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토말(땅끝)에서 보길도로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해남하면 남도여행,
남도여행하면 해남이 일번지가 아닌가 싶다.
그런 해남을 한가한 여행이 아닌 업무차 볼일로 와서는 실로 바쁘게 기둥에 손만 짚어보고 떠나온 형국이라
내심 안타깝고, 글을 쓰는 내내 미진한 마음 끊이질 않아 시간이 나면 꼭 다시 여행을 해 볼 요량으로
가는 방법, 그리고 자료들을 검색하다 보니 어떻게 여행글이 엉성하게 만들어 지고...
해남의 녹우당,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보는 여행에 앞서 다분히 역사적 인물이야기라....
보길도에 직접 와서보니 그 느낌이 조금 다르고 다시 짚어보니 그에 대한 견해도 달라졌지만 어디까지나 그 건 개인 생각일 뿐, 나는 그저 쉬운대로 여행이야기나 쓰련다.
글을 쓰는 사람의 실력이 있어야겠지만, 특별한 전문가가 아니니 어림잡아 사려깊은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라면서....
해남-갈두리 토말(땅끝)은 1시간걸리며 요금은 3,700원이며 30분간격으로 운행하며,
땅끝(갈두리)에서 땅끝전망대-땅끝탑을 돌아 보려면 원점회귀로 한시간정도 소요.
갈두리(땅끝)에서 보길도는 선박이 08:20-17:30까지
1일 2시간간격으로 7회운항하며 요금은 편도 7,300원.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광주도착 ▶ 광주에서 해남(녹우당을 거쳐) ▶ 땅끝, 토말(갈두리)까지 버스 ▶ 갈두리에서 ▶ 보길도(1박) ▶ 완도(서울행타면 여행종료이지만)▶ 청산도를 거쳐 ▶ 완도 ▶동서울터미널(버스로 돌아왔다.)
tip
섬으로 연계해서 여행을 다닐 경우에는 차를 두고 현지 택시를 이용하면 싸다.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려 택시를 이용하면 싸게된다. (대략 시간당 만원꼴)
해남버스터미널에서 땅끝(토말)까지 승차권! 회수한다기에 아쉬움에 찰칵!
남녘의 봄은 동백으로 피어나고,
보길도를 가려면 봄에나 갈 일이다.
방풍림 동백이 흐드러져 지천이다. 봄이 먼저 오는 곳,
보길도는 봄이 먼저 온다.
늦은 4월 무르익은 봄에도 늦게까지 피고지는 동백꽃은 윤선도의 세연지를 붉게 물들이며 감돌아 흐른다.
청보리가 푸르고 마늘이 푸르다. 붉은 동백은 어느 시인의 눈물처럼 떨어져 누웠고....
어느 뉘라서 노래가..시가 나오지 않으랴~~
푸른 물 위로 떨어진 붉은 동백꽃은 바람이 불면 작은 배처럼 한가롭게 연못을 떠다닌다.
여름 보길도는 너무 유명하여서 차를 가지고 들어가기에 힘든단다.
줄이 어디까지 이어졌고....힘들여서 섬에 들어가면 성수기 민박은 예약이 아니라...아예 현금예약을 해야하고,
들어갈 때 고생한 만큼 나올 때 또 줄을 서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단다.
그냥 차를 두고 떠나 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버스도 있고,
걷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길, 길들~~트래킹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화창한 봄이었다)
해남 버스터미널 화단에 핀 겹동백(한 나무 한 몸에 이렇듯, 알록달록이가 함께 핀다. 신기하고 예쁘다)
서울(용산역)에서 KTX로 광주로 와서 해남행 버스를 탔고 해남에서 토말(땅끝) 갈두리까지 왔다.
갈두리에서 보길도 가는 배를 기다린다.
배는 작아서 차가 몇 대 못 싣게 되어있다. 여름 휴가철에 보길도에 차를 가지고 들어 간다는 것은 족쇄를 차고 들어 가는 꼴이다.
