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바울종교의 기원] 제 6 장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형람서원 2012. 11. 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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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211-251/번역본 266-319)

고경태 목사

 

메이첸은 5 장 “유대적 환경”에서 바울의 종교는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의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메이첸은 바울의 종교의 기원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서 불가능하자, 다른 대안으로 이교 세계에서 근원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탐구를 시작한다. 바울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헬레니즘의 이교사상에서 찾는 가설이 있기 때문이다.

 

브뤽크너(M. Brückner)는 바울의 기독론이 유대적 메시아 개념(메시아의 겸손에 대한 에피소드)을 인정하면서도, 이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브뤽크너가 바울의 종교를 이교에 근원을 두는 것은 종교사학파(school of comparative religion,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와 동일하다. 바울 종교의 기원을 역사적 예수(묵시문학)와 이교에서 찾으려는 종교사학파의 견해는 만장일치가 되어 합의가 될 수 없는 근본자료로 갖고 있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로마의 토착종교: 헬라에 기원한 다신교] 바울 시대는 로마 제국에 의해 정치가 통일된 시민 세계였지만, 토속종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정신은 헬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헬라의 영역의 종교의 신들은 로마의 신들과 대치되었다(예, Zues - Jupiter, Aphrodite - Venus).

호머(Homer) 시대 이전에 헬라 종교는 발전했었다. 호머의 시로 본다면 헬라의 종교는 전적으로 발달된 다신교였다. 호머의 시는 귀족 사회의 작품이며 사회 질서가 잘 정립된 상태로 추측된다. 호머의 작품에서는 당시의 종교의 근본이 잘 표현되어 있다.

호머의 시로 단정하자면, 헬라인의 종교는 철저한 다신교였고, 신들은 인간적인 남녀로 인간보다 힘이 있지만 정의롭지는 못했다. 이러한 헬라 종교에는 예술에 대한 자극이 숨어 있었다. 의인화(Anthropomorphism)는 시인, 조각가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숭배를 받아야 될 신들은 도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헬라의 신들이 정열과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탁월한 도덕은 제공하지 못했다. 신들의 도덕성은 일반세계보다 못했다.

 

[디오니소스 숭배] 당시의 종교는 헬라나 로마도 동일하게 국가적인 형태였다. 당시 종교는 신비적인 요소가 없었고, 신들은 인간과 닮았었다. 또한 신들과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소수의 영웅들에게는 가능했다. 이러한 헬라 종교에서는 신들과 신비적인 접촉이 강조되지 않았다. 신과 접촉을 주장하는 종교는 밀의종교(mystical religion)이였다. 헬라 종교에서 밀의적이고 열광적인 성격은 디오니소스(Dionysus) 숭배와 관련되었다.

첫째, 디오니소스 숭배에서는 신과 직접적 교제가 있었다. 음악과 춤을 통해서 신적흥기(divine frenzy)를 일으켜 신과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둘째, 디오니소스 숭배에서는 사후의 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호머에서는 사후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그림자로 표현하였지만, 디오니소스에서는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이다. 셋째, 디오니소스 숭배는 종교를 국가에서 분리하여 개인적인 인간을 만들려 한다. 메이첸은 열광주의가 발생하려는 반드시 개인주의가 되어야 하여 국가 종교에 걸맞지 않다고 했다. 또한 신들린 경험자들은 자신을 일반 시민들과 구별하는 성향이 있었다.

 

[오르페우스 종파와 피타고라스 종파] 헬라 공동체에서 신화적 음악가이고 점성술사였던 오르페우스와 관련된 오르페우스 종파가 있었다. 이 종파는 기원전 6세기에 발생된 것으로 추측되며 디오니소스와 관계가 유지되었다. 혹 디오니소스 종파에서 재형성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사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보상과 형벌), 전생, 윤회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이 오르페우스 종파는 피타고라스(Pythagoras)를 스승으로 둔 공동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두었다. 오르페우스와 피타고라스는 헬라 국가와 별개로 올림푸스의 신들을 숭배하여 힘을 부여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에레우시스 밀의종교] 에레우시스 밀의종교(the mysteries of Eleusis)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3Km의 거리에 있는 도시 에레우시스에서 행해진 데메테르(Demeter) 숭배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원전 7세기 경에 에레우시스가 아테네에 의해서 정복될 때에 데메테르 의식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정복자에 의해서 더욱 발전했다. 이 종교의 특징은 종교적 의식의 비밀(mystery-cult)이다. 이 밀의종교는 고대시대가 끝나는 10세기 동안 헬라에서 꾸준히 활동하였다.

이 밀의는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아테네 근교의 아그레(Agrae)에서 “소밀의(lesser mysteries)”, 다음 해 가을에 에레우시스에서 “대밀의(great mysteries)”로 다음 일 년 후에 “신비적 환상(mystic vision)”으로 되었다.

