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최재건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스코틀랜드 개혁의 배경
1) 스코틀랜드의 지정학적 위치와 교회
2) 종교개혁 전야의 롤라드(Lollardy)
3) 루터의 종교개혁사상 전래
3. 스코틀랜드의 개혁과 존 낙스
1) 낙스의 활동 시작
2) 낙스의 유럽 활동
3) 낙스의 귀국과 교회개혁
4) 낙스의 활동과 장로교 총회 조직
5) 멜빌의 개혁 계승 발전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바로 ‘그 개혁’(The Reformation)은 교회의 개혁을 넘어 사회 전반의 변화로 이어져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은 서양 역사에서 산업혁명과 쌍벽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된 그 개혁운동은 장미전쟁만도 30여 년간 지속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쯔윙글리(U. Zwingli,1484-1531)는 루터와 거의 동시대에 독일어권인 취리히에서 스위스 북쪽으로 개혁의 나팔을 불었다. 불어권인 스위스 남쪽에서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개혁을 시작하였다. 재세(침)례파(Anabaptist)들은 취리히를 위시하여 독일과 화란에서 급진개혁(The Radical Reformation)운동을 펼쳐나갔다.
대륙의 개혁운동은 영국에도 미쳤고,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소위 반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하였다. 한편 대륙 밖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개신교로 개혁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그 본질과 결과는 각기 달랐다. 잉글랜드에 이어 스코틀랜드에서도 루터의 저작이 유입되면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나중에는 캘빈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아 청교도운동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잉글랜드의 헨리 VIII세가 이끈 개혁과 달리 교회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500여 명의 순교자를 낸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양쪽 전체에서 27명의 순교자를 내어 덜 유혈적이었다. 그리고 개혁운동이 늦게 시작되었지만 가장 오래 지속되면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개혁이 성취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교회개혁은 존 낙스(John Knox,1513-1572),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 조지 길레스피 (George Gillespie,1613-1648) 같은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가운데 낙스는 칼빈을 만난 후 칼빈주의를 체득하여 용기와 안목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여 실현시켰다. 멜빌은 낙스만 아니라 칼빈의 제자인 베자에게서도 신학훈련을 받고 낙스의 개혁의 유업을 완성시켰다.
또한 청교도의 창시자요, 장로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낙스는 신약성경에 바탕을 둔 교회정치제도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장로교제도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교회가 되었다. 그 개혁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장로교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활동으로 한국에도 전래되어 주류 교단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교인수를 다 합하여도 크게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종교개혁 시작 500주년을 맞아 장로교회의 시원이요 개혁교회의 원류인 스코틀랜드의 교회개혁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를 찾아보려 한다. 이 일을 위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대부인 존 낙스의 활동을 연구의 중심에 두고 그를 계승하여 개혁을 완성시킨 앤드류 멜빌의 활동을 일부 포함시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과정을 개괄해보려고 한다. 자료로는 필수적인 기본 자료가 되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치리서”, “제2치리서”, 낙스의 저작을 주로 활용하고, 그 외에 그에 대한 전기들과 종교개혁 개설서들을 활용하려 한다. 연구 시기는 종교개혁의 시작인 16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중반의 웨스트민스터 총회까지로 하였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된 스코틀랜드의 개혁운동이 어떻게 하여 가장 완전한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장로교체제를 완성되어 장로교회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코틀랜드 국교회로 만들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그 정신을 되새기려 한다.
2. 스코틀랜드 개혁의 배경
1) 스코틀랜드의 지정학적 위치와 교회
스코틀랜드는 용감하고 개인주의적인 켈트(Celts)족과 뱃사람의 기질이 강한 노르웨이 족과 색슨(Saxons)족이 혼혈된 민족이다. 켈트족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다른 민족이나 지역보다 성경을 사랑하였고, 가톨릭교회의 의식보다 십자가의 공로를 통한 구속의 은총에 관심을 가졌다. 가톨릭으로부터 독자적인 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커들디스(the Cudldees) 파는 13세기 말까지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역에 남아 개혁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와 늘 반목하고 군사적으로 자주 충돌하였다. 따라서 왕실은 미약했지만 잉글랜드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 주체성을 유지해왔다. 13세기경부터는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프랑스와도 정치적인 교류를 하였고, 때로는 동맹관계도 맺었다. 종교개혁기의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의 정치적인 상황변화도 개혁의 요인과 결합되었다.
개혁 이전에 스코틀랜드 가톨릭교회는 15세기 말엽에 세인트 앤드류스 주교구와 글래스고 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잉글랜드의 교회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사의식이 초대교회의 소박하고 영적인 예배의식과는 달리 화려하고 감각적으로 변한 것은 유럽의 교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 성경이나 강론, 설교는 없었다. 불경건한 생활, 성직자의 윤리적 타락은 1513년부터 1546년까지 스코틀랜드 국쇄록에 추기경의 서자 11명, 딸 3명이 합법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그 정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심지어는 20명의 자녀를 둔 자도 있었다. 성직자 임명을 둘러싼 부패상도 극에 달하였다. 교회 소유의 토지가 많아 성직자의 치부도 문제가 되었다. 교회가 경제적 이권을 위한 조직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잉글랜드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와의 동맹에 앞장 서는 기구 역할을 하였다.
