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의 성찰과 전망
고경태 박사(총신대 대학원 2007년 졸업)
‘개혁(改革)’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용어이다. 개혁을 위해서 몸부림하고 있다. 개혁은 미래지향적이고 현세의 부정을 고치고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개혁’은 미래지향적인 신학이 아니라 과거지향적인 신학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인 개혁과는 구별할 수 있다.
개혁신학은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당시 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을 중심으로 로마 교회를 대항하는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 이전에 루터(M, Luther)는 독일을 중심으로 로마 교회를 대항하여 새로운 교회를 구축하였다. 루터 신학은 독일 교회 신학을 주도하였지만, 칼빈 신학은 국가 교회를 지향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부분에만 전력했다. 제네바의 칼빈의 신학은 프랑스로 확장되었고 벨기에와 독일일부로 확장되었다. 칼빈의 신학이 유럽에 확산되기 전에 이미 루터 신학이 알려졌었다. 네델란드에도 루터 신학에서 칼빈 신학으로 전환되었다. 네델란드는 스페인의 공국에서 독립전쟁을 할 때, 칼빈 신학을 근거로 교육과 사회 제도를 적용시키려 했다. 네델란드에 세워진 칼빈 신학을 ‘개혁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장로교회’이다. 장로교회는 영국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세워진 칼빈의 후예이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죤 낙스(John Knox)는 칼빈에게 수학을 하여 칼빈 신학을 교회의 정치 제도로 세웠던 것이다. 장로교회에서 개혁신학을 사모하는 것은 장로교의 신학이 칼빈 신학이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네델란드 돌트(Dolt Synod, 1617-1619)에서 확정된 돌트 신경(Canon of Dolt)이 아니라 칼빈의 전체 신학이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를 깨고 체계적인 신학의 체계와 교회의 체계를 구축한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가슴 벅찬 일이다.
1. 돌트 회의 결정에 대한 역사적 소고
필자는 네델란드 돌트 회의와 325년 니케야 회의를 비교하고 싶다. 기독교 역사에서 치열한 신학 논쟁 끝에 결정을 한 대표적인 회의이면서, 또 소수가 다수의 의견을 굴복시킨 것으로 교회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니케야 회의를 주도했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와 당대의 황제의 비서관이었던 유세비우를 상대로 ‘동일본체’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를 확정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야 회의가 확정되고 유배를 떠난 승리자이다. 과연 승리자가 유배를 당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야 회의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지만 수 많은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그리스도의 지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정통신학이 381년이 다시 확립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방식은 변함없이 ‘동일본체’로 확정되었다.
돌트 회의는 개혁파의 신학에 대한 항론파의 항의 신학 논의가 개진되었다. 항론파는 알미니우스를 중심으로 개진되었다. 알미니우스의 후원자들은 네델란드의 지식인들과 통치 계급이었다. 네델란드의 유력자들이 항론파의 편에 섰지만, 돌트 회의에서 항론파의 의견이 기각되고 항론파에 대한 반론으로 돌트 신경이 확정되어 칼빈 신학의 예정론이 드러나게 되었다. 돌트 신경의 확정으로 칼빈 신학이 개혁신학으로 확정되어 개혁교회의 정통신학이 되었다. 정통교회의 신학을 니케야 회의에서 확정했고, 개혁교회의 신학을 돌트회의에서 확정했다. 이 두 회의의 공통점은 소수가 다수를 이겨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준 것이다. 필자는 정통신학은 니케야-콘스탄니폴리스 신경에서 확정되었고, 개혁신학은 돌트 신경에서 확정되었다고 본다.
2. 20세기 칼빈 신학의 부흥자: 칼 발트(Karl Barth)
17세기 개혁 신학은 침묵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은 산업혁명과 계몽철학(칸트, E. Kant, 1724-1804)이 풍미했다. 독일교회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사조와 교회의 도전은 슐라이에르막허(F. Schleiermacher, 1768-1834)-자유주의 신학의 교부-가 수용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유럽 대륙에서 약 100년 동안 풍미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풍미한 기간 유럽 대륙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두 세계 대전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교회의 주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 또한 대전환을 필요로 하였다. 이 때에 칼 발트의 신학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유럽의 교회는 발트의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세계대전이 신학의 대 전환을 가져왔다. 동시대의 신학자인 불트만(R. Bultmann)과 틸리히(P. Tillich)는 20세기 신학을 선도하는 대형신학자가 되었다. 세 사람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실존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전환되었다. 불트만과 틸리히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일치하지만, 발트에 대한 평가는 양분된다.
