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기독교강요

신자에게 남은 죄는 선행으로 대체할 수 없다

형람서원 2024. 4. 1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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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에게 남은 죄는 선행으로 대체할 수 없다
1. 선행은 구원의 공로적인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일 뿐이다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와 관련하여 칼빈은 인간의 선행을 공로로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을 비판한다. “완벽한 모순덩어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람의 모든 공로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교황주의의 습관에 따라 이들을 결합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직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기꺼이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반쯤 찬양을 드리고 사람에게 특권이 있음을 주장함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오를 엄호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니엘 선지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자비를 상호 반대되게 대치시킴으로써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다.” Comm. Daniel. 9:18.
 
칼빈은 자기가 선행을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맞서 싸웠다. John H. Leith, John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칼빈의 삶의 신학』, 이용원 역(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112.
문제의 핵심은 선행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선행의 지위이다. 로마 카톨릭은 선행을 공로라 보았으나, 칼빈에게는 선행은 신앙의 열매일 뿐이다.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57.
 
칼빈에 따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는 진리를 해치려고 하는 자들은 믿음이 의의 시작이며, 우리가 중생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믿음이 문이며, 의를 성취하는 것은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Comm. Ephesians. 2:10
 
선행은 구원의 공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신실한 자들은 입술로써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Comm. Mattew. 25:35.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구원받지 않지만 우리는 선행을 위해서 구원받았다. Antonio Carlos Parro, “칼빈의 선택과 예정론과 하나님의 선교", 『칼빈과 복음주의 신학』, 김찬영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338.
믿는 자들은 선행을 제일가는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Comm. Titus. 3:8.
칼빈에게 행위는 구원의 보조적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행위가 구원의 확신을 강화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선택의 표징을 인정하였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져 그 증거가 나타난다. Inst. 3.15.8, 3.14.18; 윤광원, 『존 칼빈의 자기 부정의 렌즈로 본 신앙생활의 핵심』(서울: 한국학술정보(주), 2009), 161.
 
“천국에 들어가는 제일 원인(the first cause)은 하나님의 자비(his own mercy)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중생(重生)과 그 열매(regeneration and its fruits)들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는 기초가 아니지만,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our most merciful Father)께서 그들을 자신과의 교제에로 인도하시고 그 교제 안에서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는 수단(the means)과 방법이다.” Inst. 3.17.6.
 
형제 사랑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상징이다. Comm. on John. 3:14.
 
선행은 하나님의 선택을 인식시키는,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의 표징이다. Inst. 3.24.5.
 
칼빈은 선행을 구원의 열등한 원인이라고까지 말한다. 원종천, “칼빈의 예정과 성화", 『칼빈의 구원론과 교회론』(서울: SFC, 2011), 166.
 
기독교강요에서도 선행을 부르심의 열매, 하나님의 선물, 선택을 받았음을 알게 해주는 표지라고 말한다. Inst. 3.14.19-20;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57.
 
2. 하나님은 명령만 하실 수도 있으시나 자비하사 약속을 주시고 부족한 선행에도 상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신의 권리상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저 요구하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그의 인간에 대한 자비는 어찌나 크던지 약속을 통해서 그를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저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명령만 해도 될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마고 우리와 의견의 일치를 보시는 것은 보통 정도의 관용이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모두 성취했을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은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이다(눅 17:10). 우리가 제 아무리 능력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 한다 해도 그렇다 해서 하나님에게는 결코 우리에게 얽매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스스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가운데 자발적인 채무자가 되신 것뿐이다.” Comm. Leviticus. 18: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가 좋아하시는 것을 명령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다. 또한 우리는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더하신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완전히 장악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의 자녀로서 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약속을 하시는 친절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순수한 긍휼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Sermon. Deuteronomy. 8:1-4.
 
“하나님의 뜻은 그의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또 그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시지만 그들을 향해서 선한 뜻을 품은 것은 자기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Sermon. Deuteronomy. 10:15-17.
“긍휼(mercy)은 인간의 모든 자만심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곳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성실하게 섬길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상해 주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빚을 지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빚도 지지 않으셨다. 또 다른 하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엄격하게 조사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임이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 보상해 주실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Sermon. Deuteronomy. 5:8-10.
 
보상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다. 장호광,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윤리』(경기도 안양: 잠언, 2009), 183.
 
어떤 선한 일도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어떤 상도 결국 그분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Comm. Psa. 62:12(CO. 31, 593).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보상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매인 자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단히 매이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낼 가치가 있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거나 또는 신세를 지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권한 행사를 유보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통이 크신 것은 내가 전에 말했던 대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하심에서 비롯된다.” Sermon. Deuteronomy. 4:1-2.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선동하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고 계시다거나 또는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에게 빚을 질 수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선하신 뜻으로 인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매어 놓으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Sermon. Deuteronomy. 4:1-2.
 
 
3. 선행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사이나 하나님은 이 선행에 상을 주신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시더라도 우리는 그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유롭게 그의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해드리는 일은 단지 진 빚을 갚는 것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거저(freely) 주시는 그 면류관(the crown)을 귀한 것으로 평가하신다. Comm. Mattew. 20:1.
“선행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Inst. 3.15.4.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로 선한 일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사를 일종의 보상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통상적인 표현 방법이다.” Comm. Mattew. 5:45.
 
선행은 모두 중생의 열매(the fruit of regeneration)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사이다(Everything in us, therefore, that is good, is the supernatural gift of God). 선행이 자유의지(free-will)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옳은 의지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the right will itself, which is his workmanship). Comm. Ephesians. 2:10
“인간의 의지가 선을 향하며 그것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Inst. 2.3.14; 장호광,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윤리』(경기도 안양: 잠언, 2009), 184.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Comm. Mattew. 25:35.
“우리의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일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얻게 될 때까지 자비를 끊임없이 베푸실 것이다.” Comm. Isaiah. 26:12.
 
 
4.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선행으로 이끈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을 회개하도록 돌아서게 하며, 선행으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Comm. Joel. 2:12-13.
하나님의 자비를 알아야 선행이 가능하다. Inst. 3.3.2.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는 행동을 위한 동인이 되며 그리스도는 의롭게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한다.” 장호광,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윤리』(경기도 안양: 잠언, 2009), 40.
“우리에게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도록 자극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거기에 따르는 모든 축복이 그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흘러넘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도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Comm. John. 15:16.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만 따뜻하게 행한다 하더라도 그의 구제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Comm. Mattew. 25:35.
 
어떤 궤변론자들은 불신자일 때에도 그의 자유의지로 선한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일 때에도 자신들의 자유의지와 성령께서 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는 전적으로 비기독교철학일뿐이다. Comm. Romans. 8:7.
우리의 마음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완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멍에에 본래 굴복될 수가 결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본질상 죄의 종인 것을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함을 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야 한다. Comm. Romans. 8:7.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필연적으로 그 능력과 효력(his power and efficiency)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나타나는데, 그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이다(it hence appears that we are God’s children, that is, when his Spirit rules and governs our life). 우리에 의하여 행해지는 선한 행위가 무엇이든지 성령의 은혜로부터 나온다(whatever good works are done by us, proceed from the grace of the Spirit).” Comm. 1 John.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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