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스크랩] 칼빈의 예정론에 나타난 실천적 삼단논법

형람서원 2007. 1. 1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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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정론에 나타난 실천적 삼단논법

김 종 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전임강사

I

니젤에 의하면, 칼빈에게는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 실천적 삼단논법은 “개혁자들이 개인 안에서 그리고 개인을 위하여 선택의 확실성(certitudo electionis)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논리적 체계”이다. Francis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IV. xiii. 4, quoted in R.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85), p. 293.
의 단서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W. Niesel, 「칼빈의 神學」 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pp. 170-181.
니젤이 볼 때 그 문제는 의인과 거룩 혹은 신앙과 열매 같은 것이 아니고 다만 행동이 개인의 선택의 확신에 대해서 어떤 의의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클링언버그가 이 점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Ibid., p. 171, n. 52. Cf. G. Klingenburg, Das Verhaltnis Calvins zu Butzer (Diss. Bonn: 1912, pp. 64-77).
칼빈은 신자에게 그들의 선택에 관한 확실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한 매개로서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Ibid. 켄달도 니젤처럼 칼빈에게 실천적 삼단논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선택된 자 수에 있음을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설득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의 직접적 행위에 의해 안다. 이 까닭에 ‘만약 피기우스가 내가 선택된 자임을 어떻게 아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그리스도가 나에게 일천 증거들 이상이라고 대답한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는 칼빈의 말에 의지하여, 그는 니젤과 함께 칼빈이 실천적 삼단논법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p. 28, n. 7, quoted in 이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 pp. 151-152. 클루스터도 “신자들의 선행으로부터 논리적 결론을 끌어내는 실천적 삼단논법”이 없다고 한다. F. H Klooster, Calvin's Doctrine of Predestinati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7), p. 52.

반면, 바르트는 칼빈에게서 실천적 삼단논법의 증거를 발견하고 이러한 인식이 유용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이 선행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 이외의 근거”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유일한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인식하게 되는 행동과 태도”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I, 2, pp. 369-370, quoted in G. C. Berkouwer, Divine Election, trans. Hugo Bekker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0), p. 290. 비크도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빌립보서 1장 6절 주석을 인용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유익들을 끊임없이 명상하라. 이는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격려하고 확증하며 그들의 마음속에 항상 이 삼단논법을 숙고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예언자가 증거한 것처럼(시 138:8; 사 64:8) 그 자신의 손들이 시작한 일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손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한 것을 완성할 것이다.” (Comm. Philip. 1:6, quoted in 이양호, p. 153.) 이어서 비크는 “요컨대 칼빈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용에 대해 경고하는 만큼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Joel R. Beeke, "Faith and Assurance in the Heidelberg Catechism and its Primary Composers: a Fresh Look at the Kendall Thesis," Calvin Theological Journal, vol. XXVII, 1992, quoted in ibid.)



개혁자들이 선택의 확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적 체계인 실천적삼단논법과 칼빈의 관계를 연구할 때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대부분 연구자들의 관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에서 벗어나 칼빈의 관점에서 그들의 견해를 분석하면서 그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자 한다.

