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읽기(5) 복음 : 은혜와 평강
(갈 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1-5, 고경태] 사도인 바울은 -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이 함께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합니다.
여러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 또한(καὶ, also) 아버지의 뜻(의지)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셔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출하셨으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3절). 헬라어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앞에 나옵니다. 우리는 어순(語順)이 중요하지 않지만, 서양은 어순이 중요합니다. 앞에 나온 것이 문장 의미를 결정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사도가 축복하는 “은혜와 평강”의 출처에 대해서 밝힙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기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다고 느꼈을 때에 그 출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어휘가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많은 찬양이 있고, 말마다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에게 좋게 되는 일들, 내가 좋게 느끼는 것들을 은혜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말할 때에 판단의 근거가 나의 지식과 감정에 있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은혜도 평강”은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질 것을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무슨 은혜나 평강도 없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는 이유를 “우리의 양심을 강하게 하여 우리에게 오는 이단들을 차단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이신칭의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루터는 칭의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거나 온 마음으로 온전히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육체가 연약해서 성령의 말씀을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 두 단어가 기독교에만 속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원불교도 자기 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합니다. 또 많은 종교, 철학자, 신학자들이 은혜를 말하기도 합니다. 루터가 말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은혜 개념은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을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이고, grace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은혜(恩惠)와 은총(恩寵)이 있습니다. grace만 은혜로 번역해야 하며, 은총으로 번역하는 것도 무난합니다. 우리 찬송해서 “내 영혼이 은총입어(438장)”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은 은혜를 죄사함으로 규정합니다. 죄사함은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십자가가 있으면 성육신이 있고, 성육신이 있으면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독교적 사유의 시작이 죄사함에 있습니다. 복음에는 죄사함의 교리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죄사함은 회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6-8)
죄사함, 죄에서 구원하여 임마누엘을 이루신 분이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21). 죄사함을 말하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밝혀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파(별칭)라고 하는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사함으로 말하면서, 죄사함의 결정은 자기가 그 사실을 믿고 영접하는 구도입니다. 죄사함은 예수께서 이루신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믿으며 그가 행하신 일이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는 죄를 면제시키고 평강은 양심을 평안하게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두 장본인은 죄와 양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시이며 사망인 두 괴물을 현세와 내세에서 소멸시켰고 발로 짓밟으셨습니다(창 3:15).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죄와 양심, 사망의 굴레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죄사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구주 예수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절망, 영원한 사망을 극복하고 평강의 상태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가르침도 아니고 인간의 지혜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닌,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은혜, 곧 죄사함을 받으며 첫째 양심의 평안과 기쁨을 갖습니다(살전 5:16). 그러나 죄사함이 없으면 결코 양심의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의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고, 양심을 고소하고 두렵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하고,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그 절망에서 스스로 나오는 구도는 율법주의이며, 은혜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나오게 됩니다.
죄는 부당한 예배 및 이상한 종교, 맹세, 순례와 같은 인간적 행위와 관념으로는 절대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행위로는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여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힘쓸수록 더 깊은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죄를 제거하는 수단은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 인사말에 반드시 은혜와 평강이라는 포함시켰는데, “죄와 악한 양심”과 대립시켜 사용한 것입니다.
평강은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이고, peace인데, 평안, 평화, 화평, 안녕 등 다양한 어휘가 우리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히브리어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평안하냐?’라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을 기원하고 인사하지만 어떻게 샬롬이 오는지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에 대해서 축복하지만 복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샬롬이 오기 위해서는 죄사함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샬롬의 시대는 죄사함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이 순서는 매우 정확하며 절대적입니다. 샬롬이 오면 죄사함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 전도에서 매우 심각하게 도전을 받습니다. 빵과 복음에서 우리는 먼저 빵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자기 행위와 전도의 순서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복음의 역할을 망각하며 복음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샬롬과 빵이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하지만 죄사함 없는 샬롬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이 없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고 현대신학입니다. 그 신학 시대 300년의 유럽과 미국의 결과는 동성 혼인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모든 성적지향성을 개방하고 이제 동물에게 예배를 허용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 당시에도 죄사함이 없는 신학에 대해서 경종을 울렸는데, 지금은 죄사함의 믿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회개를 말하면서도 죄사함을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사함에서 강조되는 것은 죄의 자각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죄사함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은혜와 평강을 오히려 이단적이고 악한 것으로 정죄합니다. 세상은 자유의지와 이성의 빛, 자연의 건전한 능력과 속성, 선행을 은혜와 평강 즉 죄사함과 평안한 양심을 식별하고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된 죄사함을 통하지 않는 양심의 평안이나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양심의 평안과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스스로 평강을 찾으면 찾을수록 더 심각한 불안에 떨어집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묘한 교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사함 없이 양심의 평안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이 필요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헛되다고 진리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 말씀 안에서 양심의 평강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갑의 두께에서 양심의 평안을 찾지 않습니다. - 지금은 디지털로 진행되어 두께도 아닌 숫자(통장의 잔액)가 되었습니다 – 돈이 많으면 평안하고 돈이 없으면 불안한 세상입니다. 많은 돈으로 힐링을 누리며 평안을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안은 결코 참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누리고 싶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권면하고 강권하지만 억지로 끌 수는 없습니다. 은혜의 백성도 동일합니다. 은혜의 백성도 복음이 없으면 결코 참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다른 온갖 종류의 은혜와 평강과 올바르게 구분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세상의 군왕이나 관원들로부터 평강을 얻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유는 세상의 군왕이나 관원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박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름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때문입니다(시 2:2). 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고(요 16:33), 바울은 박해를 주는 세상에서 평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시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1688년 명예혁명, 1800년 프랑스혁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시대의 중심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겨진 시대입니다. 참 묘한 이해입니다. 1세기 사도 바울 때는 박해시대이며, 18세기는 자유시대였습니다. 자유시대는 세상에서 평안을 제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세상에서 평안을 제공할 수 없었고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연극 등을 거부했고 음악도 매우 절제시켰습니다. 과격한 청교도 시대에는 사회에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시대는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평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에 질식되어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기를 기원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늘의 평안을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7). 세상의 평강은 우리에게 재물과 몸의 평안을 줍니다. 정신적 고통과 사망의 순간에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우리 마음속에 어떤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번성에도 교만해지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승리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죄사함과 생명의 확신 가운데서, 양심의 평안과 확증을 갖습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하늘에게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놀라운 것을 선물하십니다. 선물의 내용은 ‘죄사함’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주심으로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갖는 평안은 가장 확실한 담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끄러움으로 나의 부끄러움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을 위해서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으로 가장 역동적인 삶으로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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