2) 종교개혁 전야의 롤라드(Lollardy)
스코틀랜드인들은 대륙과 마찬가지로 위크리프, 후스파 롤라드파의 영향으로 개신교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위크리프(John Wycliffe, 1320-1380)가 활동하던 때에 고해성사, 연옥, 성자숭배, 성인숭배 등의 성경권위에 근거하지 않은 가톨릭교회 신앙사상에 대한 비판과 그의 성경번역과 개혁사상은 그의 사후에 스코틀랜드의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위크리프의 동료인 레스비(James Resby)는 교황에 대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롤라드파의 사상은 보헤미아 출신의 의사 폴 크로우(Paul Craw)에 의해 스코틀랜드에 전해졌다. 위크리프가 활동할 때 이미 옥스퍼드대학에만 81명의 스코틀랜드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어서 개혁자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접속될 수도 있었다. 롤라드파에 대해 지지파와 반대파가 나뉘었다. 제임스 1세는 위크리프의 주장을 이단사상이라 인식하고 1425년 위크리프와 그의 주장과 동조하는 인사들의 이단성을 조사하고 처벌하게 하였다. 폴 크로우는 후스파의 서신을 소유하였고, 성례전에 대해서도 위크리프의 견해를 따랐으며,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1433년 성 앤드류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크로우의 개신교적 성경관과 신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를 받는다. 위크리프파는 당시 교회 당국에 반대하는 ‘34개 조항의 고소문’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주류사상인 만인사제직을 지지하고 교황직과 사제직을 비판하며 화체설과 연옥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3) 루터의 종교개혁사상 전래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독일을 넘어 스위스와 영국을 거쳐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었다.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과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서적의 공급은 스코틀랜드에도 미쳤다. 성 바울대학 학장인 존 콜렛(John Colet)은 1512년 성직자 회의에서 고위 성직자와 신부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다. 1520년대부터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사상이 주로 상인들에 의해서 리이드(Leith) 중심한 동부의 항구를 통해 스코틀랜드에도 퍼지기 시작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서적들과 루터의 저술들이 계속 유포되자 스코틀랜드 의회는 금수령을 의결하였다. 1525년 7월에 선포된 이 법률은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가톨릭교회 당국도 루터서적에 대해 금독령을 내리고 서적을 몰수하였다.
금독령과 금수령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서적과 사상이 계속 유포되자 당국은 이를 엄단키로 하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는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먼저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이해하였으나, 그의 행각이 드러나 1528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기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파리대학 유학생활 중에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던 에라스무스를 통해 루터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해밀턴은 루뱅대학에서도 수학하였고, 성 앤드류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신약성경을 배포하고 해설하다 마부르그대학(Marburg University)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패트릭의 교리’(Patrick's Places)라는 소책자를 썼다. 1527년 늦가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사상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저술만 아니라 설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당시에 교권을 장악한 비튼(James Beaton, 1522-39재임) 대주교는 그를 루터교 교리 유포죄로 소환하고 1528년 2월 화형령을 내렸다. 그는 성 앤드류 성에서 24세의 청년의 나이에 화형을 당하였다. 보다 정확한 장소는 성 살바토르대학의 정문 밖이었다. 그는 비록 젊은 나이에 순교했었지만 스코틀랜드의 개혁운동에 회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해밀턴을 뒤를 따라 또 다른 순교자가 나왔는데, 곧 헨리 포레스트(Henry Forrest)였다. 그는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신을 강해하고 신약성경을 소지한 죄와 ‘패트릭의 교리’를 읽고 그의 주장에 동조한 죄로 1533년 세인트 앤드류에서 화형 당하였다. 해밀턴의 순교 후, 1530년대에 에딘버러 캐슬에서 7-10명이 화형을 당하였고, 그 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어간에 20여 명이 화형 당하였다. 그래도 잉글랜드나 유럽대륙의 경우와 비교하면 유혈로 안한 인명 피해는 극히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비밀리에 모여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는 ‘사적 교회’(Privy Kirk)가 생겼고, 다수의 사람들이 잉글랜드와 대륙으로 망명하였다. 이는 종교개혁이 불붙기 시작한 징후들이었다.