II

니젤은 칼빈이 선택의 확신과 관련하여 부수적인 표징(signa posteria)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Inst., III, 24, 4 (OS 4, 414)
그는 칼빈이 그것을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 그의 ‘부르심’, 결국에는 성령을 통해서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Niesel, p. 171. Cf. Inst., III, 24, 4 (OS 4, 414-415), 24, 5 (OS 4, 415).
니젤은 칼빈이 말하는 부수적인 표징이 부르심이며, 그것이 말씀과 성령과 그리스도와 관계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구원의 질료인인 그리스도를 강조한 나머지 형상인인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는 경시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칼빈이 우리가 우리의 상태나 행동을 보고 우리의 선택을 인식하거나, 확신할 수 있다는 의견을 조금도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의견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Ibid., pp. 171-172.
니젤은 칼빈이 말하는 부수적인 표징이 부르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점에 머물러서 부르심을 실천적 삼단논법과 관계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선행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요인이 될까봐 경계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니젤은 또한 칼빈이 때때로 삼단논법에 접근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Ibid., pp. 172-173.
특별히 성도들이 자주 자신들의 온전함에 관하여 숙고함으로 자신들을 강화시키고 위로한다고 말하는 곳 Inst., III, 24; 3, 19.
에서 그러하다. 니젤은 여기에서 칼빈이 “성도들이 자기의 구원의 근거와 확립에 관해서 전혀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로 시선을 돌렸다” Inst., III, 14, 18 (OS 4, 236).
는 사실에 주목한다. Niesel, p. 173.
우리는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니젤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칼빈이 어느 곳에서도 행위를 구원의 궁극적 근거로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니젤은 구원 혹은 선택의 확신의 근거와 그 근거를 인식함으로 확신하게 되는 신앙의 측면, 즉 성령의 효과적 사역을 같이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못하다. 니젤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확실성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칼빈이 베드로후서 1장 10절을 언급하면서 로마와 논쟁하는 가운데 강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 본문은 확신을 얻는 것과 관계되지 않지만,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과 같이 믿음에서 나오는 거룩의 실제성과 관련된다. Ibid., p. 172. Inst. III, 15, 8 (OS 4, 248).
하지만 칼빈이 이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가 오직 믿음으로-오직 은총으로 개념 안에서 인간의 행동에 중요성을 결부시킬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칼빈이 분명히 오직 은총으로에 대한 위협으로 보지 않는 구절인 요한일서 3장 14절에 관한 칼빈의 주석에 주목한다. 칼빈에 의하면, 요한은 거기에서 확실성의 근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표징에 관하여 말한다. 이 표징은 참으로 인간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유일한 근거이고 그렇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 구절에서, 확실성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에 의존하고 행위를 신뢰한다면, 칼빈은 이것을 표징과 근거를 혼동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Berkouwer, p. 289.
또한 요한일서 3장 19절에 관한 칼빈의 주석에서도 같은 논점을 본다. 사랑은 확실성의 근거가 아니라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표징이며 수단이다. 여기에서 니젤은 다시 칼빈이 행위를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 그리고 계속 그리스도만 가리킬 때, 그것을 실천적 삼단논법에 반대한 경고로 해석하고, Niesel, pp. 176-177.
칼빈이 어디에서도 실천적 삼단논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Ibid., p. 178.
니젤은 실천적 삼단논법 안에서 배타적이고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믿는 것에 관한 경쟁의 요소를 발견한다. Berkouwer, p. 285.
니젤에 의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와 삼단논법(syllogismus)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Ibid., p. 290.

버쿠버는 실천적 삼단논법이라는 용어가 단지 신앙의 삼단논법(Syllogismus fidei)으로 이해될 때 가능하다고 한다. J. van Genderen, "Het Practisch Syllogisme." in Berkouwer, p. 293.
그에 의하면 이 원리는 관찰된 우리의 삶의 경험적인 실제로부터 도출된 합리적인 결론들 중의 하나와는 전혀 다른 기초이다. Berkouwer, p. 293.
유일한 질문은 신앙의 삼단논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삼단논법”이라는 말은 논리적 결론 자체, 어떤 전제들을 기초로 하여 도출될 수 있는 추론을 논리적인 도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 즉 선행을 기초로 하여 선택의 실제를 결론지어도 좋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이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는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것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삼단논법”이라는 단어 안에서 선행과 확신의 관계를 가리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문자 그대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실제적인 논점은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확신을 위해 갖는 중요성이다. Ibid., p. 295.
계속해서 버쿠버는 "이 관계를 찾을 때, 실천적 삼단논법의 전체적인 문제점은 성령에 의한 칭의와 성화의 성경적 관계에서 비롯되고 그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론적 관점과 성령론적 관점의 관계에 관하여 나누일 필요가 없다. 이 끊어질 수 없는 관계에, 그리고 성화의 부수적인 중요성, 기능, 그리고 중대성에, 실천적 삼단논법에 관한 유일하게 합법적인 해석이 놓여있다“ Ibid.
고 말한다.
버쿠버는 실천적 삼단논법을 신앙의 삼단논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그것의 기독론적 관점과 성령론적 관점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의 핵심에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를 성화와 관련시키기 때문에 그의 해결 방법은 명쾌하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튜레틴의 정의로부터 실천적 삼단논법을 신앙의 삼단논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그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참으로 믿고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선택받았다. 그런데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선택받았다.(Quisquis vere credit et resipiscit electus sit; Atqui ego credo, etc.; Ergo electus sum)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IV. xiii. 4, quoted in Muller, p. 293.


