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1-4. 바울의 사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역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다(1절). 바울은 세 안식일에 데살로니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강론하여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개종하였다. 그들이 이룬 교회가 바르게 서서 유지하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함을 진술하였다(2-3절).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당위성에 대해서 삶의 정황으로 강조하였다. 복음 전함은 사리사욕(私利私慾)도 아니고 헛된 진리나 속임수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고, 그 열매가 바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였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복음의 사역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제시하였다.
복음의 참된 일군, 전도자는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참고,갈 1:10).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타협된, 절충된 복음(율법적 복음)이고 이성으로 가능한 복음(철학적 복음, 적극적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막 12:33). 복음의 사역으로 잃은 영혼의 하나의 돌아옴으로 천국의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눅 15:1-10). 믿음의 백성의 믿음의 진보도 오직 복음 선포에서 비롯된다.
[데살로니가전서 2:5-8. 바울의 사역: 진심으로 성도를 사랑함]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 주간 사역하였다(행 17:2). 바울은 반복해서 전하 복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복음 전파에 대한 진정성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 이것은 과격한 데살로니가 유대인의 공격에 대한 변호적인 성격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아첨(阿諂, flattery)이나 탐심(貪心, greed) 없이 사역한 것은 하나님이 증인이다(5절).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증거로 하나님의 이름을 제시하여 복음의 천적성격과 권위를 제시한다. 땅의 공격으로 하늘의 진리를 해칠 수 없다.
바울은 사역에서 성도들에게 사도로서 ‘존중’을 받아야 하였지만 사람의 영광(칭찬)을 구하지 않았다(6절).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유모처럼 유순하게 성도를 양육하였다. 유모는 자기의 젖으로 아이를 양육하지만, 자신의 아이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유모는 아이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역자인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복음을 양육할 뿐만 아니라, 깊이 사모하여 생명까지 줄 수 있었다. 사도가 성도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8절).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이 확실하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봄. 참고 약 1:17).
[데살로니가전서 2:9-12. 바울의 사역: 자비량 사역]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수고와 고난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비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9절). 칼빈은 복음전파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동반한 사역을 ‘경이롭고 인간의 열정을 넘어선 것(a wonderful and more than human zeal)’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사도의 거룩하고 의롭고 흠 없이 행한 것(holy, righteous and blameless)에 대해서 성도들이 증인이다(살전 2:5).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대할 때에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2:7에서는 ‘유모’처럼 양육한다고 하였는데, 2:11에서는 ‘아버지’처럼 ‘권면과 위로’를 한다. 이것은 사랑과 순종이다. 사랑으로 양육하고 규모 있는 가르침으로 성도들은 “들어갈 영원한 나라”,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동한 것이었다(12절).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은 사도 바울의 깨끗한 양심이었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러한 사도 바울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비교. 고린도 교회). 그래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도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였고, 복음을 영접한 데살로니가 교회도 영원한 나라와 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3-16. 바울의 사역: 쉬지 않는 감사, Endless Thank]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 감사하며 사역하였다(13절). 바울이 겪은 고난은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었다.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도 겪는 것이었다(14절).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도 박해를 받았고, 또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본받아 고난에서 믿음이 후퇴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교회를 박해하였다(15-16절).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적하였다(They displease God and are hostile to all men, 15절. (비교) 살전 1:4).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교회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환난 중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감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교회가 유대인의 박해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방인의 구원 얻음이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구원 얻음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는데,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헐었다(엡 2:16).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게 하였고, 지금도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과 말씀 전파를 방해하여 죄를 더하였다. 그러한 훼방하는 유대인의 세력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하였다(16절). ‘임하였다’라는 동사의 시제는 ‘아오리스트(aorist, 부정과거)’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과거에 이루어진 것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정확하게 있는 상태이다(참조, 칼빈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2:17-20. 바울의 사역: 아쉬움] 사도 바울의 사역은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에 의해서 강제로 쫓겨났지만, 사역의 순간의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여전히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고 있었다(17절).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어 1-2 차례 시도하였다. 그런데 사탄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18절). 칼빈은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을 방해한 것을 사단의 세력으로 말한 것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주해하였다. 방해한 실제 세력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칼빈은 막은 세력이 인간이 아니라 영의 세력으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으며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을 주의 성령께서 막을 때도 있었다(행 16:6).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사단의 세력에 의해서 수포로 돌아갔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기에 바울의 사역에는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주어진 방해와 환난은 오히려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과 데살로니가에 대한 큰 신뢰를 전한다(19-20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망과 기쁨, 상급(자랑의 면류관)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주 예수 앞에 데살로니가 교우들이라고 고백하였다(19절). 사도들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랑이며 영광이며 기쁨이었다(19-20절). 사도들에게 기쁨이 되는 교회 사도들이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이 된다.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 사도와 주님을 본 받아, 지역에서 본이 되어 사도들의 영광과 기쁨이 되었다(20절, 1:6-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안에서 기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