발트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먼저 발트의 신학이 시대에 따라서 변화했는가? 아니면 변화되지 않았는가?이다. 발트의 신학이 변화했다는 발트의 제자들은 칼빈의 신학을 더욱 발전시킨 개혁 신학자로 평가한다. 반면 발트의 신학이 변화가 없다는 발트의 비평자들은 발트가 초지일관 종교사회주의에 머물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한국에 주로 소개된 신학자들은 발트의 신학이 시대를 따라 변화했다는 이해를 가져왔다. 숭실대의 김영한(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장신대의 김명용 교수는 발트 사상의 시대적 변화를 연구하는 논문으로(튀빙겐 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승훈은 발트의 전체 신학을 연속성에서 보려고 시도하였다. 저자는 발트 신학의 변화, 즉 불연속성으로 보는 견지에 대해서 비판적 논의를 간략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발트의 신학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이유. 발트의 로마서 주석(I)과 로마서 주석(II)의 방향은 확연히 다르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주석(I)이 범신론적 경향이 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범신론적 경향이 연속성을 가진다면 발트의 신학 전체는 절대로 개혁 신학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발트의 신학을 꼭 불연속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신학의 불연속성은 신학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 발트의 발표인 The Humanity of God에서는 로마서 주석(I)권으로 회귀하는 경향까지 보여주었다.
칼 발트의 신학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발트가 칼빈 신학을 발전시킨 진정한 후계자, 혹은 더욱 탁월한 신학자라고 주장한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T.F. Torrance 등을 중심으로 발트와 칼빈을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Alister McGrath도 칼빈과 발트를 연계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발트의 제자들이 칼빈의 명성을 이 시대에 다시 부각시키는 일은 하였다. 이러한 것은 발트의 서재에 모차르트와 칼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것에 더욱 설득력을 제시하였다. 발트와 칼빈의 연계시키려는 것은 발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을 어떻게 보일것인가에 대한 자구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발트가 스위스 개혁파 목사의 아들로서 자연스럽게 칼빈과 연결시킴으로 개혁주의 진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발트의 신학 내용은 칼빈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신학 전개를 한다. 그것은 삼위일체 이해 방식이나 그리스도 이해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전혀 신학적으로 신앙적을 연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트의 영향력은 칼빈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큰 주제로 부각시킨 역할은 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강요나 그의 주석의 내용에 있지 않고 다양한 추측과 부수적 상황에 메이게 하여 칼빈의 신학 본문에 대해서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칼빈 신학을 연구하는 서적을 보면 칼빈의 글은 참조적이고 다양한 스토리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칼빈의 상을 만들려고만 한다. 이것이 발트가 주창한 칼빈 신학의 부흥이다.
3. 개혁 신학의 방향을 위한 제언
자유주의 신학, 실존주의 신학이 준 피해는 성경 본문에 매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성경 본문이 권위를 상실함으로 신학자들이 성경 본문이 삽입되었다는 주장은 서슴치 않고 외친다. 그래도 어느 누구하나 거기에 반동하지 않는다. 한국 장로교는 50인의 신앙동지회가 모세오경의 저작권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성경을 생명처럼 여겼다. 현대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신학계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동조하는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
발트의 신학의 부흥도 칼빈 신학에 이러한 피해를 주었다. 즉 칼빈이 저술한 기본인 『기독교강요』를 읽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칼빈 신학을 연구해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학계에 아무리 많은 칼빈의 이름이 등장해도 항상 어떤 설만이 존재하게 되며, 모든 의견들은 수렴하여 또 다른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 칼빈의 저술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첫째, 개혁 신학의 부흥을 위해서는 고대 교회의 신학을 연마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계보편종교로서 한 종교이다. 동방교회나 서방교회가 공히 인준하는 고대교회 신학을 연마하지 않는다면 보편교회의 신학을 이룰 수 없고, 편협한 신학을 하게 된다.
둘째, 개혁 신학의 부흥을 위해서는 칼빈 신학의 본문을 직접 읽어 이해하여 신학 지식을 수립해야 한다. 발트의 교회교의학은 이제 번역이 되어지고 있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주석은 이미 번역되어 있다. 번역이 미비하다면 영어로 번역된 서적, 그리고 원어로 된 서적들을 직접 탐독해야만 칼빈 신학을 이해할 수 있다. 칼빈 신학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개혁 신학이 부흥하는 것이다.
셋째, 저자는 발트의 신학의 연마가 중요한 신학 훈련으로 생각된다. 발트가 교의신학자이기 때문에 타 전공에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발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신학분야는 없다. 저자는 신약의 도상(途上)신학, 옷에 대한 비유 등은 성경에 나온 것으로 보지만, 발트에게서 시작된 개념으로 평가한다. 발트가 개혁신학도에게 주는 유익은 다양한 신학 정보를 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총망라한 신학정보는 기독교를 바로 평가할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있다.
4. 개혁 신학의 전망
개혁 신학의 미래는 개혁 신학도에게 달려있다. 개혁 신학도가 개혁 신학에 입각된 연구와 논문을 많이 발간함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개혁 신학이 완성된 신학으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며, 신학을 답습 반복하기만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은 항상 발전하여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내용을 창출하였다. 개혁 신학에 매진할 때에 이 시대의 교회가 요구하는 신학을 선도하게 될 것이다.
신학을 답습하는 것은 중요한 신학 훈련이다. 신학의 답습을 통해서 이 시대에 부합된 정통 신학의 내용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정통신학과 상관없는 신학내용이 새롭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유입된다면 참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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