우리는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실천적 삼단논법을 신앙적 삼단논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기독론적 관점과 성령론적 관점에서 같이 보아야 한다는 버쿠버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 관점에서 칼빈에게는 분명히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칼빈의 말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III

하나님의 은폐된 계획 속에 있는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불합리하게 묻는 질문에 John Calvin, 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 trans. J. K. S. Reid. (London: James Clarke & Co. Ltd., 1961), p 126 (CO 8, 318.).
칼빈은, 구원의 확실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밝혀지므로, 이렇게 제공된 생명의 원천을 간과하여 하나님의 은폐된 심연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리스도에게 그르고 부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Ibid., p. 126 (CO 8, 318): "Quum nobis in Christo proposita sit salutis certitudo, perperam, nec sine Christi ipsius iniuria, facere, qui praeterito hoc vitae fonte, ex quo haurire promptum erat, ex reconditis Dei abyssis vitam eruere moliuntur."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하고 은폐된 하나님의 선택의 밝은 거울이고 또한 담보이며 보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생명을 신앙으로 명상한다. 그리고 신앙으로 이 보증과 담보를 붙든다.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조명하셔서 그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이 무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신앙의 기원이며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일 수 없고(딤전 1:17)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시고(딤전 6:16), 그의 품속에 영원히 계시는 독생자 외에는(요 1:1) 아무도 그의 계획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롬 11:34; 고전 2: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신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양자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해질 수 있다.” Ibid., p. 127 (CO 8, 318): "Christus ergo aeternae et absconditae Dei electionis tum luculentum nobis speculum est, tum arra quoque et pignus. Fide autem, quam Deus in hoc speculo nobis repraesentat, vitam contemplamur: fide pignus hoc arramque amplectimur. Et unde probamus, gratuito electos esse ex hominibus aliquos, nisi quia spiritu suo Deus quos vult illuminat, ut fide inserantur in Christi corpus? Fidei quidem nostrae origo et causa est divina electio: sed quia invisibilis est Deus (1Tim. 1,17), lucemque habitat inaccessam(1Tim. 6,16), et neminem consiliarium admittit(Rom. 11,34; 1Cor. 2,16), praeter unigenitum, qui semper fuit in eius sinu (Ioann. 1, 18), tenere mentem Christi oportet, ac fide illuminari, ut nobis patefiat, quae in corde Dei prius latui adoptio."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과 그것을 사유하기 위한 신앙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 선택의 확실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그가 이 확실성을 우리에게 충분히 그리고 상세하게 확증해준 증거로 만족하자”고 한다. 왜냐하면, “창세 전에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는 것처럼, 또한 만일 우리가 신앙을 통하여 그를 받아들이고 용인하면 그 안에서 우리의 선택의 보증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범위를 넘어서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에게 생명이 봉인되고 확증되는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 17 (CO 1, 333). "Quod si Christum fide possidentes, vitam simul in eo possidemus, ultra de aeterno Dei consilio quidquam percontari, nostra minime refert. Christus enim non speculum est duntaxat, quo Dei voluntas nobis repraesentatur: sed pignus, quo veluti obsignatur."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선택의 확실성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자기 기만 없이 볼 수 있는 거울”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이 되기를 영원부터 원하신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기로 예정하셔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모두 그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하고 있다면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27 참조)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를 갖게 되기” Inst., III, 24, 5 (OS 4, 415-416): "Quod si in eo sumus electi, non in nobis reperiemus electionis nostrae certitudinem: ac ne in Deo quidem Patre, si nudum illum absque Filio imaginamur. Christus ergo speculum est in quo electionem nostram contemplari convenit, et sine fraude licet. Quum enim is sit cuius corpori inserere destinavit Pater quos ab aeterno voluit esse suos, ut pro filiis habeat quotquot inter eius membra recognoscit, satis perspicuum firmumque testimonium habemus, nos in libro vitae scriptos esse si cum Christo communicamus."
때문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선택의 거울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을 의지하여 강조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자기의 자비를 그가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는 또한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선한 기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분은 우리 자신의 값없고 자비로운 선택의 가장 명확한 거울이다.” Concerning, p. 112 (CO 8, 306). 칼빈은 여기에서 어거스틴의 De dono perseverantiae, c. 12, c. 24를 언급한다.