3. 스코틀랜드의 개혁과 존 낙스
1) 낙스의 활동 시작
16세기 중엽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1534년에 이미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잉글랜드와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헨리 VIII세가 잉글랜드식의 개혁을 스코틀랜드에 요구하자 국왕 제임스 V세는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일어난 전쟁에서 대패하고 사망하였다. 후계자가 된 제임스 VI세는 프랑스인 마드렌느(Madeleine)와 결혼한 후에 사별하고 프랑스인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와 결혼하였다. 그가 죽기 6일 전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메리(Mary Stuart)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는데, 모후인 귀즈의 메리는 친 프랑스적이었고, 교회개혁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메리도 부모들처럼 개신교를 이단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잉글랜드의 헨리 VIII세가 그의 아들 에드와드를 메리와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메리는 프랑스로 보내져서 황태자와 결혼하였고, 그 황태자는 프란시스 II세로 등극하였다. 프랑스는 메리와 협력하여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에 친 잉글랜드파와 친 프랑스파가 상충하는 가운데 교회의 개혁이 진퇴를 거듭하였다. 의회와 당국은 법률을 제정하여 새로운 신앙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은 신교도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다. 개혁을 반대하는 정세 속에서도 의회는 1543년 스코틀랜드에서의 영어 신약성경 소유를 합법화 하였다. 그런 가운데 상황은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품고 연옥사상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점차 변화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 신학사상으로 인해 순교한 해밀턴을 이은 유명한 순교자는 위샤트(George Wishart, 1512-1546)였다. 그는 애버딘 왕립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에라스무스 사상에 심취하였다. 위샤트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칼빈의 영향을 받았고, 1542년 켐브리지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543년에 귀국하였는데, 귀국할 때 가져온 ‘제일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 1536)를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최고의 헬라어 학자가 되었고, 헬라어 성경을 읽도록 가르친 일로 범법자가 되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여러 지역에서 로마서 강해와 당시에 간행되기 시작한 칼빈 주석 강해와 설교로 개신교사상을 전파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장로교회의 형태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였다. 그는 1529년 성 앤드류대학에 입학하였고, 1535-36년경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언제 개신교와 접촉하고 신앙고백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543년으로 추정된다. 낙스는 죠지 위샤트에게서 개신교 사상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1546년 낙스가 일하던 집에 그가 들려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동료가 되었다. 위샤트는 1545년 12월부터 1546년 1월까지 낙스와 같이 순회하며 교회의 잘못과 교황의 권위를 비판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위사트는 자기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낙스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결국 당시 가톨릭교회의 교권을 쥐고 있던 데이비드 비톤(David Beaton, 1494-1546) 추기경에 의해 이단사상의 발로자란 혐의로 1546년 3월1일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자 1546년 5월 29일, 위샤트의 화형에 분노한 신교도들이 성 앤드류 성의 비튼 추기경을 살해하였다. 이 사태로 성 안팎에서 신ㆍ구교도들이 대결하게 되어 신교도들은 잉글랜드의 도움을, 구교도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바라게 되었다. 독일로 망명하려던 낙스는 1547년 4월 10일 성안으로 들어가 신교도들과 합세하였고, 세인트 앤드류 성의 설교자가 되었다. 설교자로 부름 받는 과정에서 낙스는 진로를 고심하다 기도한 후 사역을 맡게 되었다. 비록 그곳에서의 사역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이 일은 낙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낙스의 초기 스코틀랜드 사역에 존 라후(John Rough)가 합세하여 힘을 더하였다.
신ㆍ구교가 서로 대치하고 있던 세인트 앤드류 성에 먼저 온 원군은 구교를 지원하기 위해 온 프랑스군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1547년 7월 30일 세인트 앤드류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20여 명의 개혁교도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 낙스도 포로가 되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인력으로 움직이는 갤리선의 노를 젓는 고역을 치루는 가운데서도 개혁적인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고통을 이겼다. 마침내 1549년 2월 19개월의 포로생활을 끝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VI세의 개입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549년 4월 7일 영국에 도착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접경지역에 있는 교회의 설교자로 파송을 받았다. 1552년에는 런던에서 잉글랜드 왕실의 설교자도 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우호관계를 맺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I세가 얼마 후 1548년에 죽자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메리는 부모의 영향과 프랑스에서 장기 체류한 것의 영향으로 가톨릭 일변도의 교회정책을 폈다. 때로는 친 개신교적인 태도를 취할 때도 있었으나,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잉글랜드에서도 에드워드 VI세가 죽고 메리(Mary Tudor, 1553-1558 재임)가 왕위를 계승하자 영국국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에서도 스코틀랜드에서도 교회 개혁의 기수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이 더 지연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2) 낙스의 유럽 활동
154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외교정책은 친 프랑스적으로 변화하였다. 메리 여왕의 친모인 제임스 5세의 왕비였던 프랑스 귀즈 가문 출신 귀즈 메리가 섭정을 하며 반 개신교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에서도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여 소위 피의 메리(Bloody Mary Tudor) 치하에서 국가의 종교가 가톨릭으로 환원이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를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륙으로 망명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낙스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1554년 제네바로 망명하였다. 그는 1554년부터 1558년까지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1555년 후반에 스코틀랜드에서 일시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네바에서 살았다. 