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는 시찰회를 운영하여야 하는가?
흔히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로 통칭되는 기독교회들은, 개별교회에 통상적으로 임직한 장로(Presbyter)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처럼 통칭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교회가 장로회(Presbytery)로서의 노회에 속하여 있다는 의미에서 장로교회라 통칭된다. 한마디로 장로교회는 개별교회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회인 노회에 속하여 있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교회정치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하는 명칭인 것이다.
반면에 동일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가운데서 회중주의의 교회정치(Congregationalist polity)를 표방하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혹은 독립교회(Independence Church)들은, 개별적인 교회로서의 회중들 자체로써 교회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회중교회들은 장로회로서의 노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회 혹은 형제회로서의 회의체를 비정기적으로 구성할 뿐이다. 한마디로 장로교회란 기본적으로 노회에 속한 개별교회로서의 교회론을 표방하며, 회중주의적인 교회들은 개별적인 교회회중 자체를 완전한 교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별 가운데서 장로교회는 개별교회로써 뿐 아니라 더욱 장로회로서의 노회에 속한 공교회로서의 의식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으며, 반면에 회중주의적인 교회들은 개별교회 그 자체로써 완전한 교회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개별교회와 노회 사이의 예속적인(혹은 종속적인) 관계의 성립에 관한 교회사적인 사건이 바로 ‘메이비 논쟁’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에 있어서 장로회 정치를 지향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각각의 개별교회들의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교회들은 반드시(Must be) 노회에 속하여야 한다고 본 것에 반해, 브라운주의자(Brownist)들인 독립교회파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각각의 개별교회들이 노회에 속할 수 있다(May be)는 정도의 느슨한 관계로서만 개별교회와 노회 사이의 연계성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의 배경 가운데서 장로교회들은 시찰(Visitation)을 시행하되, 독립교회 혹은 회중교회들은 시찰을 시행하지 않는다.
물론 독립교회나 회중주의 교회들에서도 개별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연합체로서의 미약한 공교회 의식이 존재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회를 통한 시찰이 아니라 이웃한 지역교회들 사이의 형제애적인 치리의 개념으로서 개별교회의 독립성을 굳건히 하였던 것이다. 그런즉 장로교회라 함은 노회에 속하는 개별교회라는 의미이며, 회중교회라 함은 개별 회중 자체로서의 교회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장로교회는 노회에 속하는 개별교회로서의 장로교회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장로회로서의 노회에 확고하게 예속하기를 거부하는 개별교회를 지향하는 회중주의적(Congregational)인 장로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노회에 소속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인 목사들조차도 장로회로서의 노회에 대한 소속감이 희박하며, 그저 상회비를 납부하는 정도만으로 노회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회중주의적 장로교회’라는 괴상한 성격으로 존속하여 있는 것이다.
한편, 장로교회에 있어서 상회인 노회와의 관계는, 결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위계 구조(Hierarchy)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교회들은 반드시 노회에 예속하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예속의 관계가 철저한 위계 구조를 이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즉 노회는 개별교회를 강압적으로 혹은 사법적으로 치리하여서는 안 되며, 다만 권면과 형제애로써 치리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노회는 개별교회의 독립성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행정적인 지도와 관할을 행사하여야 하는데, 그러한 관할권의 행사가 바로 ‘시찰’이다. 노회는 시찰자를 파송하여 개별교회가 장로회의 교회정치 원리에 따라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찰하되, 시찰을 시행하는 자에게 어떠한 권세도 허용하지 않는 선에서 시찰하도록 함으로써 시찰자가 개별교회의 독립성을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장로회인 노회는 시찰에 있어서 시찰자를 파송할 뿐 상설적으로 운용하는 ‘시찰회’를 구성하지 않는다. 물론 도르트 교회질서(Church Order of Dort, 1619)에서는 일찍부터 인접한 교회들로 이뤄진 시찰회를 인정하고 있지만(제 41조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통해 정립하고자 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에 있어서 시찰은 상설기구인 시찰회가 아니라 비상설적인 시찰자 혹은 시찰위원에 의해 수행될 뿐이다. 만일에 시찰회를 상설적으로 운영한다면, 개별교회-시찰회-노회로 이어지는 하나의 위계체제가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결코 그러한 위계적인 질서로서가 아니라 노회의 시찰과 행정적 조치로서의 실질적인 치리로써 개별교회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별교회인 장로교회와 회중의 목사는 어떻게 하여 노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존속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목사의 소속과 시찰자에 대한 존중을 통한 실질적 시찰을 통하여 이룰 수가 있다. 개별교회가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노회에 예속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편이 바로 시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찰의 기능을 지나치게 증대하여 시찰회로서의 위계를 이루지 않으면서도 노회와 긴밀히 연계되는 장로교회정치를 구현하는 최상의 방편이 바로 시찰이다. 만일에 개별교회의 목사와 당회가 시찰자를 환영하여 적극적으로 시찰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 즉시 그 개별교회는 회중주의적인 장로교회를 지향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시찰자가 시찰회의 권위로써 개별교회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시찰을 시행한다면, 그 즉시로 그 시찰회와 시찰자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감독교회와 같은 위계구조를 형성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즉 장로교회정치의 원리를 참으로 엄밀하게 이해하고 시행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하나로 연합된 공교회가 존속하여 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 방편이다. 교회의 표지인 ‘권징’(혹은 치리)은 단순히 개별교회에서의 시행만이 아니라 노회와 긴밀하게 연계된 시행을 통하여서 교회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지로 표출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는 결코 교회를 운영하는 하나의(혹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인 것이 아니다. 잉글랜드의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요구한 ‘유스 디비눔’(Jus Divinum)에 관한 질의요청에서 알 수가 있듯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설정하고자 한 장로교회정치의 형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법으로써의 교회정치형태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찰회가 아니라 시찰자를 통한 시찰의 시행, 그리고 위계구조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즉,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개별교회와 목사의 순종을 반영하는 장로교회정치의 시행은,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과 법으로 운영되는 하나의 공교회가 존재함을 나타내 보이는 결정적인 표지이자 오직 주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지상의 교회가 있음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방편이라 할 것이다.
[출처] 장로회는 시찰회를 운영하여야 하는가? - 장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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