데메테르 종교는 농경의 풍성을 기원하는 것으로 숭배대상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이다. 밀의에서는 불사의 보증도 제공되었다. 에레시우스의 밀의는 헬라에서 유일한 밀의종교는 아니었다. 사모드라게 섬에서 카베이리(Kabeiri on the island of Samothrace) 밀의종교가 있었다. 에레우시스의 밀의종교는 체계적인 교리를 갖지는 않았다. 그들의 종교는 지성이 아닌 감성과 상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헬라의 종교는 도시 국가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의인적 다신교로서 신적으로 직접적인 접촉과 개인적인 특별한 복을 수여받기 위한 것이었다.

 

[헬라 종교의 쇠퇴] 헬라 종교는 최소한 세 가지 결정적인 이유로 쇠퇴하였다. 첫째, 철학이 신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였다. 헬라 종교의 기반에서 헬라 철학이 강하면서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원리를 탐구하면서 신화가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헬라 종교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국가의 멸망으로 중대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셋째 동방의 많은 종교의 등장이 강력한 영향이었다. 올림프스가 무너질 때에 그들은 다른 정신과 마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특징과 붕괴] 알렉산더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가 헬레니즘 시대이다. 헬레니즘 시대는 첫째, 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이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인종적 장벽이 무너지고 언어(Koine)가 통일되었다. 로마 제국에 의해서 정치제도가 통일되었다. 도시 국가에서는 통일된 정치가 아닌 개인주의가 용납되었지만,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숭배가 이루어졌다.

황제숭배를 기독교에서는 거부하여 정치적인 반역의 위치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일종으로 보았다. 당시의 유대교는 로마에서 공인된 종교(religio licita)의 위치를 확보했었다. 황제숭배의 선전(religious propaganda)은 종교의 신들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활동에 장벽은 되지 않았다. 다른 종교들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의 신을 더 받는다는 것이 본래의 신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헬레니즘의 시대는 탁월한 혼합종교(syncretism par excellence) 시대였다. 모든 민족 신들은 위대한 신성(great divinity)으로 융합하여 “아풀레이우스의 변모(Metamorphose of Apuleius)”할 수 있었다. “변모”에서는 모든 여신들의 총합으로 애굽의 여신인 이시스(Isis)로 융합시켰다. 여신들은 모든 신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헬라인들의 황금시대에는 인간이 최종 목표로서 인간의 능력을 즐겁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헬라인의 영광스러운 업적은 애석하게 실패했다. 아네테는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정복되어 몰락되었다. 헬라의 멸망에 대해서 머레이(Gilbert Murray, Four Stages of Greek Religion, 1912)는 “신경쇠약, a failure of nerve”라고 표현했다. 즉 국가의 몰락과 함께 종교적 영역에서 속죄의 갈망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성 외부로의 도움을 통한 구원에 대한 욕구가 발생했다. 즉 인간성에 대한 재고가 일어난 것이다. 헬라의 멸망으로 헬라의 휴머니즘의 변화가 발생했다. 언제나 풍족하고 기쁨의 휴머니즘을 대신해서 신의 은혜를 기대하는 휴머니즘이다. 모든 일의 기초를 인간에 기초하지 않고 신에게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신경쇠약”이 역사철학자로 높이 평가된다할지라도 헬라의 속죄사상은 헬라종교에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신을 탐구하였지, 기독교적인 속죄나 구원에 대해서 염두하지 않았다. 즉 종교사학파적인 개념을 도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철학이 고대 신들을 몰락시켰는가? 메이첸은 부정했다. 철학이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높은 세계를 추구하며 에로스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또한 에피크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윤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세기와 20세기가 유사하다. 이론에 대한 불신, 신학에 대한 멸시, 사회적 실천적 문제에 대한 독점적 관심은 헬레니즘과 현대가 동일하다. 이러한 현상에서는 지식이 퇴보했다.

 

[헬레니즘에 융합되는 동방종교] 헬레니즘의 몰락에 동방의 여러 종교들이 침투하여 혼합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학자 포시도니오스(Posidonius)는 동방의 밀의종교를 스토아 철학에 도입시켰다. 이것은 후기에 신플라톤주의로 발견되며, 철학과 허풍(charlatanism)이 혼합되어 정점에 이르렀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 학파는 인류 형제애를 위해 대원리를 제시했다. 즉 세계시민주의(세계동포주의, 사해동포주의 cosmopolitanism)와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다. 노예를 소유물(chattels)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하는 인도주의에서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스토아 학파는 이론을 세우고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는 어느 정도를 성취했다. 바울에게 나타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스토아 저자의 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바울은 스토아 학파의 인도주의적 관점이 아닌 그리스도와 구원관계에서만 만인이 형제가 됨으로 양자는 서로 다르다.