그 시기는 미래의 활동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칼빈을 만나 그의 신앙과 신학과 삶을 접하고, 영국인 망명자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한 불링거와 그 밖의 개혁적인 여러 신학자들을 만나 학문적인 소양을 넓혔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상황에 대해 고심하고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낙스는 스위스에서 성만찬의 임재설을 부인하여 많은 갈등을 빚고 모든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러던 중 1555년 9월부터 1556년 7월까지 암암리에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며 개혁의 가능성을 탐지하였다. 그는 많은 시민들이 개혁신앙을 갈구하는 것을 알고 고무되었다. 1555년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버윅과 뉴 캐슬(Berwick & New Castle)에서 목회도 하였다. 이 해에 매조리 보위(Majorie Bowes)와 결혼도 하였으나, 1560년 사별하였다. 목회를 하는 한편으로 ‘비밀교회’(privy kirks)를 조직하고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찬예식도 개혁교회의 의식에 맞추어 집례하였다. 에딘버러에도 비밀교회가 세워지자 윌리암 핼로우(William Harlow)와 존 윌록(John Willock)에게 책임을 맡겼다. 평민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개신교인들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개혁의 수위도 높아져 1556년 여름에 많은 교회에서 삼위일체 성상, 마리아 성상, 성 프란시스코 성상이 제거되거나 파괴되었다. 1558년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성상파괴운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한 특징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이 가톨릭의 수도사들에게 1559년 5월14일까지 수도원을 비우라고 요구하여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낙스는 1556년 여름 제네바로 돌아가 영국인 망명자 교회사역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두 아들 나다니엘과 엘르아살이 태어났다. 사역 중에 훗날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식서’(the Book of Order)의 기초가 되는 영어 예전들을 발전시켰다.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을 또한 간파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병합과 교회 개혁운동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3) 낙스의 귀국과 교회개혁
스코틀랜드교회 개혁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당국은 1557년 12월 3일 ‘공동기도서’의 채택과 성경의 소유를 인정하였다. 1558년에는 회중들에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장로제도가 설정되었다. 낙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표면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팔수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1558년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친 가톨릭 정책에 반대하여 “여성들의 악마적 통치에 항거하는 첫 트럼펫 나팔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라는 유명한 글을 썼다. 그는 가톨릭을 옹호하는 세 메리, 즉 헨리 VIII의 첫딸 잉글랜드의 메리 투더(Mary Tudor),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메리 스트워트(Mary Sturt), 프랑스 출신인 메리 귀즈(Mary Guise)를 우상숭배적인 통치자라고 공격하였다. 세 여자 통치자들을 불법적 폭도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글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이란 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여왕의 분노를 사서 낙스의 귀환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낙스는 권력자들에 대해 독재적인 군주는 백성들의 권리를 제약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부정부패한 권력에 도전하는 중요한 원리를 정립하였다. 이 원리에 따라 반개혁적인 권세자들을 대하였다
위사트가 화형당한 지 12년이 지난 1558년 3월 루난의 신부 82세의 월터 밀른(Walter Myln)이 이단 혐의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가톨릭교회 교황정치에 대한 경고의 조종이 되었다. 1559년부터 1567년까지는 전체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 시기였다. 1559년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여왕(1533-1603)이 즉위한 것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도움이 되었다. 1559년 귀즈의 메리는 부활절에 가톨릭교회의 의식을 따르라고 선포하고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아 개혁군과 싸웠으나 사망하였다.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을 지원하자 프랑스군은 스코틀랜드를 떠나고 개신교도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다. 1559년 5월 6일 개혁을 표방하는 교수들이 섭정에게 시민적 관할권과 영적인 관할권을 구분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1560년 4월 4일 프랑스가 패배하여 휴전 조약을 맺었다. 1560년 6월 16일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였다. 프랑스군도 영국군도 모두 철수하였다. 메리 여왕(Mary of Scott)이 프랑스로부터 돌아올 때까지 12인으로 구성된 추밀원이 일시적으로 정무를 대행하였다
1559년 5월 2일 낙스는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5월 11일 세인트 존스교회에서 행한 설교는 개신교도들에게 불을 지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1559년의 시민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귀족, 시민, 농민이 모두 스코틀랜드 개혁의 주체들이 되었다. 활동의 첫 중심지는 퍼스(Perth)시였다. 퍼스의 세인트 존스 교회당에서 미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어린이가 돌을 던진 것을 계기로 개신교도들이 합세하여 제단 장식을 부수고 수도승을 끌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퍼스폭동’(1559년 5월 9-11일)이었다. 귀즈 섭정은 스코틀랜드군과 프랑스군을 동원하여 신교도들을 압박하였다. 신교도들은 퍼스에서 해산하고 프랑스 원군도 회귀하도록 상호 약조를 하였다. 그러나 귀즈 섭정이 약조를 어기고 퇴각하지 않고 퍼스시를 가톨릭으로 회귀토록 조처하였다. 신교도들은 이에 저항하는 것을 정당한 일로 여겼다. 시민들은 1559년 6월 10일 세인트 앤드류스에 집결하였다. 구교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주교 존 해밀턴은 프랑스 군대를 동원하였다. 6월 11일에 낙스는 그들에게 저항하도록 개신교도들을 격려하였다. 세인트 앤드류를 점령한 신교도들은 퍼스 시로 진군하였고, 그 다음에는 6월 29일 에딘버러로 향하였다. 낙스는 에딘버러에서 귀즈의 메리 섭정을 회견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에딘버러도 점령한 개신교도들의 힘에 눌린 섭정은 리스 조약을 맺고 정전하였다. 군사적인 힘의 보강이 절실한 개신교측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1560년 1월 22일 1만여 군대가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귀즈의 메리는 1559년 12월 23일 프랑스 함대의 도움을 받아 에딘버러 성으로 피했으나 포위되었고, 1560년 6월 10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오랜 세월 원수였던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여왕을 적법한 군주로 임명하였고,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두 민족이 합한 결과 잉글랜드가 프랑스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어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1560년 7월 5일 “에딘버러조약”(Treaty of Edinburgh)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구절이 스코틀랜드교회 예배모범서에 첨가되었다. 또한 모든 외국군대가 스코틀랜드에서 물러나고 스코틀랜드 의회가 스스로 자신들의 종교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 7월 10일부터 개혁교회로 전환하기 위한 일련의 법들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7월 19일에는 낙스가 설교하던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감사 예배가 드려졌다.