그리스도가 선택의 거울이라는 말은 또한 그리스도가 선택의 계시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과 상속자들로 간주되는 것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초월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면, 얼마나 어리석게 그의 안에서 이미 얻은 것, 그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의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인가?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며, 그의 불변의 진리이며, 그의 견고한 계획이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가 구하는 아버지의 뜻과 조금이라도 다를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의 처음부터 영원까지를 우리에게 충실히 계시해 주신다.” Inst., III, 24, 5 (OS 4, 416): "Ille (inquam) nobis testis fuit, filiorum loco habitum iri a Patre caelesti omnes a quibus fide receptus fuerit. Siquid plus appetimus quam ut inter Dei filios censeamur et haeredes, supra Christum conscendamus licet. Si haec suprema nobis est meta, quantopere insanimus, extra ipsum quaerendo quod et in ipso iam consequuti sumus, et in solo ipso inveniri potest? Praeterea quum sit aeterna Patris sapientia, immutabilis veritas, fixum consilium, non est timendum ne quod suo sermone nobis enarrat, ab illa quam quaerimus Patris voluntate vel minimum variet: quin potius eam fideliter nobis aperit qualis ab initio fuit, ac semper futura est."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실 때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가 그의 특별한 백성 중에 속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길 원하시기” Concerning, p. 127 (CO 8, 319). "Videmus, ut a se ipso incipiat Deus, quum nos eligere dignatur: sed nos a Christo incipere velit, ut nos sciamus in sacro illo peculio conseri."
때문에 선택을 인식하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깊이 뚫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대립되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압도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잠 25:2-6)”. Inst.(1536), p. 60 (CO 1, 74): "Qui vero Christo non contenti, nituntur altius penetrare, iram Dei adversum se provocant, et quia in abyssum maiestatis eius irrumpunt, nihil possunt quam opprimi a gloria (Prov. 25)."

칼빈은 구원의 확실성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우리의 양자됨을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셔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자비를 경험하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연관시킨다. “만일 피기우스가 나는 어떻게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나에게 천 명의 증인보다 더 많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의 몸에 있다는 것을 알 때, 이미 하늘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고 평온한 곳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에 현재의 은총에 의해 평가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느낌을 그와 대조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고사는 빵은 낯선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Concerning, pp. 130-131 (CO 8, 321) "Unde me electum esse cognoscam, si Pighius rogat: Christus mihi pro mille testimoniis sufficit: nam ubi nos in corpore eius reperimus, in secura tranquillaque statione salus nostra, tanquam locata iam in coelis, quiescit. Si excipit, non posse ex praesenti gratia aeternam Dei electionem aestimari: non obiiciam contra, quem fideles experientiae sensum habent: quia panem quo pascuntur filii Dei, extraneis gustare datum non est."
“우리는 하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질 지를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고전 2:12, 16). 그리고···성령으로 신자들은 인침 받는데···” Ibid., p. 131 (CO 8, 322) "Nos spiritum e coelo habere, ut sciamus quae a Deo donata sunt nobis, atque ideo nos tenere Christi mentem(1 Cor. 2, 12, 16).···spiritum, quo obsignati sunt fideles,···"
이처럼 칼빈은 구원 혹은 선택 본 고에서는 때때로 ‘구원’과 ‘선택’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의 확실성에 관하여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과 이 선택이 신앙으로 우리에게 접목되는 데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실 때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가 그의 특별한 백성 중에 속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길 원하신다. Concerning, p. 127 (CO 8, 319) "Videmus, ut a se ipso incipiat Deus, quum nos eligere dignatur: sed nos a Christo incipere velit, ut nos sciamus in sacro illo peculio conseri."
그리스도의 복음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증거된 우리의 선택에 관한 지식을 그의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봉인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에게 나타낸다. Ibid.

