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3장.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항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원수(inmiei Dei)라고
부른다. 그들은 본성에 의한 행동이 아니며 본성에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필자는 “창조의 선하심의 원칙”이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길 힘과 해할 힘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스르겠다는 의지가 발동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의 반역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선한본성을 부패시킨 원인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최고선이심(Deus summe bonum)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결함’은
선에 반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대된다.
본성의 부패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피해를 주지 못하지만, 자신에게는 심각한 피해를
준다. 피해는 완전함, 아름다움, 튼튼함, 세움(덕) 등
선의 요소를 빼앗기는 것이다. 의지의 결함 때문에 선의 의지가 감소되거나
제거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이 전혀 없었다면 감소나 제거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은 최고선으로 결함이
없는데,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된 선으로 결함이 피조물의
의지로 인해서 결함이 발생하였다. 하나님을 반역한 피조물은 자기 본성을 역행하는
일을 자행하며, 본성이 제거되면 양심의 가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선한 행동과 백성에게 폭행을 일삼게 된다.
인간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결함이 있어도 어느 정도의 정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선함이 제거된 본성(양심이 화인된 자)에게
정의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고, 파멸과 공멸로 치닫게 한다. 결함이 있는 인간 본성에게는 공정과 불공정을
구분할 수 있는 이성의 빛(intellegibilis lucis)이라도 있지만, 이성 빛조차 없는 사람은 짐승보다 더욱 악랄한
존재가 된다.
4장. 그리고 이성이 없는 피조물의 결함에 대해서 그들의
본성의 훼손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성 없는 피조물의 존재는 창조주의 적당한
질서이다. 피조물의 생멸(生滅)의
질서는 창조주의 질서의 아름다움으로 인간이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죽음의
존재이고, 제한된 존재로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비록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라 할지라도 전체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선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주의 경륜을 믿으라고
촉구한다.
그래서 지상의 존재들의
결함이 있지만, 처벌의 상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불만을 갖는 것은 본성의 결함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햇볕이 악인에게도 비춰짐에
대해서도 불평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는 햇볕을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누구도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택함을 받아 특별하게 구원을
받는다. 그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악인의 심장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악인은 복음을 버릴 뿐만
아니라, 복음전달자를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악인에게 어떤 미움이나
비난이 없고, 오직 자기 영혼의 주관자이신 보좌에 앉으신 주
예수를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은 그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그자체여야 한다. 불은 유용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불이 해롭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유익하고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언제나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조건에 따라서 감사하지
않는다. 8월의 뜨거운 햇볕이 덥지만, 벼를 익도록 하는 적합한 선물이고 그 결실을
우리가 먹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