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형람성경] 에베소서 2장: 교회의 구성: 그리스도의 모퉁이돌과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함께 연결된 벽돌로 건축되는 성전

형람서원 2024. 9. 17. 22:30
728x90
반응형

[형람성경] 에베소서 2장: 교회의 구성: 그리스도의 모퉁이돌과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함께 연결된 벽돌로 건축되는 성전

에베소서 2:1-10절, 은혜의 구원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양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transgressions(trespasses) and sins, τοῖς παραπτώμασιν καὶ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παράπτωμα, a false step, a trespass, 허물, 잘못된 길", 你們死在過犯罪惡之中、他叫你們活過來 // 罪過と 罪: transgressions은 '반역'이고, trespasses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 <사역> 너희는 반역과 죄로 죽어있는 상태였다.

성도의 영혼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原罪)와 이 원죄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범하는 자범죄(自犯罪)를 포함하는 말로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본성에 근거해서 파생된 모든 악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경고하셨던 대로(창 2:16-17),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롬 6:23).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역행하는 것이다. 죽은 영혼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한다. 그것은 방향성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자기 탐욕을 위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허물(반역)과 죄는 동의어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악에 있는 다양한 양상이다. 우리는 죄는 악의 행동에 대한 법정적 성격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하나님과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이 악이고 죄로 발생된다.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어서 선이 있으면 상대적 성격인 악이 형성된다. 시간과 공간이 종결된다면 선의 상대인 악도 사라질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서는 악의 다양한 양상에는 제한이 없으며 오히려 악이 더 증가한다.

우리번역에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번역은 첨가된 문장이다. KJV의 quickened(활발하게 함)에 대한 번역으로 보인다. 두에렝스 번역에는 없고, 제네바 번역(1599)에는 있는 어휘이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the ways of this world)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those who are disobedient NIV는 불순종의 사람으로 번역했지만, ἐν τοῖς υἱοῖς τῆς ἀπειθείας(the sons of disobedience)이 더 합당한 번역이다. the children of unbelief(두에렝스)의 번역과 KJV의 번역 the children of disobedience은 유사하게, '자녀들'로 번역했다. "불순종의 아들들"로 번역하는 것이 명확한 번역으로 보인다. 자녀들, 사람들로 번역하는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관계성에서 더 약하지만, 아들로 번역하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을 향해서 마귀의 자녀,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외치셨다(요 8:44, Ye are of your father the devil).

구원받기 전에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고(1절),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2절). 이 세상 풍속은 죄악된 풍속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단수)’는 사탄 곧 마귀(the devil)이다. 이 세상은 아담이 타락 후의 세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생활원리인 세상이다. 사탄은 옛뱀, 마귀이며(계 12:9), ‘이 세상 신’(고후 4:4) 등으로 표현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요일 5:20).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과 순종을 주시지만, 사탄은 사람들 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죄악된 풍조를 조장한다.

불순종한 아들들에게서 역사하는 영(τοῦ πνεύματος(단수) -the spirit- τοῦ νῦν ἐνεργοῦντος)이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있는 영이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σαρκὸς, gratifying the cravings of our flesh)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NIV와 ESV 번역에 차이가 있다. All of us also lived among them at one time, gratifying the cravings of our flesh and following its desires and thoughts. Like the rest, we were by nature deserving of wrath.(NIV) among whom we all once lived in the passions of our flesh, carrying out the desires of the body and the mind(τὰ θελήματα τῆς σαρκὸς καὶ τῶν διανοιῶν), and were by nature children of wrath, like the rest of mankind.(ESV)