1560년 8월 9일 종교개혁을 입법화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회가 소집되었다. 낙스는 ‘선지자 학개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우자’고 호소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집회를 불법화하고 프랑스와의 외교를 단절하였다. 1560년 8월 17일, 낙스를 포함한 6인이 4월 17일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Confession of the Kirk of Scotland)를 심의하고 통과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 이 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채택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8월 24일에는 “교황의 사법권 폐지법”(The Papal Jurisdiction Act)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스코틀랜드에서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어기는 자는 추방이나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구교 세력이 있기는 하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분명히 개신교, 개혁교회가 주류가 되었다.
4) 낙스의 활동과 장로교 총회 조직
1560년 12월 20일 개혁교회의 첫 총회가 개회되었다.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이 모여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개혁된 교회를 최선으로 이끌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총회는 행정 치리서인 ‘훈련규범’(The Book of Discipline)을 작성하였으나, 의회는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1561년 1월 27일 종교개혁의회에서 ‘제일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혹은 ‘교회정치와 훈련에 관한 첫 서적’(The First Book of Policy and Discipline of the Church)이 채택되었다. 격론 끝에 많은 귀족들의 서명을 받아 통과되었다. 개혁교회의 목사청빙과 교회 치리를 위한 종합적인 절차가 제정된 것이었다. 교회직원으로 목사, 장로, 집사를 두고 장로와 집사는 매년 한번씩 선출하게 하였다. 교회 행정기구로 당회(kirk=Sessions), 대회(Synod), 노회(Presbytery), 총회(General Assembly)를 두게 하였다. 장로회주의는 실용적인 면에서 교육을 중시하여 각 교구마다 학교를 세우고 주요 도시에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우게 하였다. 따라서 세인트 앤드류, 글라스고우, 애버딘에 대학이 세워졌고, 이어 에딘버러에 4번째 대학이 세워졌다.
1562년에는 새로운 개혁교회 예전을 규정한 ‘공동예배규범서’(Book of Common Order)가 도입되었다. 제네바규범서 혹은 ‘낙스의 예배규범서’라 불리는, 교회의 공중예배와 행사에 관한 지침들이다. 젊은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칼빈의 요리문답을 번역해서 사용되다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번역하고 주해를 덧붙인 것으로 대체되었다. 후에는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으로 바뀌었다. 1566년에는 ‘스위스신앙고백서’(Helvetic Confession)가 수용되었다. 어려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Mary of Scott, 1542-1587)는 5세 때 스코틀랜드를 떠나 13년간 프랑스에 거주하다가 남편 프랑수아 2세가 급사하자 1561년 8월 19일 18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메리 여왕은 미사를 고집하고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이끌었다. 낙스는 매주일 센트 자일스(St Giles )교회에서 메리의 궁전 미사를 비판하였다. 메리 여왕이 귀국한 후 첫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수천 명의 적보다 더 위협적인 개혁 반대 세력이라고 공격하였다. 낙스는 메리 여왕의 소환을 받아 수차에 걸쳐 직접 면담하고 올바른 군신관계, 로마교회관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메리는 때로는 낙스의 말과 개신교 측의 주장에 동정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메리의 근본 신앙은 가톨릭이었다. 낙스는 메리 여왕의 미사를 “새 이세벨의 우상숭배”라고 비난하였다. 메리 여왕 앞에서도 군주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동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낙스는 메리 여왕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개혁자의 모습을 계속 견지하였다.
메리 여왕은 결혼 생활에도 문제가 많았다. 1565년 7월 가톨릭 귀족의 아들 단리 경(Lord Darnley)와 결혼하고 가톨릭으로 회귀를 추진하였다. 트렌트 공의회의 여파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견과 주변 정세가 친 가톨릭 정책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데서 온 행동이었다. 낙스는 1565년 8월 19일 설교를 통해 여왕의 결혼을 비난하였다. 자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과 회개로 개혁의 의지를 계속 다짐하였다. 여왕이 친 가톨릭교회정책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격의 수위를 더한층 높였다. 메리 여왕은 비서와의 치정관계를 무마하기 위한 살인 행위, 보스웰 백작과의 추문과 결혼 등으로 인해 수감되었고, 1567년 7월 24일 폐위 되었다. 메리의 어린 아들 제임스 6세(James VI, 1567-1625)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승계하였다. 모레이 백작이 섭정이 되어 개혁교회의 보호를 천명하였다. 의회는 1567년 12월 가톨릭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개신교가 국교회임을 선언하였다. 잉글랜드에 머물던 낙스는 1567년 7월 17일 에딘버러로 돌아와 다시 세인트 자일스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
낙스는 1559년 2월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후 13년간 개혁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신학자라기보다 교회행정가였고 설교자였으나, 칼빈의 사후에 베자와 더불어 칼빈주의의 계승을 주도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나의 주인의 나팔을 부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많은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적 개혁교회 신학(Calvinistic Reformed Church Theology)을 칼빈보다 더 철저히 개혁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칼빈의 저술을 접한 것은 1549년 칼빈의 글을 그의 글에 인용하면서부터였다. 앞서 언급한 『여성들의 악마적 통치에 항거하는 첫 트럼펫나팔 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이란 스코틀랜드여왕 메리(Mary of Guise)에게 항거한 글이 그 시초였다. 그는 칼빈이 1564년에 서거하기까지 서신을 교류하며 개혁에 앞장섰다. 자신의 신학 이론을 세우기보다 칼빈의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논문과 편지 등에서 실제적인 신앙생활에 문제들을 논하는 저술활동을 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개혁사』(A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를 비롯하여 6권의 저술을 남겼다.