들어가고 나갈 때....몇 시간을 줄을 설 각오가 돼있다면 모를까~~
▲보길도 승선티켓
▼ 갈두도에 도착, 배를 기다리며,
전망대가 있었다, 다녀오는데만 딱 30분 빨라도 40여분이 경과하고 배는 40분 뒤에 출발하고 선선히 전망대를 포기했다. 모노레일도 유혹하고 전망대에 올라가면 토말, 갈두리항의 전경을 한 눈에 다 바라볼 수가 있을 터인데....
▼ 바위 이름이 '맴암'? 이었지 싶다.
카렌더에도 많이 나오는 일출사진
지금은 밀물때라 밉지만 썰물에 이 바위의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많다.
포토포인트라고 안내팻말이 씌어져 있다.
바위 사이로 해가 뜨는 모습!! 많이들 보셨을 이미지....상상만으로도 ...멋지던,
좀은 엉뚱한 장소에 생뚱스런 자태여서....그 얄망궂은 모습에....은근한 친근감이 더하던...ㅎㅎㅎ
드디어 보길도를 들어 갈 배가 들어 오고 보길도에도 두 군데로 나뉘어 출항했다. (둘러가는 배, 직항하는 배)
아마 이 배가 아니고 저 뒤에 들어오고 있는 배를 탔을 성싶다.
먼저 여기 보이는 이 택시를 흥정(도서지방은 택시가 모두 4륜구동)4시간 선회에 4만원으로~~
여행자 tip
택시를 이용하면 득이 되는 이유는 기사분이 아주 좋은 가이드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역주민으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가이드를 대동하는 셈이라 아주 좋습니다.
그냥 바다가 아니라....완전 양식밭이예요!
보길도 들어가는 배를 타고 깜짝 놀랐지요, 겨우 뱃길만 도로처럼 조금 열어놓고는...
양식밭에 뜬 부표들이 마치 사월초파일 연등처럼 울긋불긋 바다를 수놓고 있었습니다.~
보길도 섬 전체를 선회하는 관광이다.
사진에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바다가 양식밭이었다.
전복, 미역, 다시마, 등 양식과 관광객의 수입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부자들이란다.
택시아자씨의 말을 빌자면....보길도 주민 전체가 알부자라는데...ㅎㅎ
▼산위에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새카만 자갈밭, 해변이었다.
예송리해수욕장
내려와 보니 위에서 보이던 시커먼 색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차돌멩이 빛깔이다.
예송리해수욕장의 까망 차돌
춘백은 떨어져 붉게 물들고.....
미역을 말리고 있는 아저씨를 찍자 바쁘던 일손을 잠시 멈추고 짐짓 포즈까지 취해 주신다.
역시 보길도는 주민들 모두가 관광객을 위하나 보다 했더니, 기사 아저씨왈
"제 친한 친구넘이예요. ㅎㅎㅎ "
그럼? 친구의 손님을 위해서 .....부지런한 손길을 잠시 멈추고 이런 모델포즈를 ? ㅎㅎㅎㅎ~~
(우리가 셋이었으니~~카메라도 셋? )
*여기서 셋이라 함은 여행지에서 만난 카메라를 든 두 젊은 도반(道伴)들이다.
"감사합니다아~"
그 시커먼 자갈마당에 또 이런 시커먼 미역을 널어 말렸으니....당연 시커멓게 보일 밖에~~
미역이나 다시마를 사가라고 동네 할머님이 말씀하셨지만...이제 막 보길도 관광 시작인데 ~~ 죄송!!
내 카메라만 그저 휴대용 디카 익서스....
에혀, 경관은 좋더러먼...거의 입체감 하나 없는 평사진들로만.....
흐린 날 오후, 하염없이 혹시나 구름속에서 나타날지도 모를 일몰을 기다리느라....