이처럼 칼빈에게 선택의 확실성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확실성의 근거이다. 칼빈에게 선택은 구원의 원천이다. 그래서 선택을 인식하면 구원의 원천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무상의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원천인 선택에 대해 칼빈은 그 확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우리에 관하여는 분명히 선택이 확증된다. 또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이 숨겨져 있다가 밝혀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는데, 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증된다는 것-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Inst., III, 24, 3 (OS 4, 413): "Equidem confirmari, quoad nos, minime obscurum est; elucescere etiam arcanum Dei consilium quod latebat, ante vidimus:"
구원의 확실성은 선택의 확실성이다. 선택의 확신을 얻기 위해 붙잡아야 할 선택의 표징들은 칼빈이 자주 인용하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30)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과 연관된다. 또한 그 확실성의 근거로서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도 간과될 수 없다. 따라서 선택과 구원의 확실성을 관련시킬 때, 칼빈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했는데, 그 순서는 전자부터 시작된다.

IV

선택의 표징인 부르심, 즉 로마서 8장 30절에 언급된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도 그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Inst., III, 24, 2 (OS 4, 412).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지성을 비추며 의를 사랑하며 함양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개조하셔서, 그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와 같은 혁신을 원하며 구하며 달성하도록 분발시키신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경륜의 방법에 의한 자기의 손의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Inst., II, 5, 5 (OS 3, 303).
이처럼 부르심은 그 방법으로 볼 때, 이중적이다. 즉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이다.” Inst., III, 24, 2 (OS 4, 412): "Ad haec ipsa quoque vocationis natura et dispensatio perspicue id demonstrat: quae non sola verbi praedicatione, sed et Spiritus illuminatione constat."
말씀의 선포를 통한 부르심은 일반적인 부르심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한 부르심은 개별적인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부르심으로 외면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자신에게로 부르시는데, 복음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서(고후 2:16 참조), 또 더욱 엄격한 정죄의 기회로서 제시하시는 사람들도 부르신다. Inst., III, 24, 8 (OS 4, 419): "duplicem esse vocationis speciem. Est enim universalis vocatio, qua per externam verbi praedicationem omnes pariter ad se invitat Deus: etiam quibus eam in mortis odorem, et gravioris condemnationis materiam proponit."
반면, 개별적 부르심은 대개는 신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을 비추시어, 선포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신다. Ibid.: "Est altera specialis, qua utplurimum solos fideles dignatur: dum interiori sui Spiritus illuminatione efficit, ut verbum praedicatum eorum cordibus insideat."
이 내적 부르심은 하나님의 무상의 자비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성령의 효과적 사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Inst., III, 24, 2 (OS 4, 412).