낙스와 메리 여왕의 관계와 메리의 비윤리적인 행각은 이미 언급되었지만 더 상술할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기수 낙스는 가톨릭을 주장하는 메리 여왕과 일시 타협하기도 하였지만, 대립과 비판의 관계를 이어갔다. 프란시스 2세가 1560년에 사망하여 미망인이 된 어린 메리 여왕은 1561년에 귀국하여 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메리 여왕은 낙스의 사후 15년 이 지난 후에 죽었다. 귀즈의 메리는 남편 제임스 V세가 죽자 헨리 스튜어트(Henry Sturt)와 재혼하였으나, 연인 데이비드 리치오(David Riccio)와의 사이에서 제임스를 낳았다. 남편 헨리도 죽자 다시 개신교도 제임스 보스웰(James Bothwell)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음란, 살인 행각에 대한 비난이 이어져 개신교 귀족들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568년 영국으로 도망갔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의 왕위를 엿보며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한때 도움을 청했으나, 엘리자베스여왕 역모죄로 1587년 2월 1일 참수되었다.
신·〮〮구교의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571년 봄에는 메리 여왕이 없는데도 에딘버러 성이 여왕 편이 되었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류스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신교도들은 1572년 여름에야 다시 권력을 잡았다. 낙스는 1571년 8월 수도 에딘버러로 돌아와 평생토록 설교한 세인트 자일스 강단에서 계속 설교하였다. 1572년 11월 9일 그가 죽기 보름 전에 그 교회를 사임하여, 제임스 로손(James Lawson)이 강단을 이어 받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고난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생애 내내 주님의 나팔을 부는 삶을 살았다. 그의 확신에 찬 설교는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낙스는 세속정부를 향해 교회가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5) 멜빌의 개혁 계승 발전
낙스의 사후에도 교계의 사정은 복잡하였다.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낙스의 후계자로 개혁을 주도해나갔다. 그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낙스 못지않게 고투하였다. 멜빌에게 주어진 사명은 장로교 정치체제의 확립과 개혁의 완수였다. 세인트 앤드류대학을 졸업한 그는 학문적으로 자질이 뛰어나 일찍부터 최고의 철학자, 최고의 시인, 최고의 그리스어학자로 평가 받았다. 젊어서는 파리대학, 제네바대학의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는 글래스고대학의 총장직을 맡았다. 낙스와 칼빈의 관계처럼 그도 칼빈의 제자 베자(Theodore Beza)와 교류하며 칼빈주의 확산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 낙스가 장로교회의 토대를 놓았다면, 멜빌은 이를 완성시켰다. 주교제도로 돌아가려 한 세력에 대해 멜빌은 사역자 간 평등의 원칙을 무너뜨린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주장은 멜빌이 1578년 4월의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 주교직책을 폐지함으로 실현되었다.
멜빌은 낙스가 기초한 ’제1치리서’가 치리회와 교회의 직원을 규정하지 못한 점을 보완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작성하고, 이를 1578년 코우게이트(Cowgate)에 있는 막달렌 채플(Magdalen Chapel)에서 통과시켰다. 이로써 교리적으로 장로교체제 확립을 공고하게 하였다. ’제2치리서’는 교회 밖 체제로서 총회, 대회, 노회, 당회의 역할과 교회 안 직무자로서 목사, 장로, 집사의 역할에 관한 두 가지 체제의 규정을 설명하였다. 장로교 정치제의 수용에도 불구하고 분파적 싸움은 계속되었다.
