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나(칼빈)는 개같이 짖는 피기우스(Pighius)나 그를 답습하는 것을 상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들은 믿음을 파편으로 조각된 낸 다음에 한 조각에 제한해서 공격한다. 나는 (그들이 표현하는) 믿음의 일반적 대상(generale fidei obiectum)이 위협하든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Dei veritatem)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 노아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 그것을 두려워한 것을 사도는 믿음으로 말씀했다(히 11:7). 만일 임박한 형벌을 두려워해서 믿음이 나온 것이라면, 믿음을 정의할 때에 경고를 제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어김없는 참이다.
『기독교강요』최종판은 155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칼빈 신학의 탁월성은 1536년 초판에서 최종판까지 증보되면서 신학이 변하지 않고 증보된 것입니다. 피기우스(Albert Pighius, 1490-1542)는 칼빈(1509-1564)과 의지와 예정 부분에서 토론을 벌린 로마 카톨릭 진영의 논객입니다. 칼빈은 자유의지를 만인구원론의 이론적 근거로 간주했던 피기우스와 게오르기우스와 논쟁했습니다.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Defensio sanae et orthodoxae doctrinae servitute et liberatione humani arbitrii, adversus calumnias Alberti Pighii Campensis, 1543)은 루터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1525)과 동일 선상에 있습니다. 칼빈은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에서 루터를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도”라고 찬사했습니다. 어거스틴의『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과 동일한 신학 성향이 있습니다. 피기우스는 에라스무스와 동일한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로마 카톨릭의 사제입니다.
우리는 “임박한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을 회심준비론 체계로 평가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회심준비론의 문제점 중 하나는 노아 시대와 현재 상태를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박한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것이 절망으로 이끄는 것인가?라는 부분입니다. 임박한 형벌이 ‘절망’에 빠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끈다는 것이 칼빈의 제시입니다. 루터는 겸손으로 이끈다고 했습니다(HDD. 17). 칼빈은 믿음에 이르는 길을 획일적으로나 가시적으로 공표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단편적인 믿음 지식을 절대화시키는 것을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체계는 방대한 지식인데, 부분적인 한 진리를 절대화시킬 때에 하나님의 전체 진리 체계를 왜곡하는 악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매우 심각한 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은 마치 우리가 믿음이 하나님의 전체 말씀(omnes verbi Dei)인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부당하게 중상모략을 한다.
우리의 다음의 두 가지 요점을 유지한다. 첫째, 은혜의 약속이 도달하기까지는 믿음은 결코 설 수 없다. 둘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지 않으면, 믿음 그 자체로 우리와 하나님을 결코 화해시키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점은 다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
deinde non aliter nos per ipsam conciliari Deo, nisi quia nos Christo copulat. 칼빈은 믿음을 은혜의 약속 이후에 믿음이 도달할 것이며, 믿음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 자체로 있을 수 있다”는 사색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유기된 자들을, 그리고 신자를 불신자와 구별하는 믿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은 모두 정당하며, 그의 경고는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를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Nihil minus).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Dei misericordia)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어떤 확실한 믿음의 상태(Firmus ergo fidei status)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칼빈은 믿음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자비”에 놓았습니다. 이것은 루터의 견해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믿음의 확실성을 “십자가 구속의 공로”에 놓습니다.
Iam quorsum de fide disputamus? nonne ut teneamus viam salutis?번역. Battles는 Now, what is our purpose in discussing faith? Is it not that we may grasp the way of salvation? Beveridge는 Then what end have we in view in discoursing of faith? Is it not that we may understand the way of salv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문병호 번역에서는 이 문장 번역이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문장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 한 어떻게 구원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로 번역했습니다. 고영민은 “그러면 우리가 믿음에 대해 논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구원의 길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에 대해서 논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구원의 길(via salutis)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하는 믿음(fides salvifica, saving faith)이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정의할 때에 이 특별한 효과를 역설하며, 신자와 불신자를 분리하는 표지로서 각자의 특색을 말하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사악(邪惡)한 자들이 이 가르침을 헐뜯는데, 그렇게 되면 반드시 바울까지 비난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말씀(fidei sermonem)”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롬 10:8).
