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보자와 구속주, 중보자의 인격 안에서 구속주께서 일하심
2. A second reason why the Mediator behoved to be God and man—viz. that he had to convert those who were heirs of hell into children of God. 중보자께서 하나님과 사람이 되어야 하는 둘째 원인, 즉 지옥의 상속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개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Beveridge). The Mediator must be true God and true man. 중보자는 반드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어야 한다(Battles). 문병호, “우리의 것을 취하시고 자기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심”.
※ 칼빈에게서 중보자와 구속주가 구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our Redeemer in the person of his only begotten Son. 아마도 루터의 숨어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의 구도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중보자를 생각한다면, 중보자께서 상식적인 일이 아닌 일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직무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것이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ex haeredibus gehennae, regni coelestis haeredes). [이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nostrum acciperet) 자기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며(transferret), 본질상 그에게 속한 것을 은혜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회복이 일어나겠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성육신이 우리의 것을 취해서 성취한 자기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구도를 제언했습니다. 이러한 구도가 후기에 좀 더 깊은 사색이 되어 예수께서 취하신 무엇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구도를 상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인격적이고 법정적이기 때문에 어떤 성질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무엇이 신성의 본질이 아니더라도(오시안더의 신성의 주입의 주장) 여전히 무엇인가가 전이된다는 제언(transferret ad nos suum, what is ours as to transfer to us what is his)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Battles는 impart(자기 분여)로 번역했고, 문병호는 ‘옮기시고’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취함, assume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취하다’를 acciperet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assumptus-homo란 말은 자칫 Nestorius파 또는 양자론(adoptionism)적인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교황 회칙 Sempiternus rex(Denz., 3905)는 assumptus-homo란 말을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양자론에 기울 수 있으니 조심하여 사용하도록 경고했다”(네이버사전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인성을 취한 구원자 신학. quod non est assumptum non est sanatum(인성을 취하지 않았으면 치유될 수 없었다)으로 표현되는 구원론(救援論), Assumptus - homo Theology). 로마 카톨릭에서도 성육신에 assumptus를 사용하는 것에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칼빈은 아래 문장에서 ‘취하다’를 ‘suscipere’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즉 assumptio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Beveridge는 이 문장에서 assume으로 번역했습니다. acciperet(take, 취하다) 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어휘로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Battles는 동일한 impart로 번역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 보증(arrha)을 의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몸에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에서 자기 살을, 우리의 뼈에서 자기 뼈를 만들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고유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고유한 본성을 취하셨다(suscipere).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도 되셔야 했다.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입술로 거룩한 형제 관계를 천명하셨다(요 20:17).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천국의 상속자임이 확실하다. 천국의 모든 소유는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의 것이며, 그가 우리를 양자로 세워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nos sibi fratres adoptavit). “형제면(fratres) 또한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된다(롬 8:17).
칼빈의 문장을 보면 “독생자께서 양자를 삼으셨다”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문병호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자기의 형제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양자삼음(adoptavit, has adopted)”의 어휘가 빠졌습니다. 양자삼음을 독생자께서 하셨다는 것이 난해합니다. 그러나 문장을 좀 더 깊이 보면 칼빈은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출생함과 독생자의 친구 양자를 세우심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속주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것이 필연적이다. 그는 확고하게 죽음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떤 생명이 이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 자체(ipsa iustitia)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세상과 공중(空中)의 권세들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보다 더 탁월한 권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명이나 의나 하늘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구속자로 우리를 구속하기로 정하셨다(Sese ergo clementissimus Deus in persona unigeniti redemptorem nostrum fecit, dum nos redemptos vol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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