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08] 사도행전 3:11-26.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의 설교

형람서원 2007. 9. 1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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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08] 사도행전 3:11-26.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의 설교


제목: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의 설교

내용: 솔로몬의 행각(called Solomon's Colonnade, called Solomon's)에 많은 사람이 모이자, 베드로는 기회를 활용하여 복음을 설교합니다.


12-16절) 

    11-12절) 설교의 도입

    13-16절)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을 받으신 예수를 증거함.


    12. Men of Israel

        설교을 들어가면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베드로가 책망한 것에 대해서 칼빈은 “당신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려야하는데 왜 우리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바라봄으로 책망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때에도 칼빈은 책망의 원인을 막연한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주의를 기우려서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성자들에게 신앙심(the godliness of saints)을 돌리는 것을 비판합니다.1)


   13, 14. The God of Abraham.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한 예수를 하나님의 백성은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백성의 반역의 극치가 드러나 심판의 정당성이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음의 죄악 또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반역)한 행위이지만, 예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더욱 명백하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에 반역은 용서와 회복이 되지만,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영광을 갈취하는 성령 훼방 죄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칼빈 제시하는 사도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첫째, 그리스도는 창조주요, 사도는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자로서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2) 기적에서 누구든지 사람이 영광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임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순간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건축물에 비교한다면, 기초가 없으면 그 건물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교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선조의 예배 형식을 준수한다고 어리석게 자랑하지만, 칼빈은 선조들의 예배 형식을 무조건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가 참된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가 참된 종교가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관습이 교회의 모범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Whom ye have delivered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를 넘겨줄 뿐만 아니라, 빌라도가 놓아주려고 하는 것까지 거부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에 처하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한 베드로의 지적은 매우 엄중한 선포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들의 죄과를 분명히 인식해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께 선전포고(배역)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동료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즉 심각한 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살길을 주셨음으로(16절) 베드로는 담대히 저들의 죄악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또한 동일한 죄인이었지만, 주께서 회복하시고 성령의 권능을 주심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16절). 그리고 당시의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작금에는 많은 지혜와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16. And in the faith of his name.

     ‘그 이름’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반복되어 하나님의 열렬한 애정을 표시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그는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는 것이다.”3)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의 죄된 성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완전하게 선포하지 못합니다. “Let us, therefore, remember that Peter did use such variety and plenty of words, to the end he might stay us in Christ.(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단어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치료한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믿음을 통해서 효력을 발생케(이중수단) 한 것입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근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칼빈은 “복음의 능력은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에 이해서 설명”된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그리스도의 능력과 믿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조된다면 믿음은 부차적으로 따라오지만, 믿음을 강조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그 이름’으로 만하여도 성도의 믿음이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강조하는 ‘오직 믿음’은 꼭 전체 성경의 이해, 즉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17-21절) 죄사함과 회복의 길 = 회개와 믿음(천지의 大 주재(主宰))


    17절)

         설교는 청중을 격려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확신과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설교에서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함”입니다.

    As did also your rulers. 관원들 또한 회개에로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동조하였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다면 결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못 박는 관원들을 향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18. And God

       하나님께서 미리 알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작정은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일에 대한 죄책을 구원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을 성취하는 방식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경륜은 우리의 악한 행실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다른 목적으로 전환됨)을 이루시는 탁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신 경륜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범한 죄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는 곳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나타난 모든 생명의 소망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자행했다. 그렇지만 그 악행으로 인한 죽음에서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들에게도 생명이 공급되게 되었다.”


  19. Repent

      ‘회개하라’고 외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죄 사함이 준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용서받음에 대해서 절망적인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모한 저항을 하며, 양심의 가책을 각지 않습니다. 칼빈은 대표적인 예로 교황주의자들을 제시합니다. 교황주의자들에게는 회개의 교리는 없고, 은혜의 확실성을 뒤엎었지만, 죄의 용서에 대한 약간의 움직임은 있습니다(참회). 그러나 로마교회는 인간들의 영혼을 불안과 공포 속에 빠뜨리고 또 갖가지의 거짓으로써 그들을 미로에 몰아넣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부패되어 모든 부분에 연결됩니다.


  20. That when

     “새롭게(유쾌하게, refreshing many come from the Lord)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 이 구절은 사본 상의 차이(에라스무스와 옛 번역자)가 있습니다. 칼빈은 “which may be made perfect, thus: When the time of refreshing shall come, you may also enjoy this refreshing; when Christ shall come to judge the world, you may find him a redeemer and not a Judge. But because Beza doth fitly translate it, After that they shall come, it is better to retain that which is not so racked;(“Coactum,”  forced.) so you resolve it thus: That sins are so forgiven against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because, unless we be cited to appear before God’s judgment-seat we are not greatly careful to pacify God.” “새 시대가 오면, 당신들 또한 새 시대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당신들은 심판주가 아닌 구속주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자는 “새 시대 후”라고 적합하게 번역하였다. 우리의 죄가 최후의 심판의 날과 함께, 보이는 곳에서 용서를 받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도록 소환되지 않고는 그와 화해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최후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는 두려움과 격려를 주는 이중 자극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으로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의 날(the Lord‘s day)이 두렵고 불행한 날과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주의 날의 개념으로 복음을 주어 기쁨을 소망하도록 하여 그 날을 갈망하도록 합니다.