좌측 숲은 동백숲이다. 방품림으로 둘러처진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는 곳!!
기다리던 일몰은 구름에 가려 열릴 듯 열릴 듯...감질나게만 하고 영영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바위 절벽을 잘도 오르내리는 염소 가족들
포카스가 동백에 꽂히지 않았군요. 이런 일이....우째?
▼ 멀리 보이는 뾰죽산 그 앞에 가면...지금 한창 공사중이네요.
뾰죽산 부근에는 지금 제주도를 오고갈 선착장을 만드는 중이랍니다. 제주도와 아주 가깝다네요.
▲ 보이는 뾰죽산 바로 뒤를 돌아가면 짜잔~~!!!
이런 돌이 지천인 해변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공룡알 해변
공룡알 같이 보이지요? 큰돌이든 작은 돌이든 죄다 공룡일처럼 아주 크고 동글동글한게 인물이 훤합니다.
밀물이 되면 공룡알 해변은 더 커지며 계단식으로 되어있다네요.
저 섬까지 바닷속 전체가 다 이보다 더 둥근 돌로 층층이 덮혔다는데 물이 많이 빠지는 날, 보게되면 장관이라네요...거 참!!
섬만 아니라면 슬쩍 안아오고 싶도록 동글동글해서 예쁜 돌!!
◈유배가던 송시열이 쓴 글씐 바위
송시열이 제주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때 섬 동쪽 끝 백도리 해변석벽에
자신의 심경을 한시로 새겼으며 택시에 내려서도 동백나무 울창한 숲을 10여분쯤 걸어가면 푸르른 남해와 기암절벽이 만나는 곳에
글씐바위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절벽을 지나야 해요. 아찔하지요?
송시열의 안각시문을 찾아 나 선 길은 절경이었지요.
귀양도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잠시 머물었던 곳 이라는군요.
우직한 충정을 바위에다 새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지요?
우암과 고산...그 두사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여러 각도에서 마음이 착찹했지만 역사가도
또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저 눈으로 풍취나 즐기다 떠나는 한 낱 민초일 뿐....
흔적이 애매해서 지나쳤다가 막다른 길에서 다시 되돌아 나오며 발견했지요.
얼핏보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습니다.
송시열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좌상(半身坐像)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등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한 인물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충정을 바위에 새긴 게 아니라....하늘에다가 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과격한 성격의 그는 고산을 공격하고 둘 사이는 좋지않게 됩니다.
고산이 물론 20년 연배인 셈입니다.
고산은 낙향하여.... 세상을 외면했고, 송시열은 강직한 성격에 부러짐을 당한 거라는 개론을 펼쳐봅니다.
고산의 유토피아인 보길도에까지 우연찮게 흘러와서 이렇게 암각화를 만든 그 아이러니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보길도 하면 떠오르는 윤선도,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보길도의 관광 백미인 고산 윤선도와 부용동
고산의 초상화
완도로부터 12km 되는 거리에 있는 보길도는
일찌기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동명을 부용동이라고 명명하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다. 10여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
건물 25동을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용동이라 명칭한 것은 연꽃을 부용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부용동이라 명칭을 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연꽃은 수부용(水芙蓉), 부용은 목부용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한자 사전에서 보면 보길도의 甫는 클보 크다는 뜻이고, 吉은 길할 길 자로 옛날 풍수지리(風水地理)에의한 길지의 섬(樂書齋)이라는 뜻이다.
다른 이야기는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라는 글로써 보길도 내에 명당자리가 11군데가 있는데 10군데는 이미 사용 되었고 나머지 1군데도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하여 이 섬을 보길(甫: 十用, 吉: 十一口)도라 하여 불렀다 한다.
