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이해하는 신학 이야기(1)
신학(神學, Theology)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테오스(theos:신)와 로기아(logia:학)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휘의 시작은 교회가 아닌 고대 철학에서 발생했습니다. 그것을 존 오웬은 <성경신학>에서 명확하게 밝힙니다. 교회에서 신학이란 어휘를 사용한 것은 12세기 정도부터입니다. 그 때 신학은 하나님의 지식인데, 하나님이 아는 지식(원형신학, theogia acretypa)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 지식(모형신학, theologia ectypa)입니다. 신학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과 신학하는 목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학의 시작은 교회의 믿음이 사회적으로 통념화되면서 발생된 것입니다. 즉 기독교 제국과 사회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300년 박해를 견뎠고, 박해 속에서도 성장, 확장되면서 제국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와 교회 밖의 수도원에서 체계적인 지식 체계를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금기 항목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지역에서 연구되었습니다.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체계 방식이 결국 교회의 사유 체계로 정착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즉 신학은 이해하기 위한 신학과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세 스콜라 신학은 이성과 은혜(계시)의 조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지만 실상은 이성으로 추구한 구도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스콜라 방식의 신학 구도를 배격하고 하나님의 절대성과 계시에 의존해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신학은 두 방면 이성으로 하는 신학(인문학적 신학)과 믿음으로 하는 신학(계시로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이성 혹은 계시로 하는 신학이어도 교회 역사와 성경을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텍스트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됩니다. 이성으로 하는 신학은 교리로 전개하는 신학을 거부합니다. 그러한 양상은 성경을 강조하는 청교도 신학에서 징조가 보입니다. 급진적인 침례파에서는 오직 성경경을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더 과격한 성경주의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소극적으로 혹은 침묵하기도 합니다.
신학은 첫째 이성으로 하는 신학(인문학적 신학), 둘째 믿음(계시)으로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성의 합리성으로 사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하고, 후자는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며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럼에도 신학은 학문이기 때문에 학문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학문 자체의 즐거움을 목표로 신학을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두 방면,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서 그리고 자기의 영적 그리고 지식의 즐거움(지식의 향연)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 참고로 조직신학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조직신학이 어려운 것은 교회사에 등장한 생소한 인물들의 정보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경신학(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것은 조직신학은 이미 판결된 사안들을 정리하면서 정립하는 것이고, 주경신학은 과거에 판결된 사안을 피해서 새로운 해석 가치를 창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신학은 조직신학, 구약신학, 신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서구 신학계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이 한 파트로 형성되어 있고, 우리나라도 조직신학이 약화되면서 그러한 경향이 등장합니다.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은 기독교 사상사를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조직신학은 사상과 역사에서 형성된 문서에 대해서 분석하고, 역사신학은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실천신학은 예배학, 설교학을 기본으로 예전학, 교회행정학 등 다양한 분과가 있습니다. 예배학과 설교학의 기초는 조직신학적 지식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선교신학은 복음을 전하는 전략과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분과입니다. 조직신학 안에는 신학서론, 신론, 인간론(인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7 과목이 기본 구성이고, 현대신학, 교리사, 변증학, 험증학, 윤리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윤리학의 범위가 광의적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분과가 되어도 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필요로 하는 세속 문제와 신학의 가치를 연결하면서 분석해야 합니다.
