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스크랩] 칼빈주의의 역사적 이해 - 주도홍

형람서원 2006. 8. 8.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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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의 역사적 이해

주도홍 譯著. 본 역사적 칼빈연구는 Karl Heussi, Kom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Tübingen 1981, 316-319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신학대학원에서의 강의를 위해 중간 중간의 설명 내지는 각주들의 첨가와 함께 서론과 결론 부분이 더해졌다.

1. 역사적 의의

“거대한 그 손에 사로잡힌 하나의 뜨거운 심장”(J.I.Packer)으로서 묘사되는 칼빈은 종교개혁의 막동이 세대에 속한다. 그는 루터보다 대략 한 세대 후에 태어나 활동했으며, 많은 점에서 루터에게 힘입은 바 크다. 또한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훌드리히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그리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에게서도 영향을 입었다. 칼빈은 루터와 비교할 때 종교적 깊이에 있어서 모든 점에서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비상함 때문에 전개된 강한 의지를 통하여 더욱 탁월하기 까지 하다. 그는 마지막 결론이 날 때까지 신학적 문제들을 예리한 지성과 담대함으로 추적하였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사상을 따라 형성하려 하였다. 그 결과 칼빈은 비로소 개신교(Protestantismus)의 정체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신교란 당시 카톨릭교회에 대조되는 모습으로서 가장 선명하게 제시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칼빈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적 신학과 신앙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말이다.
칼빈은 또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즉 칼빈은 자신의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마무리 지었다. 이 기간에 카톨릭 교회 역시 새롭게 힘을 모아, 개신교를 무력화하려고 무장을 하였다(Counterreformation). 즉, 카톨릭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새로운 힘을 결집하였다. 종교개혁 다음 세대에 해당되는 이 기간은 개신교의 칼빈과 카톨릭의 로욜라(Loyola)에 의해서 주도된 때였다.

2. 신학, 경건성과 예배 의식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중 “가장 거대한 조직신학자”(der gröβte Dogmatiker unter der Reformatoren)로서 평가를 받는다. 그의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야 말로 종교개혁이 이룩한 가장 완벽한 조직신학 저술이다. 이 저술에서 특징적인 면은 예정론의 강조와 성찬에 대한 이해이다. 그의 신학체계에 있어서 탁월한 사상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 곧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착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칼빈의 총체적 창조성이 독특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정론 교리는 처음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에 의해서 대변되었다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결국 멜랑히톤은 나중에 반대 입장에 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칼빈은 줄기차게 예정론을 내 세웠고 이중예정론(gemina predestinatio)과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rismus)까지도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 다른 개념으로는 아담의 타락 후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예정이 이루어졌다는 타락 후 예정론(Infralap- sarismus)이 있다.
이중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로 영원 전부터 은혜로 선택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저주에로 예정(유기)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사단의 타락을 하나님의 뜻에 의하였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가파른 예정론은 칼빈의 신(神)이해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 존재의 모든 목적을 칼빈은 조금도 거침없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서 찾았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저주받은 자들의 지옥행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영광(Ehre,명예)을 나타내기 위해서 선과 더불어 악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의 경건이 이해될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선택받은 자들로서 인식한다. 하나님 손 안의 연장(鍊匠)으로서, 그 연장은 이 세상 가운데서 이미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하나의 거대한 활동을 세상을 향해서 추진하게 된다. 하나의 강한 영웅주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거대하고 강력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러한 칼빈주의의 경건성은 일방적이며, 엄하고 보다 강하다 하겠다. 특히 루터주의자들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관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인 경외가 무엇보다 강조된다. 여기서 또한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강한 활용을 특징적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성찬론에 있어서 칼빈은 루터(Luther)와 쯔빙글리의(Zwingli) 중간 입장을 취하였지만, 엄격하게 볼 때 쯔빙글리주의자들 보다는 루터의 입장에 더 가까이 있다. 성찬에 육체적 그리스도의 임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estꡓ〓ꡒsignificantꡓ). 이 점은 칼빈의 입장이 루터 그리고 카톨릭의 이해와는 구분된다. 성찬은 교회의 단지 상징적, 비유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Zwingli와는 다르다), 신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사)로서 성령을 통하여 천국에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시각적으로 ꡒ영적ꡓ즐김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된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ꡒ영적ꡓ일체감은 성찬의 물질적 즐김과는 상관이 없다. 영적 하나됨은 성례식 밖에서도 역시 구체화된다. 루터의 성례론이 키릴적(Cyrillisch)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칼빈의 기독론적 성찬론은 중세 안디옥 학파의 이해에 가까이 있다.

