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서 대두된 문제는 “예수님께서 받은 칭의”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칭의를 받으셨는가? 구글(GOOGLE)에서 Jesus’s Justification를 검색하면 의외로 많은 검색이 올라온다. Justified in Christ: God's Plan for us in Justification( edit, K. Scott Oliphint, Mentor, 2007)를 <그리스도의 칭의론>(CLC, 조영천, 2017)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개핀은 “부활과 동시에 주어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칭의(Christ’s justification)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들에게 전가된다” 개핀은 딤전 3:16(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justified in the Spirit, KJV)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칭의”를 확증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칭의는 신자의 칭의와는 달리 어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의를 전가받은 필요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으신 근거는 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분 자신의 의와 순종이었다”(<그리스도의 칭의론>, 개핀의 “칭의와 종말론”, 60-61).
그런데 justified는 그렇게 쉽지 않은 개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칭의(稱義)’라고 번역하지만, ‘의화(義化)’로 번역되기도 한다. “칭의와 의화”는 한 어휘인 justification (justified)에서 번역하고 있는데, 다른 번역어로 진행하는데, 두 어휘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칭의는 과거완료형이고, 의화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딤전 3:16는 단순하게 의미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저 ἐδικαιώθη(δικαιόω)를 justified로 번역하는데, vindicated(무죄가 입증되다, to declare guiltless)로 번역한 사례도 많다. 둘째, ἐν πνεύματι는 정관사(τῷ)나 ἁγίῳ(거룩한, holy)가 없을 때에는 번역 용례가 일치되지 않는다.
개핀이 그리스도의 칭의를 딤전 3:16에 근거해서 규정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를 두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규정을 세울 때에는 매우 엄중한 성경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 의미의 중의성이 있는 본문을 근거해서 그리스도 이해를 구축하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칭의를 받았다”는 규정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개핀은 예수께서 칭의를 받은 시점을 “부활 후에 승천해서 받은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러한 이해를 생략하고 “십자가 이전의 순종으로 칭의를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의미의 확장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칭의를 받았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ERIK RAYMOND는 2021년 3월에 “Jesus’s Justification and Ours”라는 제목으로 TGC에 글을 개제했다. 레이몬드는 vindicated와 justified를 같다고 제시했다. “The word translated “vindicated” is the same word translated as “justified” or the act of being declared righteous” 그렇지만 무죄한 그리스도께 부여된 칭의에 대해서 어려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무죄함(sinless)은 곧 의로움(righteous)인데, 이미 의로운 자(sinless as rightoeus)에게 칭의하는(justified, vindicated) 모습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예수님의 무죄를 예수님의 칭의로 연결시켰다(He is the righteous one. In this sense, Jesus was vindicated. This is the justification of Jesus). 그것은 예수님의 칭의를 우리의 칭의(our justification)로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무죄한 자에게 칭의가 필요할까? 우리가 받은 칭의는 죄인이었을 때에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었고, 부활의 의가 전가되는 구도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몬드가 “예수님의 칭의가 우리를 구원했다”(Christ’s justification secures our own!)고 선언하는 것은 미흡하다. 예수께서 받은 칭의는 부활의 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부활보다는 십자가에 있어야 한다.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판결(verdict)을 받을 것이다. 그 판결은 칭의(justification)의 종결이 아니라 영화(glorification)의 시작이다. 신자에게 의(rightoeusness)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된다. 마틴 루터를 따라서 “십자가 신학”을 외치는 것도 좋다. 존 칼빈을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도 좋다. 어찌되었든지 신자가 스스로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도록 믿음의 선진들은 가르쳤다. 그럼에도 은혜에 의해서 신자에게 의가 있다는 것도 가르쳤다. 은혜에 의한 의이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수 없고 자기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 49:8)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예수님께서 칭의를 받았다"고 확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과 구주이심을 고백하고 전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주께서 주신 은혜를 사모하며 믿음을 정진해야 한다. 은혜를 주시는 주께 은혜를 받은 백성은 오직 은혜를 주신 주님만을 고백하고 증거한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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