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 장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애굽의 공주의 아들, 즉 왕자로서 지위, 궁궐보다 종인 히브리 사람을 더 사랑한 모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결국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미디안 족장의 딸인 십보라라 결혼하여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습니다(출 2:16-22).
40년 동안 모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요? 아마도 모세는 광야에서 애굽의 왕자도 백성을 지도하는 꿈도 모두 포기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아프고 눈물 나는 것인지 잃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의 침묵의 기간을 지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념했습니다. 애굽의 왕자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도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조상의 하나님에 대한 신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에 대한 신비가 끊임없이 모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세를 항상 붙들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40년에서 끊임없이 질문한 것은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탐구에서 우연히 호렙산에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게 됩니다(3:2).
모세는 그 현장에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였습니다(3절). 3절에서 “큰 광경”은 “정말로 이상한 광경”이란 뜻입니다. 자기의 눈으로 보고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장소에 가서 직접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불꽃너머에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셨습니다(4절). 그리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꽃에서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신원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가셔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 2:23-25절). 백성들은 신음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지도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버린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에 대한 전혀 미련이 없고, 고통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고통에서 풀려나기를 갈망하는 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서 지도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힘든 상황에서 구출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열망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직 양치기로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모세에게 있는 것은 광야의 시간, 하늘과 땅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온전히 탐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궁금한 것은 그 조상의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조상들은 온전한 믿음의 대상을 갖았지만, 그 이름은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밝히 계시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얻고 싶은 것은 결국 그것, 하나님의 성호였습니다.
3장에서 ‘하나님’과 ‘여호와’가 등장하는데, 모세가 인식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부름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모세는 자기에게 들려지는 음성을 ‘여호와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4장에서는 ‘여호와와 모세가 대화’를 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고통에서 탈출입니다. 애굽 땅이든지, 광야든지, 가나안이든지 고통에서 해방되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이 만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지옥이요 있을 곳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백성입니까? 선택된 백성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지도자입니까? 그렇다면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현재의 문제가 개선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고난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고난에서 여호와께 구원을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은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은 구원받을 때 잠시 뿐이었고, 사흘이 되기 전에 원망을 하였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을 했을까요? 부르짖음의 목적이 고난에서 탈출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문제해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중에서 부르시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찾는자 모세를 부르시러 광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모세는 고난에서 구출을 목표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조상의 하나님의 신비에 착념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의 영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모세를 배반하고 오히려 죽이려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에게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일하십니다. 430년 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직 가나안 7족속의 죄가 관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30년이 지난 후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주인을 세우실수도 있고 쫓아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가 관계중심의 사회, 휴먼네트워크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갈 4:4). ‘때’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백성의 부르짖음에도 역사는 열리지 않습니다. 혹 사람들이 부르짖지 않아도 되겠네..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헛된 질문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영적 능력을 배양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기를 분별하면서도 영적인 때를 모르는 제자들을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는 분명히 때를 알리십니다. 그 때와 시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시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아이티의 대지진이, 북극으로 바닷길이 열리고, 전쟁은 끊이지 않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갈등은 계속되고,,, 이러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망 혹은 부르짖음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할 사역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의 명령을 따라 어디든지 가는 사역자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따르지만, 사역자는 동역을 합니다. 백성은 원망을 하지만, 사역자는 백성을 위로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백성은 소극적이지만, 사역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입니다.
때가 차매, 백성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된 사역자, 부름 받은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무엇으로 부르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고통의 해소를 위해서 부르짖는 백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부름을 받았거나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오직 구원하신 하나님, 주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탁월한 진보와 열매가 맺히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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