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화와 인간적인 평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전 세계가 그를 대표적인 평화의 인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상처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식장으로 입장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이 녹아 내렸다.
실로, 그의 삶은 그리 평화롭지 못하였다.
다섯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6년의 옥고를 치르고
40년에 걸친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그런데 왜 그가 평화의 인물이란 말인가?
과거에 그는 군사 통치자들로부터
국가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인물로 정죄 되었다.
경제적인 안정 속에서 평화롭게 발전하는 조국을 훼방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불화의 인물로 낙인 찍혔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른 인물들도 그러하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백인들의 평화로운 통치에 도전하고
순종적인 흑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평화의 파괴자로 정죄 되어 27년의 인생을 감옥 속에서 살았다.
마르틴 루터 킹도 그리하였고,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되어 연금 당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노벨평화상을 받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 평화를 거부하고
참 평화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거짓 평화란 현 상태에 대한 아무런 도전 없이
평정이 유지되지만 불의와 거짓이 관용되는
무사안일의 상태로서, 기만적이고 외식적 평화이다.
이것은 정의와 진리, 자유와 평등의 참된 평화가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를 말하며 거짓 평화를 비호한다.
따라서, 교회의 외형적 평화를 추호라도 건드리면
(비성경적인 행태나 불법, 독재등 문제점을 지적하면)
교회에 불화를 조장하였다고 정죄하고 저주(이단시)한다.
마르틴 루터나 존 칼빈이
바로 그런 이유로 고난을 당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난을 당한다.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는 참 평화를 위해 오셨으나,
헤롯은 자기의 평화로운 왕국에 위협이 된다 하여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학살하였다.
그는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하였으나,
당시 유대의 정치와 종교적 평화를
위협한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참 평화를 추구하는 자는
불화를 조장하는 인물로 정죄 되어 고난을 당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왔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셨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라,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라
혼자 조용히 기도나 하라..는 식의 구호는 늑대나 삯꾼,
거짓 선지자들의 표어였슴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30:9~10. 렘8:10~12. 미가 3:5~]
참된 평화는 불화의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고난이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운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만의 파워게임적 평화를 부정하고
세계의 창조자이며 통치자인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만
참된 평화가 온다고 가르친다.
김 대통령은 모든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참 평화의 길을 따르게 된 동기와 인내의 비결이
하나님에 대한 임마누엘의 신앙에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였다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드렸다.
거짓이 활개치는 이 시대,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정석 교수의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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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석 교수님의 칼럼에 대한 유감
(1)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분들이 세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지만, 그것이 참된 평화의 모범이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2)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앙고백, 마틴 루터 킹 목사, 아웅산 수지, 만델라 등은 신앙추구가 아닌 정치 지도자들인데, 루터 킹 목사 또한 흑인해방운동인데, 종교적 평화와 비교하는 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3)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인 루터와 칼빈을 비교하는 것은 다른 범주를 통합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정치의 목적은 자기가 정한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와, 흑인의 해방, 민족 해방 등의 정치 운동은 정치 운동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것을 신앙과 연결시키는 것은 억측이 강합니다. 정치는 헤게모니 자체입니다.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투쟁에서 고난당함을 신앙을 위한 투쟁과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비록 신앙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지만, 문제해결은 여전히 정치문제 해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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