남녁의 봄은 동백으로 피어나고
윤선도의 보길도
주소 : 보길면 부황리202외
규모 : 25,268평(83,532㎡)
시대 : 조선시대(17세기말)
내용 : 병자호란으로 제주로 향하던 중 보길도 절경에 취하여 머물렀으며 어부사시사등 주옥 같은
한시가 창작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 양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고산 윤선도 선생이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주로 기거하던 낙서재,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한칸집의 조그마한 정자인 동천석재,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세연정, 반반한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으로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하며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는 판석포 등이 옛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봄이 가장 먼저 온다는 땅끝....해남하고도 보길도 망끝~~
동백이 피고지고 늦봄까지도 지천으로 떨어져 누운 붉은 동백꽃을 만나 보게된다.
그 당시에도 단청을 입히지 않았을까?
고산 윤선도의 흔적은 부리던 노비들의 난동에 의해서 모조리 전소되고...그나마 옛사람들의 전언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었다지만,
외로운 섬, 그 한가운데 350여년이 지난 작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은폐된 아방궁같았음을 뉘라서 모르랴~~
세연정은 노비들의 방화로 소실되어 고증에 의해 다시 설립한 것이라 한다.
문들이 올려져 있지만...겨울난방을 위한 아궁이도 비치되어있었다 한다.
고산 윤선도는 개인적으로 굳이 짧은 지식의 느낌으로 부언하라치면 그냥 '예술가'라 칭하고 싶다.
청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부잣집의 아들, 예술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시문이 특출한 인평대군의 사부였었고 정치적 시련을 몇 번 겪고는 낙향하여 섬을 낙원으로 꾸미고... 세연지를 바라보며 詩나 읊었던 선비이며 세상의 시시비비가 싫었던 자유주의자!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세연지 여기에다 작은 배를 띄워놓고 부용정에서 내다보며 어부사시가를 완성한...
세연지의 돌 모양도 예전과는 많이 틀리다 한다. 악동들이 그 위에서 악기를 다루기도 했다는데,
보길도를 한바퀴 돌아 보면서 부용정의 앉은 곳은 연꽃의 화심인 형태였다.
보길도의 산들은 부용정을 중심으로 연잎처럼 둥그런 곡선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택시 기사분의 설명을 듣고보니...과연 그랬다. 풍수지리상으로도 아마 명당자리였던게지~
▲판석보/판석보를 넘쳐 흐르는 물
보길도의 물은 거의 부용정 으로 모이게끔 되어있단다.
늘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고....판석보는 돌과 흙으로 막아져서 물이 가물때는 농삿물로 유용했다한다.
▼ 흑약암/세연지와 칠암은 제각각 이름을 다 갖고 있다.
동쪽 산등 너럭바위 옥소대에서 관현악을 연주하면 반원형으로 생긴 서쪽 토성벽에 부딪쳐 소리가 세연정쪽으로 몰아준다. 북쪽에 마련된 동대와 서대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고 못에서는 동자가 연심을 따고 있으며 세연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밖을 내다보면 선경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이곳이다.
보길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새벽 완도행 첫 배에 오르기 전, 흐린 날씨에 잠깐 나온 일출을 만나다.