제임스 VI세는 정치와 교회에 관한 논쟁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였고,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은 스코틀랜드교회를 그들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제임스 6세는 아란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를 행정수반으로 삼고 반장로교 정책을 펼쳐나갔다. 1584년 의회에서 암흑법(Black Acts)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반장로교적인 것으로 스코틀랜드에 다시 주교제를 두고 국왕이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목회자들에게 암흑법에 서명하라는 압박이 가해지자 멜빌을 비롯한 20여 명의 목사들이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6세의 반 장로교적인 감독제 지지파가 일시적으로 득세하다가 1585년 아란 백작의 몰락으로 힘을 잃게 되어 망명자들이 귀환하였다. 1592년 7월 마침내 국왕과 의회가 ‘제2치리서’의 원리를 인정하였다. 장로교 치리제를 승인한 ‘제2치리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황금법령(Golden Acts or Magna Carta)으로 불렸다. 이로써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회(The Church of Scotland)가 되었다. 장로주의가 국가주의로 법제화되는 형태로 개혁이 성취된 것이었다. 이후에도 제임스 VI세와 멜빌은 감독제와 장로체제를 두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해 대립하였으나, 마침내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동등성과 왕실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혁교회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VI세가 되었고, 잉그랜드에서는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제임스 I세가 되었다. 그의 치세 하에서 흠정역이라 불리는 킹제임스(King James) 번역 성경이 출간되었다. 제임스 I세ㆍ6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거주하여 스코틀랜드와 거리가 멀어졌다.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호감을 갖고 스코틀랜드교회의 정교분리 체제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스코틀랜드교회 안에서도 점차 잉글랜드의 영향이 짙어갔다. 1608년에는 주교들이 다시 나타났다. 1611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감독제를 회복하기 위해 세 명의 주교가 서품되었다. 잉글랜드와는 다른 감독제였다. 총회의 개회일자를 잡는 일에도 국왕이 개입하였다. 1610년부터 그가 사망한 1625년까지 총회는 한두 번 밖에 소집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를 떠난 지 14년 만인 1617년 제임스 VI세가 세인트 앤드류에 와서 스코틀랜드교회를 향해 (1) 성탄절, 부활절과 같은 교회력의 절기들을 지킬 것, (2) 감독의 지시에 따라 견신례를 행할 것. (3) 환자들을 위한 세례와 성찬을 별도로 거행할 것, (4) 무릎을 굻고 영성체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1618년 퍼스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소위 ’퍼스의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이 통과되었다. 무릎을 꿇고 영성체를 받는 것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요구사항들에 대해 반대의 소리가 많았지만 반대자들이 열세였다. 결국 이 조항들이 다 지켜지지는 않았어도 제도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제임스의 아들 찰스 I세(Charles I, 1625-1649)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제임스 I세ㆍ6세 때와 비슷하게 전대되었다. 그도 주교제를 선호하였고, 가톨릭교회 예배를 좋아하였다. 장로교체제를 제거하려고 계획한 것도 그러하였다. 1633년 웨스트민스터의회는 제임스 I세ㆍVI세 때 인준된 교회 관련 법령들을 다시 확정하였다. 찰스는 대관식을 위해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암 로드(William Laud)를 대동하고 에딘버러로 갔다. 대관식이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Scone)이나 스털링(Stirling)이 아닌 홀리루드 수도원에서 열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수도원 교회의 강단은 동쪽 끝에 세워져 있었다. 강단 위에는 성찬대가 놓였고 십자가상을 묘사하는 휘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예전도 잉글랜드 ’공동기도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대관식에 참석한 스코틀랜드 주교들의 절반이 예복으로 잉글랜드의 흰색 제의와 긴 사제복을 착용하였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주교들도 있었다. 다른 이들은 검은색 가운을 입고 회중석에 앉아있었다. 교회의 변형, 주교들의 의상 변경, 예배형식은 교황을 예찬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관식 후에 찰스는 스코틀랜드교회의 법규를 기초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윌리암 로드 캔터베리 대주교에게는 스코틀랜드교회를 위한 새로운 예전을 준비하도록 요구하였다. 1636년에는 ‘교회법전’이, 그 이듬해에는 ‘공동기도서’가 스코틀랜드에 도입되었다. 장로교제도는 거의 무시되었다. 1637년 7월 23일 세인트자일스교회에서 ‘공동기도서’를 도입하고 첫 예배를 드릴 때 이에 반대하는 제니 가데스(Jenny Gedde) 사건이 일어났다. 제니 가데스가 자신의 의자를 설교자에게 던진 것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났다. 찰스 왕이 스코틀랜드 교회법을 지키지 않은데 대한 반감이 발로된 것이었다.
1638년 2월 28일 공동기도서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Greyfriars Church)에 모였다. 이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였다. 모인 회중은 ’국민언약’(the National Covenant)에 서명하였다. 이 서약에는 장로교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서명은 전체 참석자의 지지를 얻었다. 스코틀랜드 전 국민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장로교인들이 결집하여 그들을 ‘언약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1638년 11월 장로교 총회가 18년 만에 글라스고에서 개회되고 윌리암 로드의 ‘공동기도서’와 스코틀랜드 ‘교회법전’은 정죄되었다. 감독제도 폐지되었고, ‘퍼스의 5개 조항도 거부되었으며, 주교들도 파문되었다.