예배 의식에 있어 칼빈도 쯔빙글리처럼 로마카톨릭의 미사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미사는ꡒ우상숭배ꡓ로 평가되었다. 1542년 제네바 예배장전은 슈트라쓰부르크의 외국인 교회의 규례를 모방하였다(§82g). 참고로, 칼빈도 부처의 청빙으로 슈트라쓰부르그에서 1538-41년 프랑스 이민자 교회를 목회하였다. 여기서 칼빈은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특히 멜랑히톤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 예배규례는 설교, 기도, 그리고 구약의 시편찬송만이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시편찬송은 클레멘 마로(Clement Marot)에 의해 1542년 이루어졌다. ꡒ청소된ꡓ 미사에로 루터가 복음적 설교를 도입하고, 성찬예식에서 모든 예배의 절정을 이루게 하였던 반면, 칼빈은 설교예배와 성례예배를 분리하였다.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가운데 성례를 일년에 4회 정도 실시하였다. 교회적 공휴일은 세 종류의 절기들과 주일을 제외하고는 제거해 버렸다. 오르겐, 성화, 성상, 십자가, 초, 제단들은 교회에서 제거되었는데, 오르겔은 판매되었다.. 참고로 쮜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오르겔을 부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어에 걸맞게 예배의식을 하나님에게로부터 요구된 것들만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후에 안식일적 주일성수와 연관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제시된 그러한 주일성수가 어김없이 강조되었다.

3. 교회이해․교회와 국가의 관계

루터교와 칼빈주의가 특히 의미롭게 구별되는 바가 있다면 교회 조직의 영역에 있어서 직분론의 이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입장을 기초로 하여 더욱 견고히 자신의 이해를 제시하였다. 칼빈의 교회개념은 대부분 루터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요한 몇가지 점은 루터를 뛰어 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교회법은 교회를 위해서 원리적이다. 루터교가 모든 직분을 동일한 위치로 수평적으로 이해하는 반면, 칼빈주의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그 헌법은 그리스도의 선택된 성도들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ꡒ보이는 교회ꡓ를 규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성화에 도움을 주고,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의 법에 순복케 함에 목적이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엄한 도덕적 훈육이 교리의 강조와 더불어 요구되며, 양심의 자유는 움추려든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기쁨을 향한 입장은 보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루터에게 있어서 보다는, 근원적으로 다르게 조절되었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칼빈에 의하면 마땅히 ꡒ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처럼 확립되어야 한다ꡓ. 그럼에도 여기서 참고로 말하면 당시 제네바의 엄숙주의적 모습은 사실 칼빈이 있기 이전에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이전부터 시(市)정부에 의해서 춤과 오락등이 이미 금해졌었다.

이제 칼빈이 1541년 세운 교회의 직분을 이해할 것이다.

(1) 영적 4직분

ⓐ 목사들(ministres)은 설교와 목양을 위해서 요청되는 직분이다.
ⓑ 박사들(docteurs)은 교육을 담당하는 직분으로서 신학생과 목회자 교육을 위해서 요구되는 직분이다.
ⓒ 장로들(anciens)은 교회의 치리와 훈육을 위해서 필요한 직분이다.
ⓓ 집사들(diacres)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요구되며 봉사의 직분이다.

