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작성한 신경에(Qui a Patre procedit), filioque를 ()를 표기해서 추가한 것은 382년 로마 시노드이다(Qui a Patre (Filioque) procedit). 그리고 589년 톨래도 시노드에거 ()를 제거한 filioque를 사용했다(Qui a Patre Filioque procedit). 1979년 서방교회(천주교, 오순절주의)는 필리오케 삭제가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이전에 영국성공회도 양해했는데, 루터파는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개혁파에서는 신앙의 표시가 없다.
동방지역에 속한 그리스 카톨릭 교회에서는 1973년에 filioque를 생략하였으며, 그리고 고 카톨릭(Old Catholic) 교회는 1975년 최종적으로 chambésy 회의에서 filioque를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성공회도 그 filioque의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인정을 하지만 1976년 Zagorsk에서의 동방교회와의 만남 가운데 filioque를 삭제 하기로 하였다. 1975년 세인트 알반스에서 열린 회의(St. Albans Conference of 1975)에서 잉글랜드 성공회와 정교회 합동 교리 위원회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 조항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위원회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원문(그리스어)에는 ‘필리오케’가 없었으며, 서방교회가 나중에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추가한 것임을 인정하고, 교회 일치와 신학적 일관성을 위해 ‘필리오케’를 삭제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는 동방교회(정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신경 원문을 존중하고, 동서 교회 간의 불일치와 분열의 상징이었던 필리오케 문제를 해소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Yves M. J.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Vol. I I I, tr. by David Smith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3), 206
1978년과 1979년에 있던 Klingenthal(클링겐달) 회의에서 filioque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라는 문구에서 아버지는 늘 아들의 아버지라는 차원에서 filioque가 없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 협의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Faith and Order Commission)의 후원으로 진행되었으며, 동방과 서방의 여러 신학 전통을 가진 신학자들이 참여했다. '클링겐탈 각서(Klingenthal Memorandum)' (1979년)에서 필리오케 단어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의했다.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역, 『생명의 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407-408. It aims to bridge gaps in pneumatological thought by fostering dialogue between various traditions, such as Catholicism, Orthodoxy, and Protestantism, to create a more unified perspective on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of the Church.
로마 카톨릭은 1965년에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쳤다. 그리고 1967년 7월 25일부터 26일까지 교황 바오로 6세는 터키 이스탄불, 에페소, 이즈미르(서머나)를 방문했다. 1963년에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했고, 바오로 6세가 즉위했다. 1967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잔틴교회 책임자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교황 바오로 6세(1897~ 1978)가 서로 포옹하고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는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1054년의 파문 선언이 철회 되는 순간으로 보도했다. // 2014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뤼키예를 방문했다. 교황의 트뤼키예 방문은 1967년 바오로 6세,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 2006년 베네딕토 16세가 네 번째다.
이후 WCC 회원 교회들은 개신교를 포함하여1981년 이후로 원래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381년)에 쓰인 대로 성령의 발현에 대하여 filioque를 생략한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filioque가 서방의 신학 을 위한 근본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Wolf-Dieter Hausschild, “Nicäno-Konstantinopolitianisches Glaubensbekenntnis,”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d. X X I V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4), 454.
589년 제3차 톨레도(Toledo) 공의회에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경(Symbolum Constantinopolitanum)에 “필리오케”(Filioque, 보다 정확하게 “에트 필리오”[et Filio])는 논쟁이 진행되었고, 1054년에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1970년에 들어오면서 WCC 운동에서 걸림돌이 되는 “필리오케”(Filioque)를 서방교회 진영에서 양해하거나 포기하고 있다. 루터파는 “필리오케”(Filioque)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포티우스 논쟁... 포티오스와 카롤링거 왕조의 신학자들 간의 삼위일체론 논쟁에 대하여 R. S.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 The Trinitarian Controversy (Belmont, MA.: Nordland, 1975)을 참조하라.
Christoph Schwöbel, “Christology and Trinitarian Thought,” in Trinitarian Theology Today: Essays on Divine Being and Act (Edinburgh: T&T Clark, 1995), 1-30; Gijsbert van den Brink, “De hedendaagse renaissance van de triniteitsleer. Een oriënterend overzicht,” Theologia Reformata 46 (July 2003): 210-240.
필리오케가 첨가되지 않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동 ‧ 서방 교회의 화합을 위한 유일하게 규범적인 문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Lukas Vischer, ed.,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Ecumenical Reflections of the Filioque Controversy, Faith and Order Paper 103 (London: SPCK, 1981), 18.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당시 스페인에 퍼져있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필리오케에 준하는 문구(“에트 필리오”)를 신경에 첨가해야 했다.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신경을 수정한 행위와 톨레도의 신학이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었음도 지적했다.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3rd ed. (New York: Longmans, Green, 1972), 361-362; Franz Courth, Trinität: In der Schrift und Patristik,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2/1a (Freiburg: Herder, 1988), 128. 앤드류 E. 번(Andrew E. Burn)은 문제의 문구가 톨레도 공의회에서 첨가되지 않았고, 공의회 후에 밝혀지지 않은 계기에 의해서 공의회의 ‘악타’(Acta)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Andrew E. Burn, “Some Spanish MSS of the Constantinopolitan Creed,”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9, no. 34 (1908): 301-303. 그러나 번의 주장은 아직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았다. 고려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은 톨레도 공의회를 주최한 서고트족의 왕 레 카르드가 개회연설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a Patre et a Filio procedure, Mansi 9. 977-978)라고 고백한 것, 톨레도 공의회 ‘악타’에는 “그리고 성자로부터 발출하시는 [분]”(ex... et Filio procedentem, Mansi 9.981)이 381년 신경에 분명히 첨가되어 있으며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Mansi 9.985)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톨레도 공의회 이후 스페인과 카롤링거 왕조의 공의회들에 유사한 문구들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Siecienski, The Filioque, 69, 88-89; A. Edward Siecienski, “The Filioque: A Brief History,” in Ecumenical Perspectives on the Filioque for the 21st Century, ed. Myk Habets (London: Bloomsbury, 2014), 10.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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