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루터 생애 연구 간략 연보 - 고경태 -

형람서원 2024. 4. 2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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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의 보름스(Worms) 칙령에서 루터는 출교되었다. 단죄가 결정됨에 따라 루터는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후 프리드리히는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납치를 가장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밀하게 숨겨두게 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년 가까이 숨어 지내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는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3개월만에 번역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인쇄업자를 통해 1522년 9월 21일에 "독일어 신약성경"을 출판되어 배포되었다. 이 성경은 “9월 성경(September Bible)” 또는 “루터의 성경(Luther Bibel)”으로 불린다.

1526년 슈파이어(Speyer) 제국의회에서 루터를 지지하 제후들이 자기 영토 안에 더 이상 로마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루터로 개혁된 교회를 교회로 받아들일 것을 결의했다.

1530년 칼 5세와 개혁파 진영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황제는 종교개혁자들을 “저항자(Protestatio: Protestant)”라고 불렀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했고 그것이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1531년에 시작된 슈말칼덴 동맹은 15년 동안 서로 연대했다. 1532년 7월, 뉘른베르크에서 터키(트뤼키예)의 침공에 대한 방어의 필요에 쫒긴 황제 칼 5세와 슈말칼덴 동맹은 임시협정을 체결한 후에 휴전에 들어갔다(Nürnberger Anstand, 뉘른베르크 휴전). 동맹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은 루터는 1537년 슈말칼덴 조항(Schmalkald Articles)를 작성해서 선제후에게 보냈다.

1541년 4월 5일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가 개최되어 회의에서 합의했지만, 루터측과 교황측에서 모두 거부하면서 결렬되었다.

교황은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북부 트렌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개혁파는 외적, 내적으로 갈등에 있었다. 외적으로는 슈말칼덴 전쟁이 발생했고, 개혁 교회 진영에서 플라키우스를 중심으로 순수 루터파(Gnession-Lutheran)와 멜랑톤을 중심으로 필립파(Philippisten)로 나뉘어 논쟁이 있었다.

칼 5세는 더 이상 협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1543년부터 무력으로 일치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터가 소천된 뒤에 1546년 벌어진 슈말칼덴 전쟁은 프로테스탄트 제후측의 패배로 일단락 되었다.

1546년 2월 18일 마르틴 루터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1547년 1월 28일에는 영국 왕 헨리 8세, 그리고 1547년 3월31일에는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가 사망했다.

슈말칼덴 전쟁은 1552년 파사우 휴전 협정 이후, 1555년에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내용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Augsburger Religionsfriede)을 체결했다. 신성로마제국의 개혁파는 1580년에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작성해서 합의했다. 일치신조가 루터파의 최종적 신학 형식이다.

그러나 분쟁의 불씨가 계속 남아있었고 종교 전쟁의 발발했다.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은 구파와 신파의 각축 장으로 유럽의 각 진영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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