우리도 과거에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키려고 살았다. ‘육체’라는 σαρκὸς(사르코스)는 ‘죄성을 가진 육(肉, flesh)’을 가리킨다고 본다. 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 육체의 욕망은 제한이 없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행하면 모두 세상적이요 죄가 된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곧 이 세상의 길이고 공중권세 잡은 자의 영의 지배에 있는 것이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by nature the children of wrath)였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But because of his great love for us, God, who is rich in mercy, * ἔλεος(1656)는 pity, mercy, compassion, misericordia으로 번역되는데, 자비는 mercy, 긍휼은 compass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성경에서 mercy를 긍휼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이며 헬라어는 <엘레오스-ἔλεος>이다. 헤세드 번역은 결코 쉽지 않다. 헤세드(chesed)에서 charity(자선)도 파생되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mercy, 자비)에 의해서 구원해 주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다. 다른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고, 계시에 근거해서 확립되었다. 우리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적극적이고 총력적이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렘 13:23).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

[5절] 허물(transgressions, 반역)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 χάριτί ἐστε σεσῳσμένοι,—).

하나님의 자비와 인류의 반역,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류는 하나님을 향해서 죽은 것과 동일하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made us alive with Christ, τῷ Χριστῷ, 골 3:1). 하나님께 반역하기 때문에, 세상의 주이신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세상의 생명에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반대해서 전력으로 행동한다. 그 지향성이 죽지 않았다고 스스로 느낀다. 그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다.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새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중생(重生,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일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이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τῷ Χριστῷ, 5절),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앉히셨다(6절, καὶ συνήγειρεν καὶ συνεκάθισεν).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어나고 앉힘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리우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 믿는 모든 자들도 그와 함께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천국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성취와 확증이며 실재 효력이시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kindness, 친절)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the incomparable riches of his grace)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선(goodness, uprightness, kindness, gentleness, χρηστότης)과 은혜(χάριτος, grace)를 나타내심이었다. 그 은혜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밝히 전파되고 있고 증거되고 있다. 교회가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복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반드시 증거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피 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죄인들을 대신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대속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이었고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8절]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구원을 얻었나니[얻었으며]. τῇ γὰρ χάριτί ἐστε σεσῳσμένοι διὰ πίστεως· καὶ τοῦτο οὐκ ἐξ ὑμῶν, Θεοῦ τὸ δῶρον·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and this 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의 자비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을 지식과 찬동과 신뢰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엡 2:9)이라고 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며(요 6:35, 37) 그를 영접하는 것이며(요 1:12)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롬 6:17). 믿음은 입술로 고백된다(롬 10:9-10). 참된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라고 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하다는 웅변이고 경고이다. 믿음의 표현은 성장한 믿음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깊이, 길이, 높이, 넓이가 더 커지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사람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 성격의 믿음이 개입할 수 없다. 믿음은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롬 4:5). 믿음은 빈손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 빈손이 필요하지만, 빈손은 자랑할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것은 공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 3:16).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요 3:18, 3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세소스메노이, 완료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음을 보인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 더러워진 자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현재 성화를 이루다가(빌 2:12)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10).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선물임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투토 tou'to)은 ‘구원받은 사실’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하지 못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핏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8:30).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창조하셨다(κτίζω).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것이 구속 사건이다.

그리스도께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백성은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예비된 사람이다. 선한 일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요 17장).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셨는데, 그것은 아들에게 주어진 백성이 돌아오는 것이고, 곧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디도서 3: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나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일이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는 이 귀하고 복된 사실을 감사하자.

셋째로,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되,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영혼 구원의 전도와 참 교회 건립에 힘써야 한다.

에베소서 2:11-22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citizenship in Israel)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the 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교회 안에 유대인도 있었겠지만, 이방인이 주요한 독자가 될 정도로 교회의 중심이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본문은 그들의 구원받기 전의 신분과 상태를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에베소 편지를 받은 사람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립시키는데 좋은 대조가 아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귀환한 족속들이다. 하나님께서는 12지파의 회복을 원하신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가 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대조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배격했다. 대한민국 사람은 이방인이다. 조덕영 박사는 대한민국의 계보를 창대하게 된 야벳 계열, 두발(Tubal)로 제언한다.

