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학 회심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보고
(고경태)
위대한 신앙인들은 대부분 격정의 회심기를 갖고 있습니다. 회심의 원인에 대한 고찰은 결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회심한 자체로는 정당성을 평가할 수 없고, 회심한 후에 나타난 신앙의 열매의 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회심이 나타난 인물들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칼 발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회심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 아티클에서는 네 사람을 간략하게 써보려 합니다. 특히 이 글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구약의 그리스도』(이레서원)의 책을 독서하면서 얻은 착상입니다.
1. 어거스틴(Augustine)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분기점에 있으며,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에 있는 교회사로나 일반역사에서 공통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저서『고백록』에서 잘 나타나며, 그 감격또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심취하였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인도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알레고리로 성경을 해석하였으며, 당시의 최고의 설교자로 영향을 끼치된 인물이었습니다. (칼빈은 당시에 로마 주교보다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더욱 위대했다고 제시하면서, 로마 주교의 중심설에 대한 거부를 주장합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로 인하여 회심한 어거스틴은 오히려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을 점점 떠나 성경 해석에서 구속사의 역할에 더 많은 강조를 주었습니다.(『구약의 그리스도』, 164. Boner, “Augustine”, 552에서 인용)
어거스틴이 회심한 것은 감동 있는 설교를 경청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설교 후에 자기의 새로운 성경의 세계인 그리스도께로 인도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니교의 주장인 구약의 경시를 바꾸어 구약의 신적 권위를 변호하는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 해석을 하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의 결과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2. 루터(M. Luther)
루터의 회심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 회심의 이유에 대해서『구약의 그리스도』, p.176에서는 A. S. Wood를 인용하여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함"(A. S. Wood, Luther's Principle, 7.)으로 제시합니다. 루터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1510년경 로마 교황청의 추악한 상업주의에 대한 분노가 아닌, 1514년경 어거스틴 수도원의 성채 방 한 칸에서 읽고 있던 성경에서 궁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회심으로 루터는 sola gratia, sola fide를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실체를 제시했습니다. 루터가 주창한 성경 해석 방법은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입니다. 종교개혁의 해석 원리가 sola Scriptura가 된 명제입니다.
루터는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제시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을 웅변합니다. 당시의 비참한 로마 교황청의 문제에 대한 분노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로마 교황청에 대한 거부가 교회를 교회다운 모습으로 정초한 개혁의 시작입니다. 즉 개혁은 윤리의 문제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선입니다.
3. 칼빈(John Calvin)
칼빈의 회심기는 베일에 가려있습니다. 칼빈은 회심기에 대한 기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적은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의 진보입니다. 회심에 집착하는 것은 엉뚱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철저한 Coram Deo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진하는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의 열매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의 일치를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은 루터보다 칼빈이 좀더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복음과 율법을 분리시키며, 성경에서도 에스더, 야고보서 등에 대해서는 정경성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과 율법의 공통성, 구약과 신약의 공통성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통찰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의 일치를 강조함으로 지나칠 정도로 개진하여 차이점이 약화되기도 했습니다.
4. 발트(Karl Barth, 1886-1968)
발트의 회심은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사회문제들과 제1차 세계대전에 직면해 1914년 8월 93명의 독일지성인이 전쟁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스승들이 대부분 등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트는 스승들이 가르쳐온 자유주의 신학에서 회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발트의 회심은 어디로 회심이 되었는가?
발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경종을 주었으며,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을 강조했지만, 발트는 자신의 신학의 방향을 규정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신학이 자유주의보다 개혁주의에 가깝다고는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유주의도 아닙니다. 그래서 발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Neo-Orthodox)라고 합니다. 발트의 회심의 결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발트의 회심의 이유가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에 대한 반감으로는 개혁신학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개혁신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발트가 만난 것은 자기의 스승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이며,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Coram Deo를 주장합니다. 발트의 결과는 신정통주의입니다. 윤리가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회심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륜에서 발생합니다.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한국의 김세윤 교수는 한국교회의 기복종교, 부패등을 공격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윤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계시에서 끝납니다. 윤리에서 계시로 끝나는 것은 신학이나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회심의 열매는 회심의 작동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충만하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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