어부사시사 (윤선도 作)
春詞(춘사)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뛰워라 배 뛰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날씨가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
동풍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를 돌아보며 西湖로 가자꾸나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고운 볕이 쬐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그물을 넣어 둘까 낚싯대를 놓으리까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漁父歌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도다
석양이 기울었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물가의 버들 꽃은 고비고비 새롭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정승도 부럽잖다 萬事를 생각하랴
芳草를 밟아보며 蘭芷도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이 무엇인가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갈 때는 안개더니 올 때는 달이로다
醉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잋이 흘러오니 神仙境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걸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느냐 두견 소리 맑게 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남은 홍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더라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그리 길까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어부의 평생이란 이러구러 지낼러라
夏詞(하사)
궂은 비 멈춰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고 깊은 흥이
절로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낸고
蓮잎에 밥을 싸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삿갓은 썼다마는 도롱이는 갖고
오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무심한 갈매기는 나를 쫓는가 저를 쫓는가
마름잎에 바람 나니 봉창이 서늘하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정할소냐 가는대로 배 맡겨라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북쪽 개와 남쪽 강 어디 아니
좋겠는가
물결이 흐리거든 발 씻은 들 어떠하리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오강에 가자 하니 子胥怨限
슬프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楚江에 가자 하니 屈原忠魂 낚을까 두렵다
버들숲이 우거진 곳에 여울돌이 갸륵하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다리에서 앞다투는 어부들을
책망 하랴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백발노인을 만나거든 舜帝 엣 일본을 받자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쳐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돛대를 두드리며 水調歌를 불러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뱃소리 가운데 만고의 수심을 그 뉘 알꼬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웠도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푸른 나무숲 꾀꼬리 소리 곳곳에 들리는구나
모래 위에 그물 널고 배 지붕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 하랴
쉬파리와 어떠하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다만 한 근심은 桑大夫 들을까 두렵다
밤 사이 바람 물결 미리 어이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사공은 간 데 없고
배만 가로놓였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물가의 파란 풀이 참으로 불쌍하다
작은 집을 바라보니 흰구름이 둘러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가로 쥐고 돌길
올라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漁翁이 閑暇터냐 이것이 구실이다
秋詞(추사)
物外의 맑은 일이 어부 생애 아니던가
배 뛰워라 배 뚸워라
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흰 그름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西湖 가고 썰물에 東湖
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흰 마름 붉은 여뀌꽃 곳마다 아름답다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강 뵈는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취라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석양이 눈부시니 많은 산이 금수 놓였다
크다란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느냐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갈대꽃에 볼을 붙여 골라서 구워
놓고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질흙병을 기울여 바가지에 부어다고
옆 바람이 곱게 부니 다른 돗자리에 돌아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어두움은 가까이에 오되
맑은 흥은 멀었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단풍잎 맑은 강이 싫지도 밉지도 아니하다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宮殿이 아득하니 맑은 빛을 누를
줄꼬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옥토끼가 찧는 약을 快男兒에 먹이고저
하늘 땅이 제각긴가 여기가 어디메뇨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바람 먼지 못 미치니 부채질하여
무엇하리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들은 말이 없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옷 위에 서리 오되 추운 줄을 모르겠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가 좁다 하나 속세와
어떠한가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내일도 이리 하고 모레도 이리 하자
솔숲 사이 내 집 가서 새벽달을 보자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空山 落엽에 길을 어찌
찾아갈꼬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흰 구름 따라오니 입은 옷도 무겁구나
冬詞(동사)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텁도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끝없는 물결이 비단을 편 듯 고요하다
낚싯줄대 다스리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瀟湘江 洞庭湖는 그물이 언다
한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이때에 고기 낚기 이만한 데 없도다
얕은 개의 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느냐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은 때 바다에 나가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미끼가 꽃다우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간 밤에 눈 갠 후에 景物이 다르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仙界인가 佛界인가 人間界인가 아니로다
그물 낚시 잊어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개를 건너고자 몇 번이나
생각하고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공연한 된바람이 혹시 아니 불어올까
자러 가는 까마귀가 몇 마리나 지나갔느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운데 저녁눈이 꽉
차 있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거위떼를 누가 쳐서 (자취)를 씻었던가
붉은 낭떠러지 푸른 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좋은 물고기를 낚으나
못 났으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孤舟에 도롱 삿갓만으로 흥에 넘쳐 않았노라
물가에 외롭게 선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 마라 인간세상
가린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파도 소리 싫어 마라 속세 소리 막는도다
滄洲가 우리 道라 옛부터 일렀더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七里灘에 낚시질하던 嚴子陵은
어떻던고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십년 동안 낚시질하던 강태공은 어떻던고
아 날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에 붉은 꽃이
흩어진 데 흥청거리며 걸어가서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눈달이 西山에 넘도록 松窓을 기대어 있자
고산 윤선도(효종 2년, 1651년)
漁父四時詞 어부사시사
이해와 감상
고려 때부터 전하여 온 어부사를 중종 때 이현보가 어부가 9장으로 개작하였고,
이것
을 다시 고산이 후렴구만 그대로 넣어 40수로 고친 것이다.
