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06] 사도행전 2:37-47. 초대교회 - 더 해지는 교회

형람서원 2007. 9. 10.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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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06] 사도행전 2:37-47. 초대교회 - 더 해지는 교회


제목: 초대교회 - 더 해지는 교회

내용: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백성이 3,000명이 더해졌습니다. 교회는 가르침, 교제, 성찬과 기도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재산이 공유되고, 성전에 모이기에 힘쓰며, 식탁 교제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음으로 주께서 백성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37-39절) 백성들의 회개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죄사함, 세례를 받으라.


    37.They were pricked in heart.

       성령의 능력은 방언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찔림(cut to the heart)을 주었고, 베드로의 설교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가인과 유다는 마음에 찔림은 받았지만, 절망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마음과 겸비한 심령을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가 됩니다. 악한 자의 양심은 양심의 가책(찔림)에 불안이 있고, 선한 자의 양심은 양심의 가책에서 신뢰와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할 의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기쁜 마음으로 괴로움을 맛보려고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찔림에서 유익을 얻게 된다.”


   38. Peter said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진정 알려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제자)은 가장 훌륭하시고 충실한 스승(주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는 가르침에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Repent.

      회개1)는 전 인격이 새로워지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전환을 뜻합니다(it doth signify the conversion of the mind, that the whole man may be renewed and made another man). 칼빈은 교황주의의 교리(로마교회)에 대해서 회개를 외면적 의식(external rites)-육체의 외적인 실현(the external exercises of the body)-을 비판합니다. 그것이 비록 어떤 해로움이 없다할지라도 별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this is the true repentance, when a man is renewed in the spirit of his mind)입니다. 칼빈은 베드로가 회개의 효력과 성질에 대해서 설교했을 주장합니다. 즉 설교전체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두 요소는 회개와 죄의 용서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죄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의 이름(복음의 교리의 내용)으로 회개와 죄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중보 사역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어지며 제거됩니다. 이 은혜의 완성의 보증이 세례입니다.

  칼빈은 세례를 네 번째로 위치시킵니다(He putteth baptism in the fourth place, as the seal whereby the promise of grace is confirmed). 문장은 회개, 세례, 그리스도의 이름, 죄사함의 순서이지만, 죄 사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서 회개가 시행됨으로 세례가 4번째에 위치하게 됩니다.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의 총화(the whole sum of Christianity)”라고 강조합니다. 첫째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포기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일, 둘째,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로 죄책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함으로 그의 이름이 믿음과 회개의 유일한 기초가 됩니다. [회개는 시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회개 속에서 계속 전진하기 위해서 한다.] “이제 세상에 대해서 또는 육체에 대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하여 그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기 시작해야 하는 일, 이미 회개의 과정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는 이 가르침이 명령을 굳게 지켜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령 안, 즉 내면적 회심은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으로 행위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교회의 행위(나타내고 증명하기 위함)와 개혁교회의 행위(정결함과 거룩함)는 다르다. 개혁교회는 외면적 행위는 증명 수단, 열매가 되지 않습니다.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믿음과 회개는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구원의 희망(성령의 선물)은 거저 주시는 의의 전가에서만 성립하며,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회개함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죄는 세례에서 값 없이 용서받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뒤에 지은 죄는 배상을 통하여 속량될 것이라고 한다.”2) 이것을 칼빈은 혼합주의로 인간 공로와 은혜가 썪인 것으로 비판합니다. 죄사함과 화해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기초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중심에 위치하고, 그리스도가 없는 교리는 전혀 바르지 못한 것이 됩니다. 베드로는 세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세례는 죄 용서의 증표, 양자됨의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세례의 정의를 산출할 수 없다. 그것은 베드로가 일부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In the name of Christ.

   세례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세례에서 은혜를 받으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배웁니다.

  혹자들은 세례 형식을 베드로가 바꾼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베드로의 권위, 주님이 제정하신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세례 형식이 아닌, 신비를 요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 없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성화시키는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항상 삼위일체가 있다는 것이며, 형식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Spirit.

