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장로교의 이해(4)
朝鮮 耶蘇敎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동쪽으로 진입을 몇 번 시도했지만(귀츨라프,1832년, 토마스,1866년) 실패했고, 천주교(로마 교회)는 동쪽,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1612-1645)와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유입되었다. 1885년 4월 인천으로 언더우드(미 북장로교)와 아펜젤러(미 감리교)가 첫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개신교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황해도 솔래에 예배당이 세워져 있었다.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 목사의 조선어 성경 번역을 도왔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를 개척했다. 서경조는 1907년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중의 한 위인이다. 감리교는 1901년에 김창식과 김기범이 안수를 받았다.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로만 설명할 수 있다. 이 일에는 일본에서 회심한 조선인 이수정의(1883년 세례, 장로교 선교사 존 녹스) 선교요청편지와 성경번역(1884년 마가복음 번역)에 있었다(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3월호). 인도 등 드러난 아시아를 계획했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선교 지역을 전환하여 입국했다.
조선은 198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국하여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존속했다. 1893년 ‘장로회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고, 1901년 한국 대표도 포함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확대했다. 1901년 평양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독노회로 7인의 목사 안수와 함께 조직되었다. 1912년 9월 7개 노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고, 1922년에 헌법을 제정하였다. 1938년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신사를 참배했다. 평양신학교는 자진폐쇄했고,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개신교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시켰다. 신사참배 반대도 1945년까지 전개되었다.
개신교는 초기에 난관에 부딪힌 사역이 1907년 장대현교회 평양대부흥을 시작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국가관, 신학 등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내면의 차이를 갖고 있었다. 친일, 자유로운 성경 이해, 신사참배 거부 등이다. 일제강점이 끝나자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재건파(출옥성도)와 복구파(기존교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946년 부산에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51년에 고신파가 단죄되었다. 1947년 51인 신학생의 진정서로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모세오경의 저작을 부인하는 김재준 신학을 거부하며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시작했다. 1959년 WCC 가입문제로 반대하는 합동(승동교회), 통합(연동교회)으로 분리했다. 친일적 교회는 반미 진보성향과 친미 보수성향으로 분화되었다. 기장을 '반미 진보'성향으로, 통합을 '친미 진보'성향으로, 합동을 '친미 보수'성향으로 말하고 싶다. 마지막은 '반미 진보'성향으로 정치,사회적 관점으로 분류해 본다. 친미와 반미를 나누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이후로 장로교회는 여성안수, 이신칭의 수정(윤리강조) 등으로 신학적 분화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한국 장로교는 정부에서 인가한 대학교가 약 20여 곳이 있다.
'고 목사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설]양을 위한 목자를 찾습니다. (0) | 2014.07.17 |
---|---|
맥추감사주일 (0) | 2014.07.06 |
4 덕 (0) | 2014.05.10 |
[스크랩] [목회칼럼] 장로교의 이해(3) (0) | 2014.05.10 |
[목회칼럼] 장로교의 이해(2) (0) | 2014.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