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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 왕궁터에서 찾은 화장실

형람서원 2006. 7. 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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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궁터에서 찾은 화장실

 

 

왕궁리유적은 고속도로 익산 I.C에서 익산 시내로 들어가다가 금마면 소재지에서 좌측 전주방향으로 약 1km 지점에 있습니다. 이 유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왕궁터로 알려져 왔던 곳이며 조선시대 기록에도 고대 왕궁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고조선의 箕準王이 남으로 내려와서 세운 도읍성이라는 학설부터 마한시대의 왕궁터, 또는 백제시대의 왕궁터, 그리고 백제 멸망 이후에 후백제 견훤이 쌓은 궁성터라는 학설까지 다양하게 알려져 있던 곳입니다. 

 

이 유적은 지난 70년대에 처음 발굴된 이후 1989년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매년 발굴을 계속하여 지금은 약2/3가량이 발굴되면서 점차 베일에 가려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왕궁리 유적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오층탑 주변부를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탑의 북편으로 금당지와 강당지가 확인되었고 여기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토대로 이 사찰은 ‘官宮寺’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무열왕조 661년도 기록에는 ‘금마 大官寺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해 넘쳐 五步를 적시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발견된 명문기와 중에는 ‘大官官寺’ 라는 명칭도 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면 이 절이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관사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왕궁성은 왕궁리유적의 외곽에 남북이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성벽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 이 성벽은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을 바깥면에 맞추어 쌓고 그 내부에는 단단한 흙과 돌을 섞어 채워 넣었으며 무너져 내린 윗면에는 기와편들이 덮여진 것으로 보아 원래는 상부에 기와지붕과 같은 시설을 한 궁성의 담장과 같은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궁성은 평면상으로 보면 동서폭이 약 250m이고 남북길이가 약 500m 로서 한 변 길이가 약250m 되는 정사각형 2개를 합한 구조이며, 발굴 결과 그 내부에일정한 비례를 적용하여 건물과 축대 등을 배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궁성의 모양이 직사각형이고 궁성의 설계에 일정한 비례를 적용하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예는 같은 시기 우리나라 삼국시대 궁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중국의 漢代 長安城이나 北魏代의 洛陽城과 같은 경우에 그 모양과 비례상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 문화의 흐름으로 보아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습니다.

 

또한 왕궁성의 남성벽에는 궁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가 세 곳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중앙문을 따라 들어가면 현재 탑이 서 있는 부분에 도달합니다. 즉 탑을 포함한 사찰터가 왕궁의 중심터였다는 얘긴데요, 발굴 결과 사찰건물지보다는 왕궁 건물지가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사찰이 있었던 곳에는 먼저 왕궁 건물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결국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이나 발굴된 유구(인공 흔적이 있는 구조물이나 잔해물)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백제 무왕대에 먼저 여기에 왕궁이 들어서고 얼마 있다가 왕궁이 폐쇄되고 그 기능을 다한 후 다시 백제 말경에 절터로 그 성격이 변해 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3년도에 발굴 도중 재미있는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백제 당시에 사용되었던 화장실이 발굴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동안 잘 알 수 없었던 우리나라 고대 화장실의 실체를 잘 알 수 있었고 그 내부 퇴적토를 분석하여 백제인들의 식생활과 질병 등과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발견 경위를 살펴보면, 왕궁성 내부의 서북편 일대는 평평한 대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발굴결과 여기서는 금 은 유리 제품 등을 만들던 공방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공방의 남쪽에 인접하여서 동서방향으로 큰 배수시설이 있는데 화장실은 이 배수로 남쪽 가까이서 배수로와 나란히 3기가 확인되었습니다. 그 구조는 제일 큰 것이 깊이 약3m, 폭 약1.8m, 길이 약10m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좌우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올려 지상에서는 간단한 구조의 화장실 건물로 결구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장실은 내부에서 채취한 퇴적토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여기서 회충, 편충, 간흡충과 같은 기생충 알을 다량 확인하고, 또한 퇴적토에서 당시에 뒤처리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막대기를 확인함으로써 그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화장실은 어깨 부분에 작은 배수로가 있어서 오물이 어느 정도 차면 배수로를 통해 오수가 처리되는 즉, 오늘날의 정화조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어 간단한 구조이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화장실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우리와 유사한 이러한 화장실 유구가 상당히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후쿠오카에 있는 고로칸()유적에서는 8세기경의 화장실이 발견되어 좋은 비교례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동안 부여 관북리 등에서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손잡이 달린 개인용 변기가 나온 예가 있기 때문에 이로 보아 왕궁리 화장실은 아마도 공방생활을 하던 당시 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공동화장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최근 이러한 매장문화재를 주로 연구하는 고고학은 진일보하여 단순히 토기나 기와 등의 유물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토양분석이나 유기물분석 또는 인골의 DNA 분석 등 다양한 자연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대인들의 생활패턴이나 당시의 환경, 그리고 고대 문화 형성 및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얻어내고 있어서 고대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흥미있는 분야로 자리잡고 있는 추세입니다.

 


글쓴이 :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학예연구관 실장 김용민

출처 : 문화재청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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