이현보의 어부가에서 시상을 빌어 왔다고 하나, 후렴만 떼고 나면
완전한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지니면서, 전혀 새로운 자기의 언어로써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시조이다.
포구에는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는 햇살이 비치며, 밤 사이의 썰물이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생기가 돋고 희망에 넘치는 분위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윽고 배가
바다로 밀려 나가자 멀리 보이는 강촌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봄이 돌아오자 산과 들은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싱그렇고 맑은 대기 속에서 제일
먼저 우는 것은 뻐꾸기다. 이 뻐꾸기는 신록이 한창 우거질 때까지 계속해서 우짖는
다. 어촌의 춘경을 노래하되, 첫 구절에 뻐꾸기를 등장시켜 어촌(그것은 농촌이라도
좋다의 봄 풍경을 노래한 것은 작가만이 나타낼 수 있는 예리한 감각이다. 특히 문장
에 도치법을 써서 표현의 모를 더욱 더 살려 놓았다. 그리고, '안개 속에 나락들락하
는 어촌의 두어 집','온갖 고기가 뛰노는 맑은 소' 등 티끌 세상과는 완전히 절연한,
선경과도 같은 어촌으로 부각해 놓아,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끝 구절
첫마디에서 '맑은'으로 하지 않고 '말가한'이라고 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심화 자료
연강첩장도시
'연강첩장'의 뜻은 안개 낀 강과 첩첩이 겹친 산봉우리로 중국 북송 때 왕 진경이 그
린 '연강첩장도'를 보고 소 식이 찬으로 쓴 시. 그 시에 '강위에는 수심이 깊었고 산
은 첩첩인데, 공중에 높이 뜬 푸른 봉우리는 구름인가 운애인가'라는 구절이 있다. 소
식은 그림 속의 풍경을 시로 나타냈고 마침내 이 아름다운 그림 속의 사람이 되어 산
속으로 돌아가자는 감상으로 이 시를 끝맺었다.
천년노도
오 자서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 자서는 춘추 시대
때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원이다. 아버지와 형이 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오나라로
가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쳤다. 이 때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고 그의 시체를 300
번이나 매질했다. 그 뒤 오나라가 월나라를 치자, 월왕 구천이 용서를 청하여 옴으로
오왕부차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자서는 이의 불가함을 충간하다가 도리어 재상의
참소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오 자서는 사인에게 이르기를 '내 눈을 도
려 내어 오나라 동문 위에 걸어 놓아라. 훗일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겠노라.'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오왕은 그의 시체를 가죽 부대에 넣
어 오강에 띄워 버렸다. 이 때에 강물이 노하여 큰 파도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9년 뒤 그의 말대로 월나라에 의하여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천년노도'란 여기에서 생
긴 말로 오 자서의 충성심을 이르는 말이다.
어복 충혼
중국 춘추 시대에 초의 굴 원이 지은 어부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굴원의 본명은 평으
로 초나라 희왕때 삼려대부가 되어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참소로 인하여 왕
이 멀리하므로 '이소'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뒤 경양왕 때에 다시 참소를 받아 양자
강변으로 유배되었다. 이 곳에서 어부사를 지어 충성심을 밝히고 멱라수에 빠져 목숨
을 끊었다. 그의 어부사 속에 '차라리 상수에 가서 강물에 몸을 던져 고기 뱃속에 장
사를 지낼지언정 어찌하여 이 결백한 몸에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둘러쓴단 말가'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어복 충혼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충신의 절조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사진,글/이요조(초록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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