둘째로, 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무할례당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할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언약과 상관없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이었다. 그러나 언약의 증표가 할례에서 성령(세례)로 옮기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며 해로운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백성에게 율법에 암시된 구주이셨다. 구약 백성은 율법 중 제사법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코리스)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알지 못했고 그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목적은 제사장 나라를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 임무를 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고 그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교회가 회복되어 주의 자녀를 왕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하셨다. 망한 이스라엘처럼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돌감람나누 열매를 맺힌다면 쓸모없는 나무일 뿐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말한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창 17:7-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 영생과 평안의 복을 포함한다(신 5:33; 잠 3:16-18). 할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표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여섯째로,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등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없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신(神)에 대한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 신을 아는 지식으로는 헛된 우상들을 만들어 섬길 뿐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신(神)을 신으로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의 피로(by the blood of Christ)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칼빈은 구원을 지향성, 방향성의 전환으로 생각했다. 루터파는 Coram Deo,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구원, 곧 죄사함을 받음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고, 곧 돌이킨 직후의 상황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을 통해, 즉 그가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로 이루신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그리스도의 피"를 말씀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14절] [이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화평이심이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이방인이고 외인인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화평케하셨다(14절). 14절 말씀이 둘을 하나로 만드심이 마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택자를 하나로 묶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엡 2:16). 많은 주석가들은 중간에 막힌 담을 성전의 성소와 이방인의 뜰의 분리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막는 담을 허물고,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여는 은혜이다.

* 이방인인 에베소인들이 이스라엘과 가까워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신약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적 특권의 차이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히 그를 부르는 자들을 누구나 차별 없이 받으신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his flesh, ἐν τῇ σαρκὶ)로 폐하셨으니 /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κτίσῃ. create) 화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계명과 규례의 율법(τὸν νόμον τῶν ἐντολῶν ἐν δόγμασιν)을 폐지하셨다(15절).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와 함께 율법을 폐하셨다. 이는 암묵적으로 계시되었던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로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밝히는 것이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속죄제물로 충족하게 되어, 더 이상의 속죄제물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제사 제도의 근거인 율법 제도도 폐지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된 율법이 폐지됨으로 더 이상 유대인(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제도도 사라지게 되었다.

율법이 폐지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창조되어 화평하게 하셨다(15절). 에베소서 2장에서는 지으심(create) 단어가 등장한다. 새사람을 지으심(창조하심)이다. 구속은 새창조로서, 새인류를 창조하시는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사람에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에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믿음의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교회는 세계적 단체이며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가 되었다.

[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in one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그가)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17절. 그가 오셔서 너희에게 화평을 전하셨으니, He came and preached peace to you

하나님과 사람들은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성경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였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미워하셨고 죄인들도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시며 그 둘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롬 5:10). 십자가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이루시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셨다.

모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16절). 인간과 인간의 반목도 십자가로 소멸할 수 있고, 하나님과 인간의 반목도 십자가로 소멸한다. 모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한다. 십자가로 소멸되지 않은 원수 관계는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이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를 자기부정, 하나님의 절대주권, 인간의 노예의지 등으로 제시했다. 우리시대에 자유의지는 알미니안보다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즉 십자가 신학이 사라지고 새롭고 더 교묘한 영광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등장해도 놀라지 않는다.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위로와 권면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을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 성령으로 제시했다. 원수된 자와 화목되는 길도 동일하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citizens with God’s people)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 members of his household, οἰκεῖοι τοῦ Θεοῦ]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동료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즉 신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 member라는 번역보다, the household(가족) of God이 좋겠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the chief cornerstone)이 되셨느니라.

신약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즉 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모퉁이 돌’은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이 되는 기초석이다. 그것은 건물을 결합시키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a holy temple in the Lord)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 공사는 완공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 즉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으나(고전 1:30; 롬 3:23, 24; 10:4),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과 그 의를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함과 섬김을 그리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기 전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는 할례도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우리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없었고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그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받은 현재의 새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니고 외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즉 가족이 되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물론, 이 성전은 지금도 건축 중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화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전체 교회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남김 없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백성이 되었고 또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21절), 주 안에서(21절), 성령 안에서(22절), 예수 안에서(22절)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고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구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하나같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서로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개인의 성화(聖化)를 위해서와 남은 택자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한다.

형람서원 고경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