 6 장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 중에 백성에게 파송 받은 이사야

형람서원 2024. 4. 2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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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이사야 6 장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 중에 백성에게 파송 받은 이사야

이사야 6장은 이사야 소명에 대한 말씀.  이사야 선지자는 강력한 군주 웃시야에게 기대를 했는데, 그 왕이 죽자 큰 난관에 있었고, 그런 이사야에게 여호와께서 임하셔서 백성에게 보내셨다.

1-7절, 이사야가 본 환상

[사 6:1절]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寶座)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聖殿)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다(주전 790-739년 52년 동안 통치).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했고, 그가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형통케 하셨다. 그러나 웃시야는 부강해졌을 때 마음이 교만해졌었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할 수 있었던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가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즉석에서 나병 환자가 되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회개하지 않으면서 나병 환자로 살다가 죽었다(대하 26:5, 16, 19, 21).

교만하여 범죄했던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엄한 징벌을 받으며 죽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이사야는 강한 왕이 사라짐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웃시야 뒤를 이는 요담의 통치는 짧았고, 아하스 때에 예루살렘을 침공한 앗수르의 대치에서 유다가 여호와의 나라인 정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참된 왕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사야는 성전에 그의 옷자락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the train of his robe filled the temple). 모세는 여호와의 등을 보았는데(thou shalt see my back parts, 출 33:23), 여호와의 옷자락을 본 것이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거나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자들이었다.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2:41에서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거하셨다. 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곧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사야가 본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 그 보좌는 왕의 보좌이다. 이사야는 그를 ‘왕’이라고 생각했다.

5절,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그가 제사장이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김효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시고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고 선지자이시다.

[사 6:2-4절] 스랍(seraphim)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唱和)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門)지방의 터가 요동(搖動)하며 집에 연기(煙氣)가 충만(充滿)한지라 ※ 2절, 스랍(seraphim), 세라핌, 치천사(熾天使), 撒拉弗(중), 창화(唱和)->개역개정 ‘서로 불러’, one called to another and said. 문자적으로 개역개정이 합당하지만 의미로는 창화(唱和), “서로 화답하며 노래함”이 더 합당하다. 합창(合唱)과 창화(唱和)는 같지 않다. 스랍의 창화로 성전 문지방의 기초가 흔들렸다.

이사야는 천사들(세라핌)이 보좌 주변에서 선 것을 보았다.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 등은 천사 개인의 이름이고, 그룹과 스랍은 천사 부류의 이름들이라고 보인다(김효성). 이사야 6장에만 나오는 스랍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다.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었고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면서 서로에게 외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했다(3절).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들의 겸손을 나타낸다. 또 그들이 다른 두 날개로 난 것은 그들이 민첩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을 즐거이 순종한다(김효성). 스랍들은 하나님께 거룩, 거룩, 거룩으로 찬송했다. 거룩은 유한한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심과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가리킨다(김효성).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능력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사야가 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시요 구원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으로도 섬기지 못했고, 우상보다 못한 신으로 전락시켰다. 받은 은혜를 잘 감당하는 것도 은혜이다.

천사들이 외치는 소리로 인해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표시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에도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었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었다(출 19:16, 18). 이와 같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사야는 보좌에 가득한 옷자락(1절)과 연기(filled with smoke, 4절)를 보았다.

[사 6:5절]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禍)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본 환상과 소리로 말미암아 자기 부정(Woe to me!)을 고백했다(5절). 특히 그는 자신의 입술의 더러움을 깨닫고 고백했다. 주의 영광을 가정한다면 신비주의는 황홀(恍惚, ecstacy)로 가지만, 기독교는 자기를 명확하게 부정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도식화할 수 있겠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눅 5:8).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군의 여호와를 왕으로 고백한 것(my eyes have seen the King, the LORD Almighty)은 독특한 고백이다.

[사 6:6-7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著)로 단(壇)에서 취(取)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화저(火著), tongs -> (개역개정) 부젓가락: 화로에 꽂아 두고 불덩이를 집는 데 쓰는 쇠젓가락으로 부저, 혹은 화저(火著)가 준말이다. 7절 입(mouth) -> 입술(lips, 개역개정). 영역(英譯)에서는 구역(舊譯)에서는 mouth를 신역(新譯)에서는 lips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입(口)은 윗입술과 아랫입술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둥이(주댕이, 嘴)는 일부 동물, 물고기 따위의 뾰족하게 나온 코나 입 부분.

