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교 리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 정신의 근본 원리를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쉬지 않는다. 이러한 맹렬한 공격에서 오히려 진리의 탐구에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한다.
전통적 용어의 사용에서 구종교와의 외관상 일치를 포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광명에 대한 열정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전통적 용어가 삭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자유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교리 등은 하등의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교리나 기독교의 교리의 해설은 현대에 있어서는 하등의 흥미를 야기할 수 없다. 신조라는 것은 기독 신자의 귀일적 체험의 변화무쌍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신조가 그러한 체험을 표현한 것이라고만 하면 모두 동등하게 정당한 것이다. 그런고로 자유주의의 교설은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와는 최대 한도로 분리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양자는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교리』에 대한 현대의 반항은 결국 특정한 교리로서 전통적인 교리에 반대되는 교리를 창조한다. 즉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인이 모두 형제라고 하는 것”이 자유주의 교리이다. 다른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신한체계를 반대해야 한다. 반대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시작한다. 메이첸은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인 ‘불가지론’으로 제시한다. 자유주의 둘째 교리는 “기독교는 생명이며 교리가 아니다.”이다. 자유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이 전통적인 법률을 제정하거 수정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그 공동체의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재정립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관점에서 여전히 “크리스챤”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 기독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가 죽으신 수일 후에 기원한다. 예수의 죽으심 전은 예비적 단계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기원은 ‘생명’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근거한 ‘생명의 길’이다. 즉 ‘교리에 기초를 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 자체, 복음이 전파됨에 관심을 두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가르침에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바울의 교리와 유대파 교사들의 교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 교사들과 바울의 가르침에는 일치점이 많이 있었지만 바울은 일치점(예수의 메시야됨, 그리스도의 고상한 인격, 부활)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점(율법을 준수하는 노력을 보충해야 됨)으로 인해서 전체를 거부하였다. 바울의 종교와 유대파의 기독교는 전혀 다른 두 종교가 된 것이다. 만약 바울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근거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공로 없으나 주의 피가 나를 속했네”라는 찬송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확실히 바울이 변호한 기독교는 유대파 기독교가 아니었다. 교리가 배제된다면 바울의 가르침도 배제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예수의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과 근본적인 일치가 확인되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단순환 회상은 오히려 슬픔과 회한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운동의 시작의 근원은 역사적 복음 즉 ‘부활’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복음에서 능력을 부여받았다. 속죄의 복음은 기독교의 진수이다. 반면 자유주의 종교에서 예수는 속죄 종교로서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교회에서 망각되었다가 현대에 다시 발견된 하나의 단순하고도 비교리적인 종교의 창시자이다.
기독교는 역사와 교리의 두 요소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으셨다(역사)’,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교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역사)’
‘주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바치셨다(교리)’이다.
[예수의 메시야 의식] 현대 자유주의에서는 예수의 메시야 의식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였다. 예수는 어째든지 자신이 메시야라고 선언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제자들이 사후에라도 예수의 메시야됨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제시하지만, 예수께서는 “나는 말한다”로 말씀하신다. 마 7:21-23절에서 예수의 모습은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겸손한 정의의 선생’이 아니라 ‘영원한 구별을 결정하는 심판장’으로 제시된다. 산상보훈까지에 들어있는 예수에 대한 신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윤리적 부분만을 주장하는 것은 억측이다.
첫째, 우리는 교리가 건전하면 생활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견유학파아 스토아 학파는 사회를 개조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독교는 인간 생활을 혁신시켰다.
둘째, 기독교의 교리적 기초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교리의 모든 조항이 동등하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천년설(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함)을 부정하는 메이첸.
성례식의 효과에 대한 의견. - 마르부르그 회의(1529년)
목사직의 성질과 특권에 대한 의견(사도직 계승의 승인인 안수)
개혁파의 신학과 알미니우스의 신학(복음의 협동이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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