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준 목사(은혜로 교회)
제목: 나의 믿음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며, 핍박받음은 위로받을 일이다Ⅲ(250330)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1 : 3 – 12(10-12)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삶이 세상 가치의 성공일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반응하며 사는 것일까? 세상 가치의 성공이란 목적하는 바를 이룸을 의미한다. 혹은 해야 할 일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하는 바’를 혹은 ‘해야 할 일’을 이룬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한 뒤에, 이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가? 이 성공을 위해서 그렇게도 힘들게 살았는가? 말하며, 매우 허전하고 쓸쓸하다고 말한다(=허무하다). 그 이유는 마음 깊숙이 자리한 성공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 왕이 그랬다(전1:2).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반응하며 사는 게 바른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응이란 국어 사전적으로 보면 ‘자극에 대응하여 어떤 현상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반응이란 단어를 신앙적으로 해석하여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맞추는 태도나 행동을 의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거나 해야 할 일을 이룸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도나 행동을 취하며 사는 삶이다. 그 삶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면 된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사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억지나 강제로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대로 사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세상 가치의 성공은 이루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사람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솔로몬의 후회가 없다. 그 삶은 헛수고가 아니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본분을 다한 삶이다. 바로 그 복된 삶을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그 믿음 안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하고 싶은 일 곧 재능대로 믿음의 일을 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위로와 평안의 삶을 영원히 누리게 하여 주신다.
10절을 보자.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0).”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 정하신 날에 약속하신 대로 오신다. 바로 그날에 다시 오시는 우리 주 예수를 맞이할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 우리 주 예수를 찬송과 경배로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영광을 성도들로부터 받으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공포에 질린 상태로 영원한 멸망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지옥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의 나라 천국에서 살게 됨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오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심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그 하나님께서 반역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상에 피 흘러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므로 심판과 구원을 완성하신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바로 그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을 예수 믿음 안에서 눈으로 직접보고 손으로 만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받아 영생의 몸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기이한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실제로 접하고 감탄하게 된 것은 모두가 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다. 사도바울의 복음선포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직접보고 손으로 만지는 기이한 일을 실제로 행하게 된다. 이는 아주 큰 특권이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입은 것이다. 초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무시한 사람들은 두렵고 무섭고 떨려서 그 얼굴로부터 떠나간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맞이하게 된다. 할렐루야!
11절, 12절을 보자.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12). ”
사도바울은 전도하는 일과 전도 일행들에 의식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 바쁜 일과에도 그가 전도하여 세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마음에 품고 늘 기도하였다. 그 사도바울의 기도 내용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에 참석하여도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 교인들이 그렇다. 전도자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가르치지 않고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을 가르친 까닭에 종교 놀이하는 종교인들만 교회 안에 가득할 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 교회 기능과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사도바울이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았으면 종교 놀이꾼들만 교회 안에 가득했을 터인데,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많은 어려움과 핍박 가운데서도 그 시대의 풍조나 경향을 따르는 성경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 계시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이 구원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믿음의 일을 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바라서 기도했다. 믿음도 하나님께 주시고 믿음의 일을 하시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기도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동서고금 교회의 본이 되었다.
하나님께 합당한 교회로 인정받으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 그 능력은 기도 응답으로 주어진다. 그 기도 응답은 성령의 일하심이다. 성령의 일하심이 교회에 나타나야 선한 일을 좋아하고 믿음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신자들이 믿음을 유지하고, 믿음의 선한 일을 좋아하고 믿음의 삶을 살기를 바라서 기도하였다. 사람의 본성에서는 칼뱅의 말대로 악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바라고 좋아하게 됨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영광 받기를 원해서였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도할 때 복음 전도의 열매 맺기를 바랐다. 복음 전도의 열매란 반역죄인 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용서 받고 의롭게 되고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몸을 입고 천국에서 사는 것이다. 바로 그 복음 전도의 최후 결실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그 이름 높임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을 받으시면, 그를 믿는 우리도 영광을 받는다. 반역죄인 된 우리는 형벌 받아 죽음에 이르러야 할 자들인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따라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면 우리도 영광 받음을 굳게 믿고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며 믿음의 일을 하며 살자.
반역죄인 된 사람,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과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대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상에 죽고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마다 구원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평안의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바라서 믿음의 일을 하며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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