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1-8.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생활은 성별된 삶. 특별히 남자와 부자에게 요구함]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대한 주변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한 후에 본격적인 권면에 들어간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지를 훈련시킨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고 간청하는 자세로 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성도들이 더욱 더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하도록 권면하였다(1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전파하였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명확하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말씀하지 않는다. 후에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살전 5:16-18).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또 보내신 자, 독생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하나님의 일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주 예수의 명령이 무엇인 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어긴 부류가 있었다. 2-3절에서 ‘주 예수의 명령’과 ‘하나님의 뜻’이 동일하게 위치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도를 부르셨는데, 부름의 목적이 복음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별하여 부른 것은 거룩과 성화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의 목표는 자신을 하나님께 성결하게 드리는 것이다(Calvin).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전하는 첫 번째 권면은 ‘거룩’이다. 그리고 시대를 음란한 시대로 규정한다. 데살로니가에 주어진 음란은 남편이 아내에 대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자세이다. 그리스도인 남편은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4절). 당대의 법으로 아내를 무시하고 자기 정욕대로 행동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정욕을 따르는 죄의 문제였다. 그리고 분수를 넘게 형제를 해하지 않도록 권면하였다.형제를 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과도한 이자 부과(고리대금)일 것이다. 아내나 연약한 형제에 대해서 포악을 행하는 것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세상의 법인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으로(3b-8절) 불신자가 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포기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항구 도시로 성적(性的)으로 매우 문란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적인 권면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은 쉬운 권면은 아니다. 그리고 남편들에게 아내에 대해서 순결, 존귀하게 여기라는 권면은 매우 이색적 가르침일 것이다(4절). 그리스도인은 이방인의 법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세상의 풍습을 쫓지 않아야 한다. 둘째, 성(性) 질서에서 적당한 분수,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징벌을 하신다(6절). 하나님의 징벌을 소개하는 것은 인간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인간은 상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성 범죄, 성 문란의 위험성은 공동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넘어서서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not reject man but God, who gives you his Holy Spirit., 8절).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예수이며(행 2장), 주께서 몸소 명령하신 것을(살전 4:2) 사도들이 위임받아 전하였다. 복음(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성령의 탄식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도를 통해서 명령하신 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말씀의 권위는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주께 위임받은 말, 사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전하는 자는 위임시킨 말을 하고, 듣는 자는 전하는 자로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천주교(로마 교회)는 교황의 말을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9-12. 형제 사랑의 방법: 사랑하는 자에게 짊이나 피해가 되지 않는 것]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형제 사랑에 관하여 권면을 한다. 데살로니가는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마케도니아에 소문이 날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였다. 그러나 더욱 더 풍성이하기 위해서(참고 4:1) 더 심층적으로 권면을 하였다(9-10절). 잘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더 잘 하도록 사랑의 권면을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완전이 아닌 절대적 완전을 위해서 더욱 분발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사랑할 때에 먼저 조용히 자기 일을 하여 자신의 손으로 일할 것을 권면하였다(11절). 일하지 않고 어떤 소득을 기대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자신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12절).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외인)로부터 존경받아야 하는데, 바르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그러해야 한다. 땀의 소산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분량 안에서 부족함이 없이 기쁘고 담력 있게 사는 것이다.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으며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높은 위치에 있어야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육적인 개념이고 계급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바르고 순결한 생활에서 기쁨과 감사로 역동적으로 사는 것에 있다. 복음 시대에 기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은 전도의 미련함을 무시한 행동이다. 오직 조용히 사랑하고 섬기며 믿음을 정진하는 모습이 외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주님의 재림] 셋째 권면은 재림에 관한 권면이다. 재림의 가르침의 유익은 위로의 확신이었다(18절). 바른 교리를 바르게 선포할 때에 성도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번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한 뒤에 추방되었다. 그 때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은 재림 복음까지 모두 인지하였다. 재림 신앙은 고난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확실한 위로의 선물이다.
재림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이 재림은 모두가 다 아는 것이다. 신천지라는 집단은 예수(재림 예수)가 다시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점은 모두 모르는데 자기들만 아는 방식으로 왔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는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오신다(살전 4:16). 그리고 예수가 오시면 죽은 자와 산자의 부활이 일어난다. 그리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살전 4:17).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예수가 다시 왔다는 가르침은 성경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는 영역에서 ‘caught up’으로 번역하였는데, 과격한 종말론주의자들은 ‘rapture(携擧)’라며 열광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 운동으로 사회까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가르침이 틀린 것이 드러났지만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 성장에서 하강 곡선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재림 신앙은 형제의 죽음에서 위로를 받는다. 주의 재림에서는 먼저 죽은 자나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를 데려오실 것이다. 주의 재림이 오시기까지는 먼저 죽은 사람들은 잠자는 자들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죽어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 뒤로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재림 후에 주를 만난 뒤에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음을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