1639년 주교전쟁이 일어났다. 일단 휴전되었다가 다시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에서도 1642년 8월 개혁을 원하는 의회와 국왕 간에 내전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언약파들은 잉글랜드교회도 장로교 체제로 만들기를 바라고 1643년 9월말 “엄숙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조약을 맺고 참전하였다. 스코틀랜드 언약파군과 잉글랜드 의회파 군대가 연합군이 되었다. 이 내전은 1646년 5월 국왕이 스코틀랜드 군에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잉글랜드의회가 6월 12일 총회 소집령을 내려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총회가 개회 되었다. 총대는 151명으로 성직자 121명, 상원 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스코틀랜드교회의 특사도 8명이 참석하였다. 웨스트민스터총회는 스코틀랜드에서와 다르게 왕과 의회에 의해 소집된 총회로 인식되었다. 장로교 지지자들을 주축으로 한 웨스트민스터총회는 1643년 10월 12일부터 다음 5년에 걸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예배모범, 대소요리문답, 장로교 정치서를 만들었다. 독립파가 당시 권력을 쥔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지지를 받고 있어 결정권을 오히려 소수파인 독립파가 쥐고 있었다. 장로교 정치문제만 합의를 보지 못하고 다른 것들은 다 통과되었다. 자율적인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가 세속 권력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반대하였다. 5년 반 동안 1,163회의 회집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총회는 1649년 2월 22일 끝났다. 그때 결정된 것은 잉글랜드에서보다 스코틀랜드교회의 총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세계의 칼빈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헌법처럼 채용하게 되었다. 장로교 신앙의 표준을 세운 것이었다.
장로교 정치체제는 영국에서 문제가 되어 웨스트민스터총회 이후에도 논의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교회의 대표들은 웨스트민스터총회에서 활약했던 했던 것처럼 장로교 체제의 수호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잉글랜드는 1649부터 1660년까지 최고 권력의 공위(interregnum) 상태에 있게 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찰스 II세는 잉글랜드에서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도 감독제를 복원시켰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국왕 찰스 II세에게 스코틀랜드에 장로제도의 재도입을 인정하면 지지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688년 제임스 7세ㆍ2세가 퇴위한 후인 1689년에 무혈혁명을 일으켰다. 1690년 장로교회는 다시 스코틀랜드의 국가교회(The Church of Scotland)가 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막이 내렸다.
4. 나오는 말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와 묘한 역학관계를 가져왔고, 그런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왔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으로 세운 교회는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라고 불린다. 스코틀랜드만이 유일하게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를 탄생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이나 잉글랜드에 비해 뒤늦게 시작되었지만 철저하게 개혁되었다. 장로교 체제의 개혁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코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Scotland)가 되었다. 잉글랜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개혁을 이루었지만, 의식적으로는 가톨릭적인 성향이 강하였고, 수장령에 따라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 정교일치의 교회가 되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독립된 정교분리의 교회로 개혁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처음에는 다 같이 루터파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고, 후에는 칼빈주의에 경도되었다. 그 결과 양쪽 다 청교도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더 강한 개혁교회의 성격을 갖도록 개혁되었다. 존 낙스가 그 개혁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는 유럽에서 칼빈을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로부터 개혁신학을 받아들여 사상적 바탕을 쌓았고, 그 가운데서도 칼빈의 신학과 개혁방향과 방법을 전수받아 나름대로의 청사진을 가지고 스코틀랜드교회를 개혁하였다. 그는 독창적인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종합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주의를 실현한 행동가로서 교회개혁을 이끌었다. 칼빈주의 개혁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회가 되도록 그곳의 종교개혁이 마무리된 것은 낙스의 개혁을 계승한 앤드류 멜빌의 공이 컸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면에서나 낙스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세속의 정치권력은 교회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하는 정교분리의 교회를 만드는 일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처럼 중추적으로 행동한 지도자와 개혁자들이 스코틀랜드인의 강인한 정신과 칼빈주의를 잘 접목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형성하여 개혁의 꽃을 피우게 하였다. 대를 이은 개혁신학 지도자들의 역할이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한 동력이 되었다.
당회, 노회, 대회, 총회로 구성된 장로교회 치리제도는 국왕이나 주교와 같은 인물 중심의 체제보다 더욱 민주적인 체제로 구축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제정은 신학적 바탕을 분명하게 정립하여 장로교회체제 구축에 공헌하였다. 이 고백서는 오늘날에도 세계 장로교회 신앙고백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유럽대륙과 잉글랜드에서는 종교개혁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종교전쟁이 30년 동안 계속되기도 하였다. 잉글랜드에서만 해도 신ㆍ구교 정책이 오라가락 하면서 5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망명사태도 빚어졌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개혁이 오랜 기간 진행되었는데도 신교 25명과 가톨릭 2명, 도합 27명으로 훨씬 작은 수의 인명피해를 내었다. 이러한 결과는 유럽의 장미전쟁과 농민전쟁 그리고 잉글랜드 국가수장의 정책변화로 초래된 재앙을 보고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이 보다 효율적인 개혁방안을 모색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늦게 시작하여 오랜 기간 진행되었지만, 낙스나 멜빌과 같은 개혁자들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정교분리의 장로교 체제를 갖춘 개혁을 이루었다. 이처럼 민주적인 장로회체제를 갖춘 미국, 캐나다, 호주의 교회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에서 선교하여 세계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한국에서 완성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 인구는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 교인수를 훨씬 상회한다. 이는 개혁교회 확산의 책무가 한국 장로교회에게 주어진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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