(2)두 가지 교회 회의

ⓐ 명예 회의(Vénérable compagnie)는 목사들과 교수들로 이루어지는데, 교수직의 감독과 성직자의 청빙문제들을 다룬다.
ⓑ 당회(Consistoire)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며, 교회의 자치 운영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를 위해서 특징적으로 교회의 치리(Kirchenzucht)를 행한다. 교회의 모든 삶을 감독한다. 당회원은 모든 성도의 가정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도덕적 윤리적 잘못, 바른 신앙의 사수, 세상법의 어김 등을 영적 책벌을 실시하여 꾸짖는 일을 감당한다. 이러한 경우에 책망, 교회 앞에서의 공개적 참회, 공공연한 사죄, 출교등이 강도높게 행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회적 책벌들이 효과가 없을 때 동시에 국가 공의회원인 장로들은 관청에 세상적 벌을 신청하게 된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행했던 벌의 집행의 강도는 당시와 비교할 때 특별히 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제네바에서 시행되었던 법집행은 카로리나 왕가의 1532년 “황제 칼 5세의 저주스러운 법규례”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스위스를 제외한 지역의 개혁파 교회법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칼빈을 뛰어넘고 있다.

1) 프랑스 위그노 교회로부터 개혁파 교회의 총회법과 교회 자치제를 실시하였다. 예를 들어 국가적 총회 또는 지역 노회들을 의미한다. 니더라인 지역과 네덜란드 지역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개혁파 교회는 그 헌법의 보완을 이루었다. 이러한 모습은 스코틀랜드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영미의 장로교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다.

2) 불란서 또는 초기 스코틀랜드에서 처럼 카톨릭 국가에 살던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국가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형성한 결과, 다른 신앙의 정권을 열정적 투쟁과 더불어 신앙의 정권으로 바꾸어야 함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했다. 예로 기독교 백성의 독자성과 저항권을, 그리고 폭군을 살해할 수 있는 귀족과 대표회의의 권리들을 언급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상들은 위그노의 봉기와 스코트랜드에서의 신앙고백 싸움들을 유발시켰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중세 스콜라주의에서 형성되었다.
국가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칼빈적 사고들의 다른 영향들은 무엇보다도 불란서의 위그노들에게서 나타나는데, 그들이 국가를 상대로 할 수 없을 땐, 국가와의 관계를 끊고 국가들 속의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칼빈적 국가 이해의 결정은 가장 먼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다.

4. 문화 생활에 대한 영향

칼빈은 추종자들의 모든 문화 생활을 독특하게 자신의 종교적 사상과 더불어 형성하였다. 경제생활을 향한 칼빈주의적 입장은, 루터교가 앞서서 전반적으로 농촌영역으로 퍼져 나간 것과는 다르게, 상업과 공업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네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칼빈주의는 선거에 그리고 직업의 전환에 보다 큰 자유가 주어졌다. 상업을 하는 기업가들이 칼빈주의자들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하나의 진전은 법학도 칼빈이 성경적 규례와는 다르게 이자와 고리대금을 분명하게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순수한 금융업, 특히 본업적인 이자취득에 칼빈도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윤리적 언급과 법적 규례가 이자율을 조절할 것을 말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루터처럼(1525), 칼빈도 최고 5%까지의 이자율을 허용하였다.. 보라. Hans Helmut Eßer, ꡒDie Aktualität der Sozialethik Calvinsꡓ, in : 한국 개혁신학회 제 5회 (국제) 정기학술심포지움(1998,9.5), 26-48. 특히 이 가운데서 참고로 가져오려고 하는 부분은 칼빈에게 있어서 경제윤리(Calvins Wirtschaftsethik)이다(45쪽 이하). 칼빈은 정확히 5-6.6%까지의 이자를 허용하였으며, 다음 8가지 지침을 제시하였다. “1) 이자를 목적으로 돈을 꾸워주는 일을 본업으로 함은 바람직하지 않다(soll nicht). 2) 가난한 자와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자에게서는 이자를 받을 수 없다(darf kein Zins) 3) 이자를 취하는 자본투자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 이상으로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된다. 4) 이자에 대한 계약은 서로간에 오직 자의적으로 체결되어야 하고, 황금률(마7:12) 정신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5) 채무자는 빌린 돈을 가지고 채권자가 취하는 이자 보다 더 많은 이윤을 꼭 남길 수 있어야 한다. 6) 이자율에 관한 규범은 쉽게 일반적 상식에 의거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준하여야만 한다(muß). 7) 금리업은 단지 사사로이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모든 다른 경제생활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8) 현용되는 이자를 위한 규범들은 헌법에 타당한지를 수시로 확인해 보야야 한다(müssen). (그럼에도 금리업에게 면죄부를 주려함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7세기 이후 칼빈주의는 이점에 있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칼빈주의의 청교도주의적 한 분파는 나중에, 특히 북미에서 그들의 신앙적 영향에 의하여 근면 검소한 노동관과 더불어 현대 자본주의의 생성에 하나의 공헌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비교.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I(GTB 53, 1982); II(GTB 119, 1984), Gütersloh. 막스 베버, 양회수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서울(을유문화사) 1989.