스랍 중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a live coal)을 손에 가지고 와서 선지자 이사야의 입에 대었다(6절). 그 스랍 중 하나가 이사야 선지자의 입에 숯불을 대면서 악(惡)이 제해졌고 죄(罪)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했다(your guilt is taken away and your sin atoned for). guilt, iniquity를 ‘악(惡)’으로 번역한 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guilt는 통상 죄책(罪責)으로 번역하는데, 법정에서 “유죄(有罪) 선고”이고, 죄책감(罪責感)이다. 사람은 유죄 선고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유죄 의식을 갖고 있다. 즉 악행(惡行), 죄가 모두 유죄 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천사는 이사야에게 죄사함을 선언했다. 죄사함을 선언할 인격(칭의 선언)은 오직 2위격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저자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죄사함은 불과 물과 성령으로 된다. 물과 성령 (눅3:16)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8-13절, 나를 보내소서

[사 6: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Lord-아도나이)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신의 추함과 입술의 부정함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께서 천사로부터 제단의 숯불을 입에 대어 사죄 선언을 받았다. 그런 후 이사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아도나이, Adonai)를 사용했다. 아도나이는 여호와의 모음으로 생각되는 어휘이다. 우리 성경은 아도나이(Lord)를 ‘주(主)’로 번역했고, Jehovah(YHWH, LORD, Tetragrammaton)는 ‘여호와’로 음역했다. LXX에서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만 표기되어 있다.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다(8절). 주께서 ‘우리’라고 일인칭 화법으로 제시하신 것은 구약의 삼위일체 용례로 본다. 구약성경에서 몇 번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창 1:26), 또 범죄한 첫 사람들을 에덴에서 내어보내실 때(창 3:22), 또 바벨탑을 쌓는 자들의 언어를 혼란시키실 때(창 11:7)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위해서 합당한 일군(사역자)를 찾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목자없이 고생하는 양들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군이 적기 때문에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도록 명령하셨다(마 9:35-38).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위해 쓰실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 주님의 말씀에 이사야가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8절). 그는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가 사죄(赦罪)의 확신에서 났을 것이다(김효성). 죄책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머물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죄사함을 확신할 때 힘과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게 될 것이다. 죄는 영원한 멸망의 원인이며 거기에는 두려움밖에 없지만, 죄사함은 영생의 길이며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억지로 얻은 사함의 감정이 아니라, 실재 보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께 받은 사함이다. 은혜로 사함을 받았고, 자유롭게 주께 헌신한다.

[사 6:9-10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여호와께 보냄받은 사역자의 고난은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슬프고 이상한 말씀이다.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데 깨닫지를 못한다. 보아도 알지 못한다(9절).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도 그러하다(마 13:13). 백성의 마음이 둔하여 귀와 눈이 약해져서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염려컨데’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백성에게 보내서 전하고 보여주면서 돌이켜서 낫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미적으로는 Otherwise(역접)와 lest(부정) 의미가 있다. 그들의 마음이 둔하지 않았다면 이했을 것이다 는 의미와 그들의 마음이 듣고 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우리 번역은 마태복음의 말씀에 근거한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사야서 문장에 의하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너무 완고(完固)하여 혹은 완악(完惡)하여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보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상태에 선지자를 보내는 것은 마지막 경고이고, 끝이 없는 사랑이다.

[사 6:11-13절]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城邑)들은 황폐(荒弊)하여 거민(居民)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全廢)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10분의 1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황폐(荒廢) devastation, 집, 토지 따위가 인위적 혹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 못 쓰게 된 상태, 황폐(荒弊) 거칠고 못쓰게 된 상태로 인간의 심성에 사용함, 피폐(疲弊), 황량(荒凉). 황폐(荒廢)와 황폐(荒弊)의 명확한 의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움. “황폐와 전폐”를 개역개정에서 “황폐”로 전부 번역했는데, 동일한 어휘는 아니다. terebinth or an oak terebinth은 밤나무로 번역했는데, 창 12:6, 35:8, 수 24:26, 삼하 18:10, 왕상 13:14, 사 1:29 에 테레빈 나무를 상수리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oak는 참나무로 상수리나무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역 기간을 질문했고, 여호와께서 유다의 성읍들은 다 황폐해질 때까지로 답하셨다. 10분의 1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다. 그루터기가 될 때까지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악 중에서 회개하지 않는 유다는 결국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부과된 사역은 고난의 길이다. 그 길을 이사야 선지자가 나겠노라고 화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뒤를 이는 선지자가 예레미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야를 가장 큰 고난의 선지자라고 한다. 그가 행한 41년간 사역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멸망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은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결국 멸망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 당시 예레미야도 의인이었지만, 소돔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고, 그 중 롯의 가족은 성의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구원할 의인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 멸망될 의인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고난의 선지자이고, 그것을 본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고난을 받았다. 그것은 선지자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은 백성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지자들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명령과 포기하려고 해도 속에서 일어나는 불 때문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씨(the holy seed)에 희망을 두었다(13절). 13절의 문맥은 특이하다. 그것은 상수리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난다는 것이 아니라, 상수리나무와 밤나무(terebinth or an oak)에 그루터기는 사라지고, 새순이 그루터기가 된다(The holy seed is its stump)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싸역(1판)에서 "거룩한 씨는 그루터기 안에 있을 것이다"라고 흐름에 맞게 번역되었다.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공동번역)도 흐름에 맞게 번역했다. that which shall stand therein, shall be a holy seed(두에 랭스 번역)은 공동번역과 유사하다.

그루터기에서 난 새순이 아니라, 새로운 씨앗이 그루터기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가지에서 새순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11:1). 이스라엘 땅의 ‘거룩한 씨’는 메시아를 암시한다. ‘남은 자’(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나오지만 전혀 다른 씨이다. 이스라엘은 아담과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지만, 거룩한 씨는 아담과 다른 그리스도의 영적 후손이다. 거룩한 씨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다(마 1:1).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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