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1권 11장의 제목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하는 불경건, 참 하나님에서 우상으로 전환시킨 구조에 대해서.”이다. 16세기 기독교는 참 믿음에서 변형된 거짓 믿음이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반종교개혁으로 더욱 체계화시킨 것(트렌트 회의, 1545-1563)이 현재의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제2바티칸 공회의(1962-1965)에서 카알 발트 신학을 채용한 카알 라어너에 의해서 전통적인 예수 믿음과 이해 방식에서 완전히 전환했다. 라어너는 정통 이해의 성육신 교리를 신화로 취급했다(FCF, 226). 신의 자기 통보를 성육신으로 이해했다(FCF, 189).
1. (Verum ut Scriptura) 성경은 인간의 우둔한 이해력 때문에 참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할 수 있도록 대조시켰다(accommodation). 철학자들의 자기 사색으로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1). 인간의 조급한 갈망으로 가시적인 형상을 만드는 것은 야만적인 어리석음으로 전 세계에 만연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킨다는 것이 원칙이다(출 20:4). 페르시아, 애굽의 미신은 일월성신을 신으로 만들었지만, 헬라인들은 인간 형체로 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더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미신적인 우상, 그림, 다른 표시는 절대 제외되었다.
2. 모세는 모압에서(신 4:15) 시내산에서 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니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만약 형상을 만들면 스스로 부패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 된다. 이사야서에서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도록 수 없이 반복하고 있다. 칼빈은 유대인들이 미신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우상을 금한 것, 즉 유대인들에 제한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상숭배 금지는 인류 기독인에게 주는 보편 명령이다. 자연인들도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면 결국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신적 임재를 보여주셨다. 임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구름과 연기와 함께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해서 확실한 표적을 주셨다. 가장 친밀했던 모세도 얼굴이 아닌 옷자락만을 보았다. 이것은 오실 구주 예수의 계시를 믿는 서곡이었는데(in Christo revelationis), 유대인들은 거기에서 매여 성육신(하나님의 신격의 성육신)을 철저하게 거부했다(deitatis symbolum erigerent sub humana figura). 속죄소에 하나님께서 임재를 백성에게 약속하셔서 묵상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속죄소는 그룹의 날개가 덮고 다시 휘장으로 덮어 가장 깊은 곳에 숨겼다. 그 형상을 드러내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을 육체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 지식을 전한 적이 없고 이교 저술가들은 교황주의자들보다 더 능숙했다. 유베날(Juvernal, 58-140)은 형상을 사악하다고 정죄했다. 그는 교황주의자들보다 더 진실한 것이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우상숭배를 보면서 본성의 우상숭배성향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잠이 들어 유대인들과 교황주의자들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