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리스도를 믿음, 아버지의 자비와 약속은 자녀에게 확실하다
32. All the promises included in Christ. Two objections answered. A third objection drawn from example. Answer explaining the faith of Naaman, Cornelius, and the Eunuch. 32. “The promise of faith fufilled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믿음의 약속; 문병호는 “율법의 약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정리했습니다.
반복하지만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사도는 전체 복음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포함시켰다(eius agnitione totum evangelium apostolus, 롬 1:17 참조). 다른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씀했다(고후 1:20).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을 통해서 자기의 인자하심(benevolentia)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하심이 없는 약속은 없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전체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전체 지식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복음, 믿음의 말씀을 들은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믿음의 주의 이름을 알며, 주께서 주신 계명을 지킵니다.
악한 자들은 반복되는 하나님의 광대한 복을 자주 받고 또 받으면서도 도리어 더 큰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들은 복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혹시라도 그들이 인정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야생 짐승들과 같은 조건에서 하나님의 자유의 열매(the same fruit of God’s liberality)가 제공되었을 때에, 짐승들과 같은 수준으로 하나님을 안다.
※ 라틴어 원문은 부정문인데 부정문으로 번역하면(짐승들보다 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according to their condition, enjoy the same liberality, and yet never look beyond it, trans Beveridge) 의미에 혼선이 발생해서 평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짐승들과 동등한 위치로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로 칼빈이 제시했다고 이해했습니다. 문병호는 “다를 바 없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주신 약속을 상습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약속의 유효성은 우리 안에서 믿음이 일으킬 때만 나타나는데, 우리의 배신 때문에 약속의 힘과 특성(vis tamen ac proprietas)이 소멸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Dominus suis promissionibus)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인자하심의 열매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초대하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약속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dilectionis)을 증거한다는 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칭의의 유효한 원인(efficientem causam)에 대해서 논의가 많은데, 칼빈은 믿음의 유효한 목적(열매)에 대해서 제시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을 알고 확신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신자들에게 선행을 권하며, 약속된 상급으로 선행을 자극하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칭의 과정에 수반되는 선행과 사랑(operis verstri et dilectionis)을 강조하며, 그 행위에 따라서 영생을 얻을 자격을 가지게 된다고 구도화시켰습니다. 칼빈은 믿음의 유효한 목적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함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칼빈과 로마 카톨릭에서 어휘는 유사하지만 배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함”과 “인간의 선행과 사랑을 평가받아 영생얻음: 적정공로(適正功勞, condign merit)”으로 대별시킬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공로 개념은 적정 공로(適正功勞, condign merit), 재량공로(載量功勞, congruous merit), 잉여공로(supererogatory merit)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dīligō)을 받을 수 없다(neminem a Deo extra Christum diligi)는 것에 대해서 논쟁할 여지는 전혀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 17:5) 즉 아버지의 사랑(amor patris)은 그 아들 안에 거하고 머문다.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16).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한다. 따라서 사도는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며(엡 2:14), 다른 곳에서는 진들을 하나님의 부성적 자애(paterna pietate Deus, paternal affection/ fatherly faithfulness)로 우리와 묶여 하나가 되시는 고리로서 제시한다(롬 8:3 이하 참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실현된다고 당당하게 가르쳤다(롬 15:8).
어떤 사례에서는 위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수리아(아람) 사람 나아만(Naman)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에 중보자에 대한 교훈은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경건하다고 칭찬을 받았다(왕하 5:1-14, 눅 4:27). 이방인이요 로마 사람인 고넬료가 유대인들이 그것도 그 일부 사람들이 겨우 희미하게 알고 있던 일을 보면 분명하게 중보자를 아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행 10:31). 나아만의 속죄제물은 선지자 엘리사가 화답으로 반응했다(왕하 5:17-19). 믿음 없이는 이 두 사례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립이 만난 내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에게 조금의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제사하기 위해서 수고하며 비용을 들여 어려운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행 8:27). 그러나 빌립이 그에게 물었을 때에 그는 중보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확실하다(행 8:31).
나(칼빈)는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인격(Christi personam)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권한과 직분까지도 내포적으로 이었다고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비록 조금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원리들, 교훈들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것이 없었더라면 내시가 모르는 하나님께 제사하기(regione) 위해서 먼 예루살렘까지 왔을리가 없을 것이다. 유대교(iudaicam religions, Jewish religion)를 포용한 고넬료가 참 교리(verae doctrinae)의 기초를 알지 못했다면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나아만의 사례에서는 엘리사가 그에게 사소한 일들을 가르쳐주면서 가장 중요한 요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Christi cognitio)이 그들에게 희미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에 정해진 속죄제사를 실천했으며, 그 제사의 마침은 그리스도(fine ipso, hoc est Christo)였기 때문이다. 비록 두 사람이 이방인이지만 그들의 제사는 이방인들이 행한 거짓 제사와 구분되어야 한다.