우리의 선택의 확고성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확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Inst. III. 24. 6 (OS 4, 416).
칼빈은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것이 선택을 검토하는 바르고 합당한 방법이다. 그러한 방법을 택할 때, “측량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두게” 되며, “예정에 대한 논의가 위험한 바다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 바다를 건너는 항해는 안전하고 평온하며 유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Inst., III, 24, 4 (OS 4, 414): "Et vero licet periculosi maris instar habeatur praedestinationis disputatio: patet tamen in ea lustranda, tuta et pacata, addo et iucunda navigatio, nisi quis periclitari ultro affectet. Nam quemadmodum in exitialem abyssum se ingurgitant qui ut de sua electione fiant certiores, aeternum Dei consilium sine verbo percontantur: ita qui recte atque ordine ipsam investigant qualiter in verbo continetur, eximium inde referunt consolationis fructum. Sit igitur haec nobis inquirendi via, ut exordium sumamus a Dei vocatione, et in ipsam desinamus."
선택과 부르심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며, 그 주체는 하나님이므로 부르심은 값없는 것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을 때에, 육은 적어도 그에게 응답했다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육은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다고 선언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다." Inst., III, 24, 2 (OS 4. 412-413).
이 점에 대한 실례는, “영생으로 정해진 자들은 믿었다”(행 13:48)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서는 끝까지 선택만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부르심은 값없는 것이다. Ibid.(OS 4, 413).
부르심이 선택에 의존한다는 것은 로마서 8장으로도 증명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의해 계획적으로 부르심 받은 자들의 선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을 아시고 주목하신다(딤후 2:19). Concerning, pp. 70-71 (CO 8, 271-272).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을 주시는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올 때 하나님의 무상의 선택은 완전히 설명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Inst., III, 21, 7 (OS 4, 377-21-22), quoted in Partee, Calvin and classical philosophy, p. 133.
예정은 인간의 기능들에 의해 시험될 수 없고,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은 성령의 은총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다. Com. Rom. 11. 34 (CO 49, 231), quoted in ibid.
개별적 부르심은 선택에 참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선택하실 때에 그들을 이미 자녀들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하며,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받는 성령을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도 하고, “인치심”과 “미래의 유산의 보증”이라고도 한다(엡 1:13-14; 고후 1:22; 5:5 참조).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에 의해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그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증명하고 인치시기 때문이다. Inst., III, 24, 1 (OS 4, 410).
이렇게 선택의 확신은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서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부르심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 Inst., III, 24, 2 (OS 4, 412): "Atque etiam Deus, illustrandae gloriae suae causa, Spiritus sui efficaciam ab illis subducit. Interior igitur haec vocatio pignus est salutis quod fallere non potest."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 사도는 행위를 논할 때 미래나 과거를 말하지 않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대립시키는데,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한다.” Inst., III, 22, 4 (OS 4, 384).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피택자들은 부르심과 관련된다. 이러한 관련성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가끔,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어, 하나님의 선택을 이 부르심과 칭의로써 이미 드러난 것이라고만 칭한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은 가끔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신 그런 예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의 수에 계산되지 않을 수도 있다(롬 9:11,25-26, 10:20, 11:7,24,28; 호 2:23).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불변적인 섭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받은 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롬 8:1, 14).” Inst.(1536), p. 59 (CO 1, 73): "Scriptura saepe, dum se accommodat sensui nostro, electionem Dei non vocat, nisi quae hac vocatione et iustificatione iam manifestata fuerit. Atque haec causa est, ut saepe in populo Dei numeret eos, in quibus Deus virtutes suas operatus est, quamvis electi non essent' rursum, qui vere electi sunt, eos in populo Dei non recenseat, quia nondum tales declarati sunt (Hos. 2. Rom. 9. 10 et 11). Hic enim non unam illam et incommutabilem Dei providentiam respicit, sed tales nobis Dei filios describit, quales a nobis cognosci possunt, qui scilicet spiritu Dei aguntur (Rom. 8)."

