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리를 오해했다(4) "믿음으로 구원얻음"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우리나라에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이름은 최권능(본명 최봉석崔鳳奭, 1869-1944)이고, 목사입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전도 문구로 놀랍게 전도활동을 하셨습니다. ㅇ
한국교회는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이 확신하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예정론적 문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명확한 문장도 아닙니다. 명확하지 않는 문장은 문장을 읽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주장한 종파를 '구원파'라고 합니다. 그렇게 지목된 사람들은 자기들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구원파에서 중요하게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 때 중요한 실수는 무엇일까요? "그 사실 = 예수께서 모든 죄를 해결하셨다는 ="을 듣고 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수인 이유는 믿음을 "복음을 듣고 스스로 선택해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서 믿음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 체계는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구체화되었으며, 그 믿음이 성경적 믿음이라고 믿습니다(엡 2:8).
"믿음으로 구원얻음"은 주어가 생략된 구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얻으면 완전한 구원이다"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갖기도 합니다. 구원의 확실성은 성도가 영적침체에 빠졌을 때에 갖는 큰 위로의 방편입니다. 영적교만이나 나태로 이끄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악용입니다. 구원의 확실성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과 자비에 근거한 교리입니다. 교리를 악용하는 사례를 정당한 사례로 이끌어서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꾸준하게 연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현재 교회의 모습을 보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의 모습은 기독교 원리를 구현한 교회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원리를 구현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그럼에도 비판은 행동에 대한 비판과 원리에 대한 비판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얻음"에서 주어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주어를 첨가해서 사용한다면 진술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어 구원을 받음"은 구원파적 구원 도식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는 "내가 입을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구절은 한 구절이 아닌 문맥에서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말씀"(롬 10:8)입니다. 믿음의 말씀을 듣고 네 입으로 고백하는 것인데, 듣고 입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cum verbo)가 필요합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말씀이 이해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조명)입니다(계 2-3장). 그것을 문자대로 받아서, "복음을 듣고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자력구원이 되는 위험한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간혹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서 나는 "중생한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고, "나의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를 전제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어가 "내"가 들어갈 때에 갖는 위험성, 이중성을 민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에서 "믿음으로 구원얻음"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에 근거해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내가"가 주도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형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충돌입니다. 이 논쟁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게서 결정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종교개혁에서 천주교로 돌아간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작용을 허용, 유도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것을 모너기즘(monergism, 단동설)과 시너기즘(synergism, 협력설)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중립된 지역이 없는 것이 적지 않은 충격입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함께 중교개혁을 주도했지만,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종교개혁의 "믿음으로 구원얻음"은 루터가 발견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으로 구원얻음"은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라고 제언합니다. 루터는 성경계시 내용을 반복한 성경의 제자입니다.
"믿음으로(by faith)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we believe) 하니라"(행 15:9-11)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심"(행 15:7)과 "성령을 주어"(행 15:8)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주의 백성은 성경대로 믿는데, 성경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고 믿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신 은혜가 성경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으로 구원얻음"을 외칩니다. 그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너희의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생명은 사람의 말의 능력에 있지 않고, 주께서 주시는 인도와 은혜를 따라 성령을 주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좀 더 명확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몸부림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말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고전 4:20). 구원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17), 전도의 미려한 것(고전 1:18-31)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친구나 이웃의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된다면 교회의 사역자나 선생에게 질문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안전하고 믿음의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혼자 있도록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혼자 있다는 생각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진리가 생각나도록 하시며, 또 동역자들을 보내셔서 홀로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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