※ 칼빈은 나아만, 고넬료(코넬리우스), 에디오피아 내시 등의 예를 제시합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의 구원의 서정은 계시가 중지된 우리시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민감하게 세워야 성경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을 분석하여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경시대와 우리시대를 동등하게 해석한 유형이 루터와 칼빈 시대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648년, 1688년, 1800년대가 되면서 점차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칼빈주의를 외치면서 강하게 도전했지만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루터와 칼빈 때도 오류였고, 지금도 오류입니다. 우리는 313년 이전처럼 열심히 단순하게 복음을 전도하고 모이기를 힘쓰며 성찬을 수행하며 교제에 힘쓰는 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 역사의 유업을 합당하게 존중하며 믿음을 정진해야 합니다. 사회변혁의 거대담론의 꿈은 중지해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도하지 않는 사회변혁은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천리길은 반드시 한걸음부터 시작하고, 두걸음으로 연결되고, 천만걸음을 걸어야 천리길입니다.
※ 구분(區分)과 구별(區別), 분별(分別): 표준국어대사전에선 ‘구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전체를 몇 개로 갈라 나눔’으로, ‘구별’은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 또는 그것을 갈라놓음’이라 풀이한다. distinguish 구별하다. 분리(分離, discriminate, separate, divide something) 각각 떨어짐, 분리(分利) 나눔, 이별(離別) 떨어져서 구별됨.
형람서원 고경태.
[Inst 3.2.32.] Rursum non sine causa in Christo promissiones omnes concludimus, quando et eius agnitione totum evangelium apostolus (Rom. 1, 17) concludit, et alibi docet, quotquot sunt Dei promissiones, in ipso esse etiam et amen (2 Cor. 1, 20). Cuius rei in promptu est ratio. Si quid enim pollicetur Deus, eo benevolentiam suam testatur, ut nulla sit eius promissio, quae non sit dilectionis testimonium. Nec refert quod ingentibus atque assiduis divinae largitatis beneficiis dum impii cumulantur, eo graviori iudicio eese induunt. Quum enim ea sibi e Domini manu provenire nec cogitent, nec agnoscant, aut si quando agnoscant, eius tamen bonitatem nequaquam apud se reputent, non possunt inde magis de eius misericordia edoceri quam brutae pecudes, quae pro conditionis suae modo, eundem liberalitatis fructum recipiunt, neque tamen prospiciunt. Nihilo magis obbtat quod destinatas plerumque sibi promissiones respuendo ultionem hac occasione maiorem sibi accersunt. Quanquam enim tum se demum profert promissionum efficacia ubi fidem apud nos invenerunt, vis tamen ac proprietas earum nostra infidelitate aut ingratitudine nunquam exstinguitur.
Nothing is more obnoxious than that, rejecting the promises usually intended for them, they are preparing for themselves a greater revenge on this occasion. For though the efficacy of the promises, when they have found faith with us, is at last brought forth, yet their force and propriety are never extinguished by our unbelief or ingratitude.
Ergo quum Dominus suis promissionibus, non ad percipiendos modo suae benignitatis fructus sed etiam cogitandos, hominem invitet, suam illi dilectionem simul declarat. Unde huc redeundum est, promissionem quamlibet esse divinae erga nos dilectionis testificationem. Atqui extra contro-
2:425 [CO 2.425] LIB. in. DE MODO PERCIPIENDAE CHRISTI GRATIAE. CAP. II.