조직신학의 7과목은 사도신경의 구조(로마서의 구조)입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마태복음 16:16입니다. 신학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합당하게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며 마칩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합니다. 신학을 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한 목적과 함께 개인적 학문의 향유를 위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복된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즐거움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학문은 진선미인데, 교회를 위해서는 진리와 선(착함)을 추구하지만, 개인을 위해서는 미(美, art, beauty)가 구현됩니다. 세상에서는 미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교회에서는 덕(德, virtue)을 가치로 생각하지만, 학문의 즐거움인 미에 대한 기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덕은 인간 성품의 탁월성을 갖는 것입니다. 덕을 함양하기 위한 훈련을 "건덕, edification(의식의 고양)"이라고 합니다. 신학은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건덕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개인을 위해서 미(art)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 공맹은 인의예지(仁義禮智: 맹자의 사단설(四端說)를 추구했고, 예(藝)’는 도(道)와 덕(德) 그리고 인(仁)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제언합니다. ‘예술(藝術)’은 육예(六藝)와 육경(六經)을 포괄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른바 시(詩) 악(樂)과 서(書) 화(畵)를 통칭하는 것인데, 인간의 사유와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학문을 하는 목적 중 하나는 분별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면서 형성된 악은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는 것(사 5:20)입니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 신학이 아닌 영광의 신학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으며 전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선이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은 것이 악입니다. 신학을 하게 되면 영적 분별력이 체계적으로 형성됩니다. 체계적이라는 것은 감정과 주변의 다양한 변수에 의해서 판단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식견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발생합니다. 감정과 변수들을 정리할 수 있고, 오직 교리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신학의 제일 원리는 원형신학을 모른다는 것,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는 것(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입니다. 즉 인간은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 절대적 값은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절대성을 부여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교리입니다. 교리는 1차 교리 정통신학과 2차 교리(17세기)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성경이 원형권위(norma normans)이고, 교리는 2차권위(norma normata)입니다. 그러나 1차 정통교리(325년 니케야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규범은 절대적 가치로 봅니다. 그것은 법리적으로 그렇습니다. 4번의 회의이지만 결정된 사안은 2건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이심(즉 삼위일체)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한 인격에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정된 교리에 근거해서 신학할 뿐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절대선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양쪽으로 경계선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과도하게 나가는 것과 과도하게 신성화되는 것 두 방향의 극단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과도하게 세속화, 인간화되는 것은 계몽시대에 자유주의가 구축했고, 신성화 문제는 교회가 시작하면서 영지주의(그노시즘)가 수 없이 변화되면서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좀 쉽게 구분하면 이성주의와 신령주의가 양극단에 있는 것입니다. 양극단 사이에 절대규범선이 있을 것이며, 절대규범선을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 양극단 사이에서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자기 정체성을 파악한다면 믿음의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땅에 쉬운 것은 없습니다. 쉬운 것은 익숙한 것인데, 처음부터 익숙함이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익숙함으로 유혹하는 도전이 있는데, 이단 교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익숙함을 느낄 때에는 속임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익숙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수년간 치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1-2년에 익숙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1-2년에 익숙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거나 해로운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의 우등함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쉽게 외래 정보를 익숙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수 많은 학문 훈련도 결국 이질적인 정보를 견디는 것이지 즉각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 훈련이 된 인격은 생소한 정보를 잘 견디며 합리적 분석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든지 버리든지 간직하든지 하게 됩니다. 다만 은혜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심으로 간직하게 된 은혜의 지식들이 있습니다. 이성과 은혜가 만나는 교차 지점도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과 은혜를 혼용하거나 이성의 가치를 허용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정통신학은 이성과 은혜의 영역은 명확하게 구분되며,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최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통 신학의 가치(자유의지를 거부함)에서는 부당한 표현입니다. 자유의지를 인정한 부류가 표현하는 문장인데, 자유의지를 주장한 부류는 5세기 펠라기우스, 16세기 에라스무스, 17세기 알미니우스입니다. 그리고 계몽철학의 후예들인 철학계에서는 모두 자유의지를 주장합니다. 신학은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학문(Credo ut intelligam: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신학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 예수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를 변호하기 위해서 훈련하는 분야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사는 구조에서는 반드시 상대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어떤 체계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구조가 구축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가장 광범위한 포괄성을 갖지만, 배타적 복음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논리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서 거주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사유와 언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학문 특히 신학에서는 겸손과 인내가 기본 인격 성품입니다. 학문을 깊이 하면 할수록 겸손과 인내가 증진되어야 합니다. 교만과 성급함은 학문성을 파괴합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 목적(目的)과 목표(目標) : 목적은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 목표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지향하는 실제적 대상. 목표는 구체적이고 측정이 가능하고, 성취할 수 있는 과제이고, 결과지향적이고, 달성 가능한 날짜가 있어야 한다. ‘스마트(SMART)’로 요약된다. Specific : 구체적인가? Measurable : 측정 가능한 것인가? Achievable :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Result-oriented : 결과지향적인 것인가? Time-bounded : 달성 가능한 날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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