칼빈은 믿음,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된 믿음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제언합니다. 그리고 그 귀결은 “믿음의 말씀”으로 이끕니다. 로마서 10장의 말씀의 신비입니다. 5절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나오고, 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나오는데, 8절에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Inst 3.2.30.] Nec vero Pighii aut similium canum latratus moror, dum haisc restrictionem exagitant, quasi fidem lacerando frustum unum arripiat. Fateor, ut iam dixi, generale fidei obiectum (ut loquuntur) esse Dei veritatem, sive minetur, sive spem faciat gratiae. Quare apostolus (Hebr. l l , 7) fidei hoc adscribit, quod Noe mundi interitum, quum nondum videbatur, timuerit. Si timor imminentis poenae fidei fuit opus, non debent minae ab eius definitione excludi.
Hoc quidem verum est: sed nos immerito gravant calumniatores, ac si negaremus, fidem habere respectum ad omnes verbi Dei partes.
Tantum enim indicare haec duo volumus,( nunquam scilicet ipsam consistere, donec ad gratuitam promissionem pervenerit(도착하다, reach); deinde non aliter nos per ipsam conciliari Deo, nisi quia nos Christo copulat. Utrumque notatu dignum.
Fidem quaerimus quae Dei filios a reprobis discernat, et fideles ab incredulis. Si quis Deum et iuste praecipere quidquid praecipit et vere minari credat, an propterea fidelis vocabitur? Nihil minus. Firmus ergo fidei status(확실한 믿음의 상태) non erit, nisi in Dei misericordia sistatur. Iam quorsum de fide disputamus? nonne ut teneamus viam salutis? Quomodo autem fides salvifica, nisi quatenus nos in Christi corpus inserit? Nihil ergo absurdi si in definitione praecipuum eius effectum ita urgemus, et loco differentiae subiicimus generi notam illam quae fideles ab incredulis separat. Denique nihil habent in hac doctrina malevoli quod carpant, quin Paulum nobiscum involvant in eandem reprehensionem, qui evangelium proprie appellat fidei sermonem (Rom. 10, 8).
* 선행 은혜 (Prevenient grace, enabling grace) 선행은혜는 구원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sine qua non)이다. 어원적으로 '선행하는(Prevenient)'이라는 말은, '이전에(before)'를 의미하는 라틴어 prae 와 '오다 (to come)'를 의미하는 venire 에서 유래하였다"며 "선행은총은 ~ 보다 먼저 오는 은총, 혹은 ~ 이전에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30. I stay not to consider the rabid objections of Pighius, and others like-minded, who inveigh against this restriction, as rending faith, and laying hold of one of its fragments. I admit, as I have already said, that the general object of faith (as they express it) is the truth of God, whether he threatens or gives hope of his favor. Accordingly, the Apostle attributes it to faith in Noah, that he feared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when as yet it was not seen (Heb. 11:17). If fear of impending punishment was a work of faith, threatening ought not to be excluded in defining it.
This is indeed true;
but we are unjustly and calumniously(중상적으로) charged with denying that faith has respect to the whole word of God. We only mean to maintain these two points,—that faith is never decided until it attain to a free promise; and that the only way in which faith reconciles us to God is by uniting us with Christ. Both are deserving of notice. We are inquiring after a faith which separates the children of God from the reprobate, believers from unbelievers. Shall every man, then, who believes that God is just in what he commands, and true in what he threatens, be on that account classed with believers? Very far from it. Faith, then, has no firm footing until it stand in the mercy of God. Then what end have we in view in discoursing of faith? Is it not that we may understand the way of salvation? But how can faith be saving, unless in so far as it in grafts us into the body of Christ? There is no absurdity, therefore, when, in defining it, we thus press its special object, and, by way of distinction, add to the generic character the particular mark which distinguishes the believer from the unbeliever. In short, the malicious have nothing to carp at in this doctrine, unless they are to bring the same censure against the Apostle Paul, who specially designates the Gospel as “the word of faith,” (Rom.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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