    And shall send him.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파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함으로 구원을 수여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신앙을 따라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너희를 위하여 예정된 자”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주를 맞이하며, 믿는 자는 구속주로 맞이하게 됩니다.


   21. Which he spoke.  칼빈은 이 시대를 “전체 시대”이다.  즉 세대주의 혹은 천년왕국설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왕국에 관한 예언은 종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나타내시는 일을 시작하신 그 때로부터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그 때부터 이것은 그가 주장하신 기본적인 교리였다는 사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다.”4) 그러므로 복음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속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 그 창시자이며, 거룩한 예언자들에 의해서 증언되었으며, 시대의 끊임없는 전개에서 증거되어 기독교 교리의 신빙성을 주도록 계획된 고대의 유물입니다.


   Until the time of restoring 이 일을 성취시키는 힘과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 곧 구속 사역을 통해서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회복)는 아직 충분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완성의 과정에 있으며, 우리는 노예 상태의 무거운 짐에서 신음하기에 우리의 구속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바로 시작되었을 뿐이며, 그 나라의 완성은 끝날까지 연기되어 있는 것처럼, 은택들 또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혼란을 보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 들고 다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는 것을 본다든지, 고난과 전투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즉시 나타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Whom the heaven must contain.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함으로 인간이 육적이며 물리적이며 세상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일축시킵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기에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불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22-24절) 모세보다 능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23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최고의 스승인 모세를 반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문제점은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the person of Christ)에 적용하는 것이며, 모세는 가르침을 할 선지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교사, 모세를 세우셨고, 선지자는 끊임없이 세우셔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가르침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탁월한 한 사람(신 18:15)은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한 미완의 사역을 예수께서는 3년에 사역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믿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정당한 귀결에 이릅니다. 모세를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결국 모세를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모든 사람이 받아드려야 할 설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예언을 마지막 날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계시를 완전케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를 대망하게 되었고, 계시(예언)는 400년 동안 중단되어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해서 깊게 듣도록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증인은 아버지이십니다(마 17:5 =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23. Every soul. 누구라도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면 사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청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책에서 소멸될 것을 선언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의 몸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24. And all  모든 선지자들도 동일하게 자기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낸다는 것으로 더욱 명확하게 합니다.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제자들을 보냄은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로서 자기의 제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이며, 현재의 우리들은 우리의 스승을 통해서 역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어집니다. 선지자들은 미래로 제자들을 보내었지만, 현재 교사들은 과거로 제자들을 보냅니다. 선지자들은 예언으로 보냈지만, 현재 교사들은 성경으로 보냅니다. 누구든지 모세와 선지자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합니다.


25-26절) 언약의 자손은 자신의 악함을 버려야 합니다.

   

    25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특별히 맺으신 언약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파기에 책임에 의한 두려움을 고무시킴으로 복음에 복종하도록 격려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도록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자기 곁으로 인도하시려고 하심을 볼 수 있다. 게으르고 둔한 자들을 자극하는 일이나, 가르침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을 부드럽게 인도하는 일은 둘 다 지혜로운 목사의 임무인 것이다.” “하나님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모호한 말들을 아무렇게나 뿜어내는 것이 아니요, 오직 명확한 계획에 의하여 그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 선택(common election)은 특별 선택(special election)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And in thy seed   ‘네 씨(창 22:18)’이기에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씨(seed)는 그리스도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씨도 그리스도로 비유한다면 이해가 좋을 듯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씨)임을 인식했고, 또한 그리스도의 직무(the office of Christ)에 대해서도 고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직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긴밀한 연결이 되어있듯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아브라함의 인격과 관련됩니다.5)


   All the families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공동체에 접붙임 되었습니다(be engrafted into the society).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자기에로 인도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지정합니다. 이 구원의 유산은 이방인들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의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한 가족을 이룹니다.


  26. He hath raised up his Son. 복의 근원과 원천은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백성을 축복하는 일은 율법시대에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민 6:24-27, 히 7:16).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맡겨진 임무를 완수했을 때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복음을 통하여 그가 우리 안에서 최상의 자리에 모셔지게 될 때 날마다 생겨나는 것이다. 이 질서의 부사(副詞),부언(附言),the adverb of order)로 말하면 그 말이 장자의 권리를 지적하는 말임을 우리는 이미 말해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로 가셨다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6)


   Whilst that he turneth. 베드로는 다시 회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없애는 것은 그로 인하여 구실을 얻어 마음대로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그 순간에 그들을 새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칼빈은 이에 두 은혜를 조심스럽게 구별하며, 이것을 복음의 기초라고 제시합니다. “우리는 무상으로 주는 용서에 의하여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사실이다.” -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말씀합니다.7) 이 주석은 현재 한국에 있는 구원파에 대한 정확하게 비판하는 구절이 됩니다. 구원파는 첫 죄사함만을 주장하는 집단입니다. 둘째 새롭게 하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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