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독서(10) 하나님의 지식의 가능성과 목적, Inst., I, 5, 6-10.
칼빈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묵상에서 한 하나님께서 만유를 통치하심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며 기도해야 함을 제시한다. 비록 우리 안에 신적인 성품이 있어도(divinitatem), 복의 근원이신(Author) 하나님의 보좌로 향해야 한다.[T.아퀴나스는 신성이 됨을 목적지(terminus)로 삼았다. 유대칠, T.아퀴나스의 요한복음 14장 독서에서] 또한 명백한 하나님의 권능을 알며(천지창조)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었다. Inst., I,5,6.
둘째, 하나님의 사역은 자연의 통치이다. 자연과 인간을 다스리심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친절과 복을 주시지만, 의인에게는 관대함으로 악인에게는 엄하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벌하시고, 선한 자를 보호하시며 변호하시어 충만하게 하며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심이 명확하다. 악한 자에 대한 징벌이 연기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회상할 기회가 된다. Inst., I,5,7.
시편 기자(시 107편)는 자신의 절망의 늪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환난과 곤란에 쌓인 환경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providentiae coelestis)에 있는데, 당사자는 부성적 관용을(vero paternae clementiae) 증거하는 노래로 승화시켰다. 경건한 자는 여기에서 위로와 기쁨을 얻고, 불경건한 자는 태평성대에서 불평과 욕망을 토해낸다. 창조의 눈부신 극장(illustri theatro)에서 눈이 먼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눈부시게 창조에서 빛나지만, 이를 본 사람은 백에서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어두움에 있지 않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불경건한 자의 악함과 교만과 탐욕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지혜가 있어 자기 궤휼에 빠져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Inst., I,5,8.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 단순한 두뇌의 지식이 아니라, 정당한 지식이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어 결실을 맺는 지식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탐구 혹은 파악할 수 없다(non possumus, 아우구스티누스). 공상(empty speculation)의 하나님은 인간이 그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Inst., I,5,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경배하게하며 내세의 삶에 대한 소망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자비와 엄하심이 현세에서 시작이어서 불완전하지만, 내세에는 완전히 밝히 드러나 알 수 있다. 현재에 하나님께서 아무도 벌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윗처럼 환난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Inst., I,5,10.
형설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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