칼빈주의는 예술에 대한 각박한 이해로 이점에서는 공헌을 하지 못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Rembrand,1607-1669)가 절정에 서있는 네덜란드의 예술을 엄격하게 볼 때 칼빈주의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그도 개신교도인 것은 사실이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주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러한 칼빈주의 신학의 폭과 깊이 그리고 특징적 사상은 결코 자기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렸다. 특히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함께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한 칼빈의 비젼은 가까이는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하지, 영국의 챨스 스펄젼, 마틴 로이드 죤스,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이벨트와 같은 교회사의 탁월한 인물들을 배출케 하였다. 또한 기독교인의 문화적 소명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바람직한 국가 형성에 참여케 하였다. 그 예로서 초기 청교도들의 미국 그리고 근대 서구사회의 이해는 이 칼빈의 사상과 연관된다 하겠다. 그럼에도 우리 한국 교회의 칼빈 이해 내지는 칼빈주의는 본래적 의미가 역사적으로 강조되기 보다는 이미 그 어디에선가 형성되어진 칼빈의 이해 내지는 칼빈주의 신학이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칼빈 내지 칼빈주의 이해를 원전으로부터 시작하는 역사적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끝으로 칼빈 연구가 패커(J.I.Packer)의 감동어린 말을 대신으로 칼빈이 교회사에 끼친 공헌을 기억하고자 한다.

“사실, 그는 종교개혁이 산출한 가장 세련된 주석가요, 가장 거대한 교의 신학자이며, 가장 심오한 종교 사상가이다. 그는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 중심적이었으며, 삶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이었으며, 신앙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그는 종교개혁 사상의 신앙고백적 강조인, 오직 신앙,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너무도 탁월한 명쾌함과 열정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생애는 두 가지 확신으로 통치함을 받았는데, 모든 거듭난 마음에 새겨진 것이며, 진정한 예배의 모든 행위에서 표현되어지는 바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며,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은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확신은 그의 생애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바로 그의 마지막 유언는 그의 무덤에 아무 표시를 하지 않을 것과 그의 장례식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이는 혹시나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러한 칼빈의 확신은 그의 신학에도 그대로 침투되어 있다.”. J.I.Packer, “John Calvin and Reformed Europe”, in: John D. Woodbridge(edt.), Great Leaders of the Christian Church, 213(208-215). “He was, in fact, the finest exegete, the greatest systematic theologian, and the profoundest religious thinker that the Reformation produced. Bible-centered in his teaching, God-centered in his living, and Christ-centered in his faith, he intergrated the confessional emphases of Reformation thought - by faith alone, by scripture alone, by Christ alone, for God's glory alone - with supreme clarity and strength. He was ruled by two convictions that are written on every regenerated heart and expressed in every act of real prayer and real worship : God is all and man is nothing; and praise is due to God for everything good; Both convictions permeated his life, right up to his final direction that his tomb be unmarked and there be no speeches at his burial, lest he become the focus of praise instead of his God. Both convictions permeated his theology too.”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칼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칼빈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K. Barth in seiner Vorrede zu : Calvin, Textes choisis par C. Gaguebin 1949, 11. 비고. H.H. Eßer, op. cit., 48: ꡒNicht Calvin gehorchen, wohl aber dem, der der Meister Calvins war.ꡓ
바로 이 사실을 칼빈은 그의 전 생애동안 강조하였던 것이다.
출처 : 푸우도사 자료실~!^^
글쓴이 : 조광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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