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교회 이야기

포티 논쟁, 8차 공의회는 몇 개? 869-870과 879-880

형람서원 2025. 3. 1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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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공의회는 기본적으로 7대 공의회라고 한다. 7대 공의회 안에는 두 번의 회의를 거부한다. 먼저는 449년 에베소에서 개최한 회의로 도적회의(robber synod)로 명명될 정도로 거부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5세가 개최한 히에리아 공의회(Hieria, 754년)이다. 히에리아 공의회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지지하고 있을 것이고, 성상숭상주의자들은 787년 7차 공의회, 2차 니케아 공의회를 지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성상을 인정한 787년 니케아 공의회를 공식 공의회로 인정하는 것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모두 인정하는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8차 공의회는 한 교회에서 두 교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인정하는 8차 공의회 규범이 같지 않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강력한 두 주장이 대립하는 것이다. 이미 11세기부터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1세기는 두 주장이 아닌 모든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이다. 2000년경에 서구 신학자는 담론(談論, discourse) 시대가 되었다고 시대를 분석했다. 미시담론과 거대담론으로 나누는 것이며, 절대진리가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거대담론(巨大談論, 영: metadiscourse, 독: Metadiskurs)과 미시담론(微視談論, Macro Discourse)

참고로 공의회를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8차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결정된 회의의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역사적 신앙"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나 로마 교회나 동방 교회는 전례와 결정된 내용인 "역사"를 중심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기 계열에서 일어난 모든 회의를 일관되게 동일, 유사 권위로 회의의 권위를 평가한다. 로마 가톨릭은 트렌트 회의를 공의회(council)라고 했다. 트렌트 회의는 루터가 소천되기 일년 전인 1545년에 개최해서 칼빈이 소천되기 일년 전이 1563년에 종결했다. 그 회의는 18년간 3개 회기로 실시해서, 로마 가톨릭주의를 구체화시켰다. 트렌트의 구호는 "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이다. 개혁교회는 자기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신앙고백서로 표방했다. 개혁교회는 보편교회 의식이 없기 때문에 council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1618년 도르트에 국제회의를 개최했지만, council이 아닌 synod라고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년, 바실리우스 황제 소집), 이 8차 공의회에서 포시우스 총주교파문당하고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고 제시했다(가톨릭 사전). 그런데 동방 교회는 8차 공의회를 879-880으로 규정한다. 이 논쟁에 중심에 선 위인은 포티오스(Photius I of Constantinople, 510-891)였다. 897-870 회의에서 포티오스를 정죄했고, 879-880 회의에서 포티오스를 복권했다.

라틴(서방) 교회는 589년 톨레도에 모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ex Filioque)를 추가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라틴 교회의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한 위인이 니콜라스와 포티오스이다. 서방교회는 867년에 니콜라스를 정죄했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후계자인 포티오스를 869년에 공의회를 소집해서 정죄했다. "라틴인들이 ‘제8차 세계 공의회’라고 부르는 잘못된 공의회(870년)에 참석한 적은 수의 주교들은 황제의 권위에 압도당한 채 포티오스 성인을 정죄하고, 성인의 지지자들을 제국의 국경지대로 추방하였다.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주교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많은 사제들은 성직마저 박탈당했다"(한국 정교회 대교구 사이트에서).

그런데 주동자였던 이그나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주교들이 다시 모여 황제에게 간청해서 8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869년에 결정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포티오스를 복위시켰다. 포티오스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798-877)가 화해했고, 포티오스는 이그나티우스의 뒤를 계승했다. 포티오스는 이그나티우스의 후임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

857년에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해임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주교직에서 물러나고, 포티오스가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에 이그나티우스는 858년에 해임이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서방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그나티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포티우스의 임명을 문제 삼았다. 859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임명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를 파문하고 이그나티우스의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포티오스의 지위를 유지했다.

861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다시 포티오스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며, 이그나티우스의 복직을 촉구했다. 결국 863년에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티우스의 성직을 박탈하고, 그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이 시기에 동방교회는 필리오케(Filioque)를 삽입한 서방교회를 문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867년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바실리오스는 포티우스를 추방하고, 이그나티우스를 다시 총대주교로 복직시켰다. 이로써 이그나티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자리를 되찾았다. 황제는 869-870년: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어 포티오스를 정죄하고, 이그나티우스의 복직시켰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가 포티오스가 화해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897-880년에 개최한 공의회를 통해서 869-870년(포티 공의회)에 결정한 것을 무효화시켰다. 드라기스 사제는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에서 결정한 문서를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문서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결국 교회는 1054년에 최종적으로 분열했다(the Great Schism or the Schism of 1054).

교회는 성상문제로 심각하게 논란을 진행했고,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히에이라 공의회 결정을 파기하고 성상숭배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교회가 은밀하게 유지되었고, 1517년 종교개혁 시기에 다시 구체적으로 등장했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정통주의 개혁파와 급진적 개혁파로 나타났다. 필자는 루터를 온건적 개혁주의로 분류하는데, 루터가 성상문제에 대해서 아디아포라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티 논쟁은 또 다른 양상이다. 필리오케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제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심각하게 분쟁했다. 8차 공의회에 대한 이해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에서 포티오스를 놓고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포티오스를 이단으로 생각하는 서방교회와 포티오스를 성인으로 생각하는 동방교회로 형성되면서 교회는 두 교회가 되었다. 아마도 지금도 포티오스에 대한 견해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서로 다를 것으로 보인다.

개혁된 교회에서 8차 공의회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방교회의 전통에 따라 필리오케를 인정하고 있다. 8차 공의회는 두 축으로 크게 나뉘어서 그 효력에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각각 8차 공의회 횟수를 다르게 놓고 있다. 개신교는 7차 공의회로 설정하면서, 그 논의에서 빠져 있다. 고대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포티 논쟁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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