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바르트의 명제를 거부한다

형람서원 2024. 11. 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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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명제를 거부한다

바르트의 명제를 거부하는 것은 반틸 박사의 제언, 전제주의이다. 반틸 박사는 바르트와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제주의를 세웠다. 반틸 박사는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한 전제주의를 펼쳤다. 그런데 이번의 에세이는 바르트의 글에서 바르트가 제시한 명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제언한 명제는 "신은 말씀하는 인격이다(Deus dixit)"와 "신은 자기를 주로 계시한다"는 것이다. Deus dixit는 동의하지만, 어떻게 Deus dixit하는 것에 대한 바르트의 방식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신 이해는 계시 안에서 발생하는 “계시일원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신존재증명은 무의미한 것이다. ‘계시’라는 신의식이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이 신비일 것이다. 그것을 <교회교의학> I/1 § 8 “계시 안에서의 하나님”에서 제시하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Trinitas)를 역사적이고 성경적으로 교회에 바른 교리로 세웠는데, 바르트는 ‘삼중일신(Dreieingkeit Gottes)’(고경태의 번역, 삼위일체성-박순경)으로 변형시켰다. 바르트의 신관은 최소한 삼중일신(Dreieingkeit Gottes)이다. 그런데 미국 번역에서는 Triune God으로 구별하여 번역했는데도 삼위일체(Trinity)와 차이점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번역은 둘을 모두 삼위일체로 번역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신학을 분별할 수 없다. 어려움이 아니라 불가능이다. 삼중일신(Dreieingkeit Gottes)은 삼위일체와 전혀 다르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바르트는 기독교 전통적 신 개념을 존재 이해에서 계시 이해로 전환했다(KD., I/1, 320-321). 바르트가 세운 유명한 신학 명제 “Dei loquentis persona”(하나님의 말하는 인격,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함 등으로 번역됨)이다. 이 명제를 옳다고 생각하면 바르트의 논리에 함몰될 것이다. 우리는 계시 이해에서 계시연속주의를 언급했었다. Dei loquentis persona의 첫째 격돌은 계시연속과 계시불연속이다. 계시불연속은 성경 66권의 충족성을 믿는 성향이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Dei loquentis persona는 최소한 계시연속주의이기에 성경 66권의 충족성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체계에서는 로마 가톨릭, 오순절주의, 신비주의 모든 것이 가능하다. 바르트의 신학이 보수적이고 매우 엄격한 신학을 한다고 해도 톨레랑스보다 더 큰 톨레랑스를 가진 체계를 이룬다. 근대에 발생한 톨레랑스는 모든 죄에 대한 관용을 위한 방향성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관용(빌 4:5)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

바르트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을 근거하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신(神)을 제한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성경, 교회선포가 하나님 자신이고, 그 관계로 하나님을 이해한다. 성서, 교회선포, 계시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마주 선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신 이해를 계시를 부정하는 형태로 규정한다(KD., I/1, 322).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 안에 충만하게 거한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계시 안에 있는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 철학에서 Existnez, Sein(존재), Sosein, Dasein, Wassein(본질 존재)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존주의에서 존재 문제를 추구하면서 결국 ‘존재’를 ‘있음’으로 이해했다. 재(在)와 있음(being)을 구분하는 것은 ‘행동하는 인간 존재’를 규정했기 때문이다. 항존(恒存)적인 신개념은 없고, 현존(現存)으로 바꾼 것이다. 현존(Dasein)은 결코 선험적으로(a priori) 증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칼 바르트가 세운 명제는 “하나님은 스스로 주로서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 als der herr, KD., I/1, 323)”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세운 첫째 명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트가 세운 둘째 명제에 동의하면 바르트의 신학에 함몰된다. 거짓은 그렇게 쉽게 진리를 무너뜨린다. 거짓은 진리와 논리에 있지 않고 많은 사람이 동의해서 가치를 증명시키려 한다.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정치적이라고 규정한다. 학문은 정치적이 아니고 진리 탐구이고, 진리를 지키는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그 시대에 희생했고 다음 세대에서 교회의 변호자로 인정되었다. 설령 바르트의 신학이 옳다고 하더라도 현세대에 광범위하게 인정된 가치가 진리인 적은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다. 성경은 자기 제자들에게 좁은 길을 가도록 훈련시킨다(마 7:13).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주(主)’라고 계시한 적을 찾아볼 수 없고, ‘여호와(I AM)’라고 계시하셨다. 바르트는 주 계시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고지한 것으로 제시했다(KD., I/1, 323). 나중에 등장하겠지만 바르트에게 없는 ‘로고스 아사르코스(Logos asarkos)’는 신 존재가 없음을 증명한다. 주 고백은 ‘여호와 신앙’과 연관해서 설명해야 정통신학인데,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전환시켰다. 바르트의 신학의 매력은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이성으로 기독교 기원, 예수 탐구를 실패한 유럽의 가식적인 자유주의에 큰 돌파구를 준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실패한 유럽 신학은 정통신학으로 회귀해야 했었는데, 바르트와 함께 신학을 더욱 심하게 세속화시켰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을 인식할 수 있고, 판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으로 불가지론을 확립했다. 현대정신은 자기가 행동하면 진리가 되고 누구에게도 판정받는 것을 거부한다. 바르트의 신학에도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계시가 한 인간에게 발생했는데,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계시인지 분별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단들의 교설에 진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개방하면서, 정통신학의 하나님의 존재 구도는 우상적이라고 배격한다. 인간이 인식하거나 발생한 산물은 겸손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16세기 칼빈은 매주 금요일에 목사들과 함께 신학토론회를 가졌다(제네바 목사회). 20세기 미국에서 메이천은 신앙고백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정신은 현대 교회에 그대로 침투해서 성도들이 자유자재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지도자들에게 칭찬만 받으려고 한다. 성도가 구원에 이르려면 주 예수께서 세우신 사역자들과 동역하며 꾸준하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한다. 담금질 없이 정금은 탄생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는 담금질이 없이 계시가 충만하게 있다.

우리는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I/1. § 8.2에서 제시한 두 명제(하나님은 말씀하는 인격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로 계시한다)를 거부했다. 그것은 신 존재를 거부하는 명제이기 때문이고, 성경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명제에 동의하는 순간, 바르트의 논리를 따라 침몰하게 된다. 바르트의 신학에서는 교회지도자로 말미암은 영적 훈련은 무의미하게 된다. 조건 없이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할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세운 사역자의 훈련을 따라서 정금으로 태어나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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