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호남문화론

형람서원 2012. 12. 3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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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문화론

 

고경태, 010-8525-0288

 

  [호남, 호남인관과 호남문화론] 김동수 의 글을 읽으면서, 본 논문은 [나는 호남인이로소이다], 이종범 교수(조선대박물관장)가 편집한 저술에 포함된 논문입니다.

 

2012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호남인에 대해서 한 번 간략하게 써봅니다.

 

  2012년 대선의 결과를 보면서 호남과 영남의 확연한 구분은 단일 민족에서 두 생각을 지닌 전형적인 예로 보여졌습니다. 이에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은 두 호남과 영남의 각축장인 것 같습니다. 남과 북이 분열되어 호북 세력이 없기 때문에 양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호남과 영남 그리고 호북의 삼파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단일민족으로 단일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유럽이 봉건국가에서 단일국가로 형성되 때에도 봉건국가의 특징을 없애지 않은 지방분권형 공동체(연방국가)가 형성되었지만, 대한민국은 과거 삼국시대에서 통일되어 줄 곧 한 국가를 이룬 단일민족 단일국가의 형태입니다. 그럼에도 지방별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호남인으로 호남에 살면서도 호남안에서도 마을별로도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어 대한민국의 한민족 한문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주시 신창동 일대에서 구석기 문화유적지가 발견되어 발굴 작업을 하였습니다(1992년 572번지 일대가 사적 제 375호로 지정). 세계적인 특징을 가진 유수한 문화유적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습지유적지로 농업에 대한 다양한 흔적을 가진 유적지로 호남문화에 대한 대단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신창동 유적지는 1963년 이래로 꾸준히 유물이 발굴되는 대단위 유적지로 대단한 고고학적 가치를 갖습니다. 신창동 일대가 택지개발되어 유적지가 묻혔을 가능성도 있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신창동 유적지는 백제 시대 이전의 역사의 유적이 있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과거를 탐구한다는 것처럼 의미있고 확실한 탐구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 역사가 백제 역사를 왜곡했는데,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창동 유적지에는 비단 조각이 발굴되어 그 당시에 이미 귀족계급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농업기술과 보관기술도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창도 유적지로 호남의 상황을 추정하자면, 영산강을 중심으로 풍성한 농업의 부산물로 다른 지방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측은 호남의 민심에 대한 억측(?)에 대한 것입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호남(전라도)의 특징을 간사함을 숭상하며, 나쁜데에 쉽게 움직인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김동수 교수는 이중환이 호남을 답사하지 않고 탁상에서 내린 결론으로 평가에 대해서 부정했습니다(호남인과 호남문화론, 34-35). 김동수 교수는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이 박정희 정권때에 생성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과거에는 호남이 소외된 흔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32-33).

 

   그렇다면 호남의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 있고, 호남의 남성과 여성은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호남의 남성은 호방하고 의(명분)를 추구한다. 호남의 여성은 현명하고 내실이 있다. 이러한 에피소드로 영화 [황산벌]에서 역사에서 보여준 모습과 다르게, 전라도 여성인 아내와 전라도 남자인 계백에서 볼 수 있다. 칼을 든 의의 장군인 남편에게 거시기하게 멘트를 날리는 현실적인 여인(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호남 남성의 의(義)는 역사가 증명한다. 고려시대에 삼전도의 마지막 항전지인 진도, 조선시대의 유일하게 정복되지 않은 땅 전라도, 조선말기 최후의 의병이 있었던 곳도 전라도이다. 전라도를 방어한 것은 바다로 이순신 장군이 있었지만, 육로인 금산과 진주를 방어한 것은 전라도 의병을 중심으로 한 혈투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에 호남의 선비들은 국가와 명분을 위해서 기꺼이 책을 놓고 칼과 활을 들었다. 조선시대 선비의 성품, 온전한 인격인 호연지기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왜란 후에 왕인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박해, 김덕령 장군에 대한 박해를 하였다. 호란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호란을 참전하기 위해서 고산 윤선도는 의병을 이끌고 북진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의 소식을 듣고서 제주도로 은둔하려는 도중에 보길도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의의 고장에서 실패해버린 3.1운동에서 숨죽인 일제강점기에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 3일)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그리고 부당한 군사구데타에 항의하고 저항한 1980년의 5.18 민주항쟁에서는 의의 고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호남은 박정희 정권 이래로 끊임없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다. 최초로 호남인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편파적인 호남치중 정책은 펴지 못했다. 그리고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에서도 균형적인 호남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호남의 민심은 상당히 이반되고 공황상태에 이르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다시 한 번 지지했지만 무참한 패배,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의 패배는 큰 상실감을 주었다. 왜 호남은 이러한 정신을 갖고 있는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거의 동일한 생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은 반대급부로 영남도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왜 한 민족에서 전혀 다른 역사관과 정치관이 형성되는가? 

 

    필자의 결론은 백성이 추구하는 것이다. 호남의 민중은 "의"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호남사림의 의의 정신, 5.18 민주항쟁의 숭고한 정신이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서 왠지 씁쓸하다. 호남의 인재들은 중앙의 무대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호남의 내부에서는 힘든 경제적 상황에서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호남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와 역사를 지킬 경제적인 능력도 약하다. 

 

     이러한 호남의 정신(문화)는 의의 정신의 반대급부인 "비판정신" 때문으로 보인다. 2012년의 대선은 통합이 이슈인 것으로 보였다. 역사도 경제도 아무것도 필요없고 모든 사회계층을 통합할 수 있느 것이었다. 호남은 비판정신이 강해 통합하는 힘이 약하다. 건전한 비판이 발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인격에게 어떤 모습의 비판은 모두 공격이 된다. 어느 지역에도 훈련받은 인격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비판은 발전에 대한 모색이 아닌 분리 혹은 공격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비판의 고장인 호남에서도 동일하다. 내가 비판하지만 비판받을 때에는 공격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호남의 문화에서 의의 정신은 매우 숭고하고 도전적으로 받아드린다. 조선의 선비들의 호연지기, 책을 읽은 서생이 아닌, 말과 활 그리고 무술을 연마하는 전인격적인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인 인간인가? 그러나 비판을 가하고 비판에 그치고 통합하지 못하고 협력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호남의 사람이고, 호남에 사는 사람으로 호남의 문화가 보존되고 밝혀지고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호남이 후진된 지역으로 주어진 특혜가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유적들은 보존하고, 또 문화 역사 유적들을 발굴하여 호남 지역에 바른 문화관이 형성되어 호남인의 바람직한 인간의 기질이 형성되길 기대합니다.

 

2012년 12월 31일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10시 경에,,,

무등산 아래에서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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