versiam est, neminem a Deo extra Christum diligi. Ille est filius dilectus in quo residet et acquiescit amor patris (Matth. 3, 17 et 17, 5), et ad nos deinde ab eo se diffundit: sicut docet Paulus (Eph. 1, G), nos gratiam adeptos esse in dilecto. Ipso igitur intercedente, ad nos derivetur ac perveniat oportet. Proinde apostolus alibi pacem nostram ipsum vocat, alibi ceu vinculum proponit, quo paterna pietate Deus nobiscum devinciatur (Eph. 2, 14; Rom. 8, 3). Consequitur, in illum coniiciendos esse oculos, quoties uila promissio nobis offertur; nec absurde a Paulo doceri, in ipso confirmari et adimpleri quaecunque sunt Dei promissiones (Rom. 15, 8). Repugnant exempla quaedam: neque enim vel Naaman Syrum, quum de modo rite colendi Dei sciscitaretur ex prophetay de mediatore edoctum fuisse credibile est; laudatur tamen eius pietas. Cornelius hcmo gentilis et romanus vix tenere potuit, quod non omnibus Iudaeis cognitum erat, et quidem obscure; eleemosynae tamen eius et preces gratae fuerunt Deo (Act. 10, 31), et sacrificia Naaman, prophetae responso probata (2 Reg. 5, 17 seqq.), quod neuter potuit consequi nisi fide. Similis eunuchi ratio ad quem delatus est Philippus, qui nisi fide aliqua praeditus non sumpsisset longi ac difficilis itineris laborem et sumptus adorandi causa (Act. 8, 27 seqq.). Videmus tamen ut interrogatus a Philippo suam de mediatore inscitiam prodat. Et quidem fateor aliqua ex parte implicitam fuisse eorum fid(m, non modo quoad Christi personam, sed quoad virtutem et munus a patre iniunctum. Interea certum est, principiis fuisse imbutos quae gustum aliquem Christi, licet tenuem, darent. Neque hoc novum videri debet: qum neque eunuchus ex longinqua regione ad Deum wccghUum properasset Ierosolymam, et Cornelius, iudaicam religions m semel amplexus, tantum temporis non transigit, quin rudimentis verae doctrinae assuesceret. Quod ad Naaman spectat, nimis absurdum fuisset, quum de rebus minutis ei praeciperet Elisaeus, tacuisse de praecipuo capite. Quamvis ergo obscura inttr ipsos esset Christi cognitio, nullam tamen fuisse consentaneum non est: quia legis sacrificiis se exercebant, quae a fine ipso, hoc est Christo, discerni oportuit ab adulterinis gentium sacrificiis.
distinguish(구별), discerni , discriminate(구분, 분리)
32. On the other hand, we have good ground for comprehending all the promises in Christ, since the Apostle comprehends the whole Gospel under the knowledge of Christ, and declares that all the promises of God are in him yea, and amen.297 The reason for this is obvious. Every promise which God makes is evidence of his good will. This is invariably true, and is not inconsistent with the fact, that the large benefits which the divine liberality is constantly bestowing on the wicked are preparing them for heavier judgment. As they neither think that these proceed from the hand of the Lord, nor acknowledge them as his, or if they do so acknowledge them, never regard them as proofs of his favor, they are in no respect more instructed thereby in his mercy than brute beasts, which, according to their condition, enjoy the same liberality, and yet never look beyond it. Still it is true, that by rejecting the promises generally offered to them, they subject themselves to severer punishment. For though it is only when the promises are received in faith that their efficacy is manifested, still their reality and power are never extinguished by our infidelity or ingratitude. Therefore, when the Lord by his pro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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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es us not only to enjoy the fruits of his kindness, but also to meditate upon them, he at the same time declares his love. Thus we are brought back to our statement, that every promise is a manifestation of the divine favor toward us. Now, without controversy, God loves no man out of Christ. He is the beloved Son, in whom the love of the Father dwells, and from whom it afterwards extends to us. Thus Paul says “In whom he has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 (Eph. 1:6). It is by his intervention, therefore, that love is diffused so as to reach us. Accordingly, in another passage, the Apostle calls Christ “our peace,” (Eph. 2:14), and also represents him as the bond by which the Father is united to us in paternal affection (Rom. 8:3). It follows, that whenever any promise is made to us, we must turn our eyes toward Christ. Hence, with good reasons Paul declares that in him all the promises of God are confirmed and completed (Rom. 15:8). Some examples are brought forward as repugnant to this view. When Naaman the Syrian made inquiry at the prophet as to the true mode of worshipping God, we cannot (it is said) suppose that he was informed of the Mediator, and yet he is commended for his piety (2 Kings 5:17-19). Nor could Cornelius, a Roman heathen, be acquainted with what was not known to all the Jews, and at best known obscurely. And yet his alms and prayers were acceptable to God (Acts 10:31), while the prophet by his answer approved of the sacrifices of Naaman. In both, this must have been the result of faith. In like manner, the eunuch to whom Philip was sent, had he not been endued with some degree of faith, never would have incurred the fatigue and expense of a long and difficult journey to obtain an opportunity of worship (Acts 8:27, 31); and yet we see how, when interrogated by Philip, he betrays his ignorance of the Mediator. I admit that, in some respect, their faith was not explicit either as to the person of Christ, or the power and office assigned him by the Father. Still it is certain that they were imbued with principles which might give some, though a slender, foretaste of Christ. This should not be thought strange; for the eunuch would not have hastened from a distant country to Jerusalem to an unknown God; nor could Cornelius, after having once embraced the Jewish religion, have lived so long in Judea without becoming acquainted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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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udiments of sound doctrine. In regard to Naaman, it is absurd to suppose that Elisha, while he gave him many minute precepts, said nothing of the principal matter. Therefore, although their knowledge of Christ may have been obscure, we cannot suppose that they had no such knowledge at all. They used the sacrifices of the Law, and must have distinguished them from the spurious sacrifices of the Gentiles, by the end to which they referred—viz.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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