 

[동방 밀의 종교의 진군] 바울이 전도하는 지역에는 이미 동방의 밀의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다신교의 사상이 남아 있었다. 동방의 미신과 밀의종교의 범람으로 세계화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의 사역으로 로마에서 기독교가 동방의 밀의종교를 꺾고 대안종교로 부상하였다. 밀의종교는 일반인들이 다른 종교와 아무런 갈등이 없는 강점이 있었다.

 

[최고의 밀의 종교 키베레(Cybele)] 밀의 종교의 최고는 프리기아의 키베레(여신으로 신들의 위대한 어머니) 종교이다.

로마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아티스(Attis) 키벨레의 남편의 대축제의 절차: 3월 15일에 예비 축제, 3월 22일에 덴드로포리(Dendrophori)가 키베레 신전에 소나무(아티스)를 나무를 운반한다. 나무를 베는 것은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3월 24일에 죽은 아티스를 애도함의 절정으로 자해를 하면서 애도한다. 3월 25일 야간에 신의 부활과 현현이 이루어진다. 이날은 힐라리아(Hilaria)로 환희의 날로 신의 부활을 축하했다. 3월 26일은 안식일이고, 27은 성상과 성체의 장엄한 수세식이 거행되었다. 키베레와 아티스의 관계는 밀의였지만 제의는 공개적이었다. 이 제의는 로마 전에 동방에서 이미 거행되고 있었다.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은 황소의 피로 죄를 사함받는 상징적 의식으로 4세게 정도에 정착된 의식이다. 2세기 이전에는 어떤 타우로볼리움의 자료가 없다. 즉 타우로볼리움의 죄사함의 방식에서 기독교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애굽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이시스와 오시리스(Isis and Osiris)의 숭배는 헬라보다 훨씬 고대에 애굽에서 시행했었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를 통치하는 통치자였다. 기원전 300년경 애굽이 프톨로메 왕국이 건국되면서 세라피스(Serapis)로 전환되었다. 즉 애굽적 요소와 헬라적 요소가 융합되어 정치와 교묘하게 연결된 종교로 면모했다. 이시스와 세라피스는 명확한 신학 체계나 고매한 윤리가 아닌 거대한 의식으로 효과를 거두었다. 이 종교는 미트라(Mithras)와 융화되어 기독교의 최강의 적수가 되었다.

 

애굽의 오시리스는 페니키아의 아도니스(Adonis)와 유사하다.

아티스, 오시리스, 아도니스는 여신의 상대의 남신으로 죽음과 재생이 되는 점에서 유사하다. 브뤽크너와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구도가 기독교의 부활 개념의 근원으로 표현했다. 아티스는 부활은 없고 기쁨만 있고, 오시리스에게도 부활은 없고 죽은자를 지배하고, 아도니스는 신의 죽음과 중생의 찬미에 관한 최상의 설명이다. 통설에 의하면 세 신은 식물의 신들로 해마다 싹이 돋아는 생명력의 원리로 복과 농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양한 밀의 종교는 소아시아와 애굽에서 발흥한 것이었다. 시리아의 종교는 바알(Baals)이다. 바알과 상대인 여신이 있었지만 명확하지 않다. 시리아의 종교는 부도덕했지만 페르시아의 천상 존재(heavenly bodies)를 숭배와 태양 유일신교의 형태 사상을 도입하면서 향상되었다. 이 개념은 제국에서 기독교가 승리하기 전까지 가장 유력한 종교였다.

페르시아의 밀의종교(Persian mystery)는 어떤 종교보다 우수했지만, 바울에 의해서 몰락하였기에 바울의 종교 연구에는 중요하지 않다. 미트라교는 명확한 윤리성, 선과악의 투쟁 교리 등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미트라교는 이시스교와 함께 기독교의 최강의 대항자가 되었다.

 

바울 시대의 종교의 특징은 제사의 허용 문제가 아닌 무한한 융합이었다. 종교와 종교를 넘어, 철학과 종교까지 융합되었다. 그런데 난점은 보도자료의 연대가 늦다는 점이다. 동방 밀의종교에 바울의 기원을 제시하려면 바울 시대보다 훨씬 이후의 자료에 호소해야 한다. 300-400이 지난 자료에 근거해서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현대종교사학파에서 이교에서 영향을 받은 기독교라고 할 때 이렇게 답을 낼 수 밖에 없다. 첫째, 기독교 이후의 이교적 답습이 어느 경우에도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둘째 기독교와 일반종교가 너무나 유사할 때에 유사성을 인정하면 안된다. 셋째, 이교적 관습은 기독교 관습에 의존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이교적 관습에 의존한다.는 규정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비록 자료의 연대는 기독교 보다 후대의 작품이지만, 그 사상은 꼭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세운다.