칼빈은 바울(고전 10:12)과 함께 “신자들의 단순한 확신”은 금하지 않지만 오히려 육적인 자신은 금하는데, 그러한 자신은 “거만과 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를 수반하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없애며, 받은 은총을 잊어버리게 하기” Inst., III, 24, 7 (OS 4, 418): "Paulus non simplicem securitatem Christianis dissuadet, sed supinam ac solutam carnis securitatem, quae fastum, arrogantiam, aliorum contemptum secum trahat, humilitatem extinguat, ac reverentiam Dei, acceptaeque gratiae oblivionem inducat."
때문이다. 칼빈이 또한 경계하는 것은 신앙에 선택의 힘을 의존시키는 것이다. 볼섹에 의하면, 신앙이 선택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선택은 신앙에 근거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조명되기 때문에, 타고난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장님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조명하지 않는 자들은 간과된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며, 구별되는 것은 오직 완고함으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돌같은 마음들 가운데서 육신같은 마음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실 때, 비록 성경이 그것은 교회 단독의 특권이라고 분명히 선언할지라도, 이것은 전 인류에게 무차별적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Concerning, p. 51. CO 8, 255). 이러한 견해를 가진 볼섹과의 논쟁의 결과로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선택과 신앙의 관계가 증보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칼빈은, 신앙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신앙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만 선택이 효력을 나타내며, 여기서부터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Inst., III, 24, 3 (OS 4, 413): "Sed falso dicitur electionem tuunc esse demum efficacem postquam Evangelium amplexi sumus, suumque inde vigorem sumere."
선택은 신앙보다 앞서지만, 선택은 신앙으로 배워진다고 칼빈은 이렇게 설명한다. Concerning, p. 127 (CO 8, 318): "Prior quidem fide est electio, sed ex fide discitur."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선의로-그것 밖에서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데- 그가 기뻐하신 자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나머지는 거부하신다. 무상의 선택으로 존귀하게 하신 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조명하셔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생명을 받게 하시지만, 한편 다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믿지 않아서 신앙의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남아 있게 된다. Ibid., p. 58 (CO 8, 261): "···Deum aeterno suo beneplacito, cuius aliunde causa non pendet, quos illi visum est, destinasse ad salutem, aliis reiectis: et quos gratuita adoptione dignatus est, spiritu suo illuminare, ut vitam in Christo oblatam recipiant: alios ita sponte esse incredulos, ut fidei luce destituti in tenebris maneant."
우리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이 선택을 듣는 것보다 우리의 신앙을 세우는 데 더 적합한 수단은 없다. 성령이 선택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증거하셔서 영원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서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폭풍과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모든 동요에도 굴하지 않게 하신다. 왜냐하면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에, 구원이 우리에게 확신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신앙에 분명히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붙잡고, 똑같은 신앙의 인도를 받아 이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볼 수 있다.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 위에 기초되고 복음의 약속 위에 의거하며, 신앙을 통해서 전달된다. Concerning, p. 56. (CO 8, 260): "Nulla aedificandae fidei aptior est ratio, quam dum audimus electionem illam quam spiritus Dei cordibus nostris obsignat, in aeterno et inflexibili Dei beneplacito consistere, ut nullis mundi procellis, nullis Satanae insultibus, nulli carnis vacillationi sit obnoxia. Tunc enim demum nobis certa est nostra salus, quum in Dei pectore causam reperimus. Sic enim vitam in Christo manifestatam fide apprehendimus, ut eadem fide duce procul intueri liceat, ex quo fonte vita prodierit. In Christo fundata est salutis fiducia, et in evangelii promissiones recumbit."
신앙으로 선택을 인식할 수 있다는 칼빈의 말은 신앙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신앙을 통하여 선택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그 후의 표징들을 굳게 붙잡는다면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그릇된 곳에서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내부로 침입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Inst., III, 24, 4 (OS 4, 414).
악한 소원을 일으키는”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Inst., III, 24, 4 (OS 4, 414).


V

이와 같이 칼빈에게 선택의 확실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과 관계된다. 그런데 방델이 지적한 것처럼, “칼빈의 몇몇 제자들은 행위의 증거에 관하여 더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많은 영적 후계자들의 경우도 우리의 행위의 풍부함과 성공이 우리의 선택과 구원의 명백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고 했다.” F.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iret (London: Collins, 1973), pp. 276-277.
그러나 우리는 그와 함께 “이러한 경향은 진정한 칼빈주의자 생각에 적합하지 않다” Ibid.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선택의 표징을 붙잡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을 신앙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택의 확실성의 근거는 그리스도이며, 그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접붙여졌다는 것을 성령의 사역에 의해 신앙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예정론에는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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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ee, C. Calvin and Classical Philosophy. Leiden, 1977.
Wendel, François.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lated by Philip Mairet. London: Collins, 1973.
출처 : 푸우도사 자료실~!^^
글쓴이 : 조광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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