   근본적인 것은 죄 용서와 생명의 소생입니다(Remission of sins and newness of life were the principal things, and this was, as it were, an addition, that Christ should show forth unto them his power by some visible gift.). 방언은 보이는 은사로서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목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적(방언)을 자신의 왕국을 시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임으로 일회로 끝난다(Christ meant to set forth the beginning of his kingdom with those miracles, they lasted but for a time).” 이 보이는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수여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령의 가장 큰 효력은(은사의 사용이 아닌) 우리의 믿음의 증진, 진정한 고백,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 가난과 궁핍에서 부요함으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승리하게 합니다.


   39. For the promise appertaineth unto you.

       이 약속(방언으로 증명된 성령의 수여)은 120명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자녀, 유대인, 사마리아, 이방인)에게 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기에, 약속의 능력이 먼 이방인까지 확장된다면 유대인들은 더욱 더 약속에 견고하게 서야할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과 유대인들의 불순종의 대조)

   칼빈은 이 약속이 자녀들에게(your children)에게 해당됨으로 재세파의 유아세례의 부정을 비판합니다. “할례는 자녀로 삼으신 그 권리가 어린 아기에게까지도 공유되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And to those which are afar off.

     먼 곳에 있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공간적 거리가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지적한다는 것입니다(엡 2:12).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너희로 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너희와 함께 부르신 음성과 같이, 같은 음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져 그로 인하여 먼 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포고로써 불리어졌을 때에 그들이 모두 너희들과 함께 참여 할 것이다.”로 칼빈이 의미적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 마음에 찔려 하나님의 말씀(복음)에 순종하는 자를 기뻐 받으십니다(37절).


2) 죄사함과 회개는 오직 그리스도 은혜로 주어지며,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결정이 됩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됩시다.


3)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4) 모든 장벽을 허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며, 구원의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40-42절) 제자의 숫자가 더 해짐 = 가르침, 교제, 성찬, 기도


    40. And with many

        ‘여러 말’이라는 것은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요점만을 간단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확증하고 권면’함으로 유대인들의 죄과가 쉽게 제거되기 어려운 것을 증명합니다. 사람에게 부여된 큰 권위와 허영(의복과 가면)은 순박한 사람을 기만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일을 방해합니다(마 23장 참조). 그리고 또 중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나약함과 게으름은 구원을 받음에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Be ye saved, 명령)”고 강력한 의지를 강조합니다. 자력으로는 이 세대에서 나올 수 없고, 오직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시 23편). 양들은 목자가 양의문으로 들어온 것을 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순수한 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교황제도가 얼마나 참 기독교와 다른가, 그리스도의 불성실한 적과 연결되어 일이 얼마나 위험한 흑사병인가를 제시해야만 한다.” 당시에 베드로는 제사장들이 잡고 있는 세대를 “패역한 세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칼빈은 자기의 상황과 초대교회의 상황을 일치시키는 인상이 있습니다. 로마교회를 유대교로 개혁교회를 기독교로 상응시킵니다.


   41.They, therefore, which willingly.

      베드로의 설교(복음 전파)에 3,000명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려는 신속성과 자발적인 의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3) 혹자들은 충동성이라는 부정적 견해가 있지만, 교회의 견인성 그리고 제자의 무리의 증가는 그리스도께로 접붙힘을 받음으로 교회 안에 계속 머물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에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형편에 대해서 세상의 둔감과 변덕을 지적합니다. 나는 설교자로서 많은 수가 회심하지 않고, 또 교회의 이탈이 발생함에 대해서 나의 부덕, 무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신앙의 순정성과 복음의 순정성은 세대의 패역함을 정확히 지목합니다.


   42. In their doctrine

       누가가 제시하는 초대교회는 믿음과 희생이 변하지 않았으면서, 믿음을 굳세게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을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많은 시간을 기도함으로, 성도의 교제와 떡을 떼는 일을 계속 행하며 노력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 그러나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자들은 ‘교제하는 일’을 ‘성찬의 집행’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칼빈은 거부하고 네 가지 특징으로 각 항목을 구별합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은 예배 규범(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아야 되는)을 인간들의 미신적인 조작으로써 전체가 혼합되었고,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바뀌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은 왜곡하였는데, 교회의 이름으로 이러한 것들을 은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의 순수성에 대하여 “지옥이 하늘에서 먼 것처럼, 그 가르침의 순수성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비판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쳐준 그 교리의 순수성을 받아들여 그것이 교회 안에서 풍성하게 되느냐? 아니냐?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4)

   In fellowship.

