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요약] J. G. Machen, [기독교와 자유주의] - 6 장 구 원

형람서원 2008. 5. 1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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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 구 원

 

구원의 도리에 관한 상위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구원의 근거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의 구주이다. 이것은 예수의 생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구속 사역에 근거해서 구주이다(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평이한 교리).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마음은 십자가 밑에 있지 않고, 단지 자기 희생의 모범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는 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중략)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우리 모든 사실을 위하여 버림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메이첸은 이러한 의견을 고상한 예수관과 결합된 오류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무서운 죄의 실재를 무시하고 단순한 인간의지의 설득을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흠도 티도 없는 무죄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세우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위대한 진리 속에 병합되어 버린다. 이 중심적 진리가 없으면 다른 모든 진리는 그 진의를 상실한다.” 자기 희생의 모범도 죄책과 죄의 속박에 있는 자에게는 무용 지물이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한다고 하면 절망에 빠지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라면 희생의 근본적인 이유가 없는 단순한 과시가 없다.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를 향하여 현대 자유주의자는 증오와 조소를 마음껏 토로하는데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메이첸이 하는 자유주의 구원관에 대한 비판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기독교의 구원방법은 역사에 의존한다는 이유에서 비평을 받는다.

 

기독교는 발생된 사건에 근거하며, 성도들의 현재적 체험이 현실 세계에서 출현과 결합된 것이다. 역사와 관계없는 복음은 용어에서 모순이 된다. 복음은 옛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고 새로운 사건으로 권면이 아니고 복음이다. 이 발생된 사건은 성도들의 삶의 현자에서 직접 체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설화(narrative)는 역사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시험을 통해서 진리임을 발견하며, 체험에서 증거를 확신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신학자들의 단순한 논의가 아닌, 그리스도인이 영혼 속 깊이 수용되어 삶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진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적 구원의 교리는 협애하다는 이유에서 비난을 받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예수의 이름에만 결부된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유효적인 부르심이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혹 다른 방법의 구원의 수단을 제기한다. 복음은 현저하게 배타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자유주의에서는 회의 혹은 거부된다. 초대교회가 요구한 배타적 헌신은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까지 포기하도록 할 정도로 과격했다. 세상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기독교는 전혀 유익이 없다. 십자가의 거리낌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영광과 능력도 상실된다. 비록 기독교가 협소하다는 비판을 받는다할지라도, 교회는 성령의 약속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한 방법을 충분히 갖고 있다.

자유주의는 예수 한 사람의 죽음이 죄를 대신 받는 것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예수의 속죄의 죽음으로 구원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전쟁에서 한 사람이 여럿을 위한 희생에서 어렴풋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자기 희생은 죄에 대한 형벌을 면할 수 있는데,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순결한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속죄 교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기초한다.

타이나닉호의 침몰에서 연주된 ‘십자가’에 대한 찬송은 죽음에 임박한 성도들에게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다. 십자가는 자신의 십자가와 갈보리의 십자가가 동시에 울려진다. 즉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반대한다. 자유주의는 예수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코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체험적으로 확신한다. 자유주의가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의 체험은 없다. 자유주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과거의 죄에 대한 묵과는 유쾌한 일이지만, 죄의 방치는 세상에서 가장 무자비한 일이다.

자유주의의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죄에 대한 망각을 주장한다. 그러한 회개는 죄를 도말하지 못한다. 성도는 죄의 결과를 소멸하기 원하고 단순히 죄를 망각하려 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서 공포를 느낀다. 예수의 교훈 또한 죄에 대한 분노가 제시되기에 거부된다. 선생의 모범과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된단 말인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은 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反)한 자유주의는 종교의 기쁨을 추구한다. 사랑의 하나님이란 메시지에서 기쁨을 얻는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한 쪽으로만은 결코 완전한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참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무서운 심판은 성도의 진정한 기쁨과 위로가 된다.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죄는 신기한 은혜로 인해서 제거되고 하나님과 교통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 사람은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좌에 당당히 다갈 담력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과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구속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기독교의 객관적인 기초와 기독교적 체험인 초자연주의를 포함한다.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적용된 일국면의 표현이다(갈 2:20). 즉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누린다. 새 새명에 대한 체험은 거룩한 일로서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영혼의 고뇌를 통과하면서, 혹은 가정의 교육을 통해서 평온하게 발생할 수 있다.

어떠하든지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인간의 행위는 배제된다. 그러나 또한 믿음에 대한 지적 동의도 배제하지 않는다.

루터와 칼빈이 주석한 갈라디아서신은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으로 주해되는데 반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반개혁적 주석으로 복귀하였다. 바울은 반복음적인 바리새주의를 책망한 것이 갈라디아서의 내용인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 시대에 예루살렘 교회와의 갈등으로 제시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야고보서는 태만한 신앙에 대한 책망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기독교의 사랑이 단순히 정서를 넘어선 실천적이며 포괄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과거의 율법 준수와는 다른 것이다. 율법의 총체는 사랑이다. 즉 기독교는 사랑을 통해서 역사한다. 의견상의 모순은 사람을 진정한 신앙의 개념으로 인도할 따름이다. 참 신앙에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이다.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들어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힘은 성령의 능력이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내세 신앙]을 일종의 이기주의 치부하여 거부한다. 천국이 단순한 향락으로 비판하지만, 천국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인이 비록 현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거룩한 불만이다. 죄의 세력으로 인하여 구주와 멀리되는 상황에서 완전히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즉 기독교의 생활은 투쟁하면서도 동시에 소망의 생활이다.

현대 자유주의 교회의 프로그램은 천국이 점유하는 것은 없고 이 현세적인 사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비록 자유주의가 영혼 불멸을 강조하지만, 부활 신앙이 없음으로 포기된 것이다. 실제로 자유주의 설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기독교를 필요로 하는 국가 혹은 사회에서는 먼저 기독교가 구현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만약 통일국가 실현을 위한 기독교의 도입은 기독교가 되지 못한다.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되지 못한다. 국가 종교를 세워 국민을 통제하려는 것은 참된 종교의 본질을 부패시킨다. [사회적 복음] 역사적 기독교는 사회의 주장에 반하여 개인적 영혼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을 위하여 언제나 부동하는 인간적 견해의 모든 조류에서의 피난처를 제공하며 사람이 홀로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 갈 수 잇는 은밀한 묵상의 장소를 비치한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세상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한다.

기독교는 개인적이지만 또한 사회적 요구에 충분히 대비한다. 첫째, 개개인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한다는 것까지도 사실에 있어서는 개인적이 아니고 사회적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자유주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기독교는 네로의 학정에서도 네로를 하나님이 정하신 정당한 권세자로 인정하며, 통치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내세 지향적인 삶이 현세의 싸움을 철퇴하고 침거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세상의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유주의는 여러 제도에 대해서 낙관적이지만, 기독교는 제도에 대해서 비관적이다. 자유주의는 제도를 바꾸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 본성을 바꾸려고 한다. 선교에서 자유주의는 기독교 문화를 보급하려하지만, 기독교는 이교 신앙을 포기하고 영혼 구원의 복음인 예수의 구속 사역을 전파한다. 아무리 자유주의 선교사들이 많이 파송된다할지라도 영혼 구령이 없는 기독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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