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위그노(Huguenots), 그들은 누구인가?

형람서원 2024. 6. 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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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여인들이 착용한 히잡이나 유대인들이 쓴 키파를 보면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듯이 프랑스 개신교인 중에서 누가 위그노의 후손들인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위그노 십자가’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에는 어김없이 위그노 십자가가 달려있다. 위그노 십자가는 그 모양이 보통 십자가와는 다르다. 마치 프랑스 귀족들의 가슴에 달린 훈장과도 비슷하다. 장방형의 라틴 십자가에 익숙해서 정방형의 그리스 십자가 조차 낯설게 느끼곤 하는 나에게 위그노 십자가를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십자가는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들이 그 십자가를 늘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과 역사를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위그노 십자가에 대한 애착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신앙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들의 가슴속 깊이 묻어 둔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토록 가혹했던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의 본질을 지켜낸 사람들이야. 하지만 그 치열했던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어.”

‘위그노’(Huguenots)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eunots)가 되었다.

이것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한 프라이부르크와 베른의 동맹에서 유래 되었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당시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나바르의 앙리(Henri de Navarrem, 1553-1610)의 조상 위그 카페(Hughes Capet)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나바르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거리트(1492-1549)의 딸인 나바르 여왕 잔느 달브레(1528–1572)가 위그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왕가의 앙투안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나바르의 앙리 3세이고 그는 후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시조가 된 앙리 4세가 되었다.

위그노라는 말이 프랑스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60년부터이다. 그해에 프랑스 앙브와즈 성에서는 가톨릭 동맹을 이끄는 기즈 가문의 개신교 탄압에 불만을 가진 개신교도들이 왕을 납치하고 기즈 형제들을 체포하기 위한 반란을 도모했는데 그만 내부의 밀고로 실패했고 주모자인 장 뒤 바리는 극형에 처해졌다.

1200명 이상의 위그노들도 앙브와즈 성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사건이 1563년부터 1598년까지 진행된 종교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지금도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위그노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위그노의 정체성을 붙들고 있다.

그들은 1598년 4월 13일 에 위그노였던 앙리 4세가 선포한 낭트 칙령(L’édit de Nantes)으로 잠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1685년 10월에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려고 선포한 퐁텐블로 칙령(L’édit de Fontainebleau)으로 87년간의 자유시기를 마감하고 102년간의 길고 긴 고난의 여정으로 들어갔다.

그 기간에 개신교의 예배처소는 헐리거나 불탔고 외국으로 도피하지 못한 목사와 설교자들은 잡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 평생 배 밑창에서 노를 젓다가 죽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제 개종을 당했고 개종하지 않은 성도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루이 14세는 국경을 봉쇄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위그노들의 길을 차단했다. 참혹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 개신교 역사는 이 시기를 ‘교회의 광야 시대’라고 부른다.

위그노의 500년 역사를 읽어가노라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저리다.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든 순간들이 너무나 많아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만약에 이런 탄압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탁월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프랑스 위그노 학자 사무엘 무르의 말을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보지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그토록 참혹한 고난에 버려두셨을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일까? 그들의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원용 목사

필자 성원용 목사는 1996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PCK) 파송한 프랑스 선교사이며, 2002년에 파리 선한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고 한불 교단 협력 코디네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1년에는 유럽 위그노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한국 크리스천 문학에 등단한 수필가이며 신한대학교 객원교수다. 저서로는 “위그노처럼,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국민북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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