 

메이첸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배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이교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제시했다. 기독교의 회심에는 이전의 믿음을 열정적으로 폐지하는 것을 갖고 있다. 바울의 개종은 이러한 개종이다. 또한 문헌상의 후대의 저작으로 역사적 전 단계로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타우로보리움이 한 예로, 4 세기에 형성된 종교의식에서 기독교의 피의 죄사함의 방식의 근원으로 제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독교 이전의 밀의 종교] 기독교 이전에 헬라에 있었던 밀의 종교로 기독교를 재구성할 수 있는가? 그러나 고대 저작들의 연대기는 매우 불확실하다. 종교사학파에서 주장하는 어떤 문서도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헤르마스 문헌] 최근에(1930년대) 헤르마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서는 14세기까지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서가 기원후 300년경에 완성되었다는 의견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없다. 그 중에 있는 포이맨드레스(Poimandres)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크놀(K. Kroll)은 헤르메스 문헌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포이맨드레스(Poimandres)가 가장 후기 작품으로 놓고 2세기 후반 이전의 것으로 간주했다. 더우기 지엘린스키(Zielinski) 포이맨드레스가 헤르메스 문헌에서 가장 최초의 것이라고 보았다. 레이첸스타인(Reitzenstein)은 헤르마스 목자(Shepherd of Hermes)가 포이맨드레스(Poimandres)를 원형으로 의존을 입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헤르메스 문헌에 있는 여러 관념의 기원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J. 크놀, W, 크놀, 레이첸스타인과 여러 학자들은 헤르메스 문헌의 기원을 기독교로 보는 경향을 강력히 거부했다. 반면 하인리치(Heinrici)는 통설에 반대했고, 이에 빈디쉬(Windisch)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빈디쉬는 기독교가 동방 종교로 영향을 받은 중간형태로 제시했다. 헤르메스 문헌에 대한 하인리치의 논제는 “(1) 헤르메스 문헌은 신약 시대 이후이다. (2) 저자는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다. (3) 헤르메스 문헌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이다.

메이첸은 헤르메스 문헌을 통해서 기독교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에 대해서 문헌의 연대기를 근거로 거부하였다. 오히려 헤르메스 문헌에는 다양한 기독교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포이맨드레스(Poimandres)와 바울의 복음] 혹자들은 바울의 신비로운 영적 분위기를 포이맨드레스(Poimandres)에서 찾으려 했었다. 비록 포이맨드레스(Poimandres)와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어떤 체험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이 있다할지라도, 메이첸은 포이맨드레스(Poimandres)를 환상적인 사변으로, 바울의 역사적 복음으로 날카롭게 대조시켰다. 헤르메스에서 최종목적은 ‘신화되는 것’이지만 바울에게서는 ‘인격적 관계’ 뿐이다. 바울이 신비적 기독교(the Christ-mysticism)이지만 결코 범신론적 신비는 아니다. 초자연적이지만 생활을 변화시킨 어떤 영향력이 아니며, 신격화의 변화가 아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이다.

메이첸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Hermas Trismegistus)와 오라큘라 칼다이카(Oracula Chaldaica)을 비교했다. 이 문헌의 저작시기를 W. 크놀은 기원후 200년경으로 추측했다. 크놀은 여기에서 기독교적 영향은 없고 주변에는 유대교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기원후 200년의 문헌을 근거로 바울의 종교 기원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헬라의 Magical Papyri] 매직 파피루스(Magical Papyri)를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는 학자는 데이트리치(Dietrich)와 레이첸스타인(Reitzenstein)이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 주술의 관련된 문서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주문으로 구성한 자료가 Magical Papyri이다. 데이트리치(Dietrich)와 레이첸스타인(Reitzenstein)는 파피루스에서 미트라(Mithrsa) 종교의 제식문과 유사성을 제안했다. 동방의 밀의종교와 이집트의 종교가 융합하는 좋은 문서이기는 하지만, 파리루스 사본은 기원후 4세기 초에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헤르메스의 문헌처럼 바울의 복음과는 다르다. 파피루스에서는 신성합일사상을 유지하고 있다.

 

[영지주의(Gnosticism)] 기독교 이전의 이교에서 기독교와 관계된 분파는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이단(heresy)이다. 메이첸은 2세기의 영지주의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제시했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되었지만 자료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하였기에 기독교 근원으로 밝혀진다면 훨씬 덜 위험할 것이다. 그래서 문서를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 이전의 문서를 재구성하지 못했다. 현존하는 영지주의 문헌은 기원후 2세기 말과 3세기 초엽의 것이다. 메이첸은 이러한 문헌과 바울 신학을 비교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였다.

 

[필로] 기독교 이전의 또 다른 연결점으로 바울 이전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를 제안했다. 그러나 필로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무런 성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바울이 필로를 의존하고 있다는 입증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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