   마지막(기도) 부분은 처음(가르침)의 열매 혹은 결과입니다. 가르침을 받음으로 형제와 사귐, 하나님께로 나감을 위해서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찬은 교리에 대한 확증으로 첨가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진정으로 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만 사람들 앞에서만 그 헛된 교회의 이름을 자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질서를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도는 회중기도, 함께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는(46절) 교회의 이름을 확증하게 됩니다.



[40-42절. 하나님은..... & 나에게 주는 교훈은.....]

1)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 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구원을 받으라!, 40절).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합시다. 주의 말씀에 찔림을 받아 고침을 받아 치유와 회복이 되는 양이 됩시다.


2) 패역한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삼위일체 교리를 묵상합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해서는 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개혁이라는 미명에 죄악을 지적하는 것보다, 순수한 복음을 선포하여 이 세대를 치유하고, 교회를 개혁합니다(30절).


3) 성경 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주의 일을 행할 것입니다. 많은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있지만, 사도행전의 교회성장프로그램의 최선봉은 말씀의 권위와 가르침입니다. 말씀과 기도, 기도와 말씀을 전무할 것입니다.


43-45절) 사람과 믿는 사람

 사람들은 두려움에 쌓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함께 모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모이지 못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경외함으로 모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내놓는 헌신을 합시다.

 사람들은 잃은 것이 없이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잃으면서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43. And there came.

       칼빈은 교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발생한 ‘두려움’이 교회를 유지시키지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 그들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들로 인하여 한 순간도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중략) 두려움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조이게 하고 억제하여 그들이 감히 주(主)의 역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다.”

   Every soul, he speaketh thus by synecdoche(제유법(提喩法)). ‘사람마다’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안에 분명히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는 부분을 제유법이라는 것으로 정의하려고 합니다. 십계명에서의 제유법은 반대편 즉 말씀의 영역을 반대편까지 확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And many wonders. 여러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줌으로 두려운 생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기적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해 주는 일에 유익할 뿐 아니요, 또한 악한 자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로 그들의 광포성이 수정되고 부드러워지도록 하는 일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로 강퍅한 바로(Pharaoh, 출 8:8)를 기적으로 교육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로는 구원을 받지 못했고, 기적에 의해서 두려워하긴 했지만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교회에 대한 박해를 행동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44. And all

     Whereas I have translated it joined together, it is word for word in St Luke, Into the same, or into one, which may be expounded of the place; as if he should have said that they were wont to dwell together in one place. 초대교회는 동일한 장소에 규칙적으로 모임을 갖았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생각(consent, one heart, 행 4:32)으로 진정한 형제의 사랑을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칼빈은 재물의 교제에 대한 주의를 요구합니다. But this place hath need of a sound exposition, 재물에 대해서 자기 생각만할 때에는 시민 사회에 혼돈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재세례파). 그리고 무소유 때문에 사도들의 규율을 지킨다는 수도사(monks)들도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비록 재산이 공유되었지만 개인의 가정관리가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배려와 관심을 갖으며,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46-47절) 구제, 성찬과 애찬, 찬미함으로 백성에게 칭찬을 받음


    46. Continuing in the temple

        사도들이 비록 성전으로 간 것은 어떤 신성 때문이 아니라,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으로 가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능성이 있는 관심을 갖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계속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수가 모일 장소로서 성전을 택하여 가르침을 계속하였습니다.

        Breaking bread from house to house.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 개인생활에서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46절의 ‘떡을 떼며’는 성찬으로 보지 않고 공동 식사(식탁교제)로 이해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는 절제된 식탁을 표현하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기쁨은 식탁의 풍성함이 아니라, 형제의 모임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생활이 신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찬미할 수 없다고 규정하며, 성도들이 어디에서나 말씀을 실천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47. Having favor.

         이방인들 가운데서 까지도 칭찬(호의)을 받을 만큼 순결한 생활의 열매입니다.

        The Lord added daily.  주님께서는 성도의 근면과 충성을 헛되게 하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주께서 교회를 날마다 성장시켰기 때문에 수고와 노력이 결코 헛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약화는 “우리의 게으름 혹은 죄의 유입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에 더해지게 됩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는 죄의 용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의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40-42절. 하나님은..... & 나에게 주는 교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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