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도가 신학용어를 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학이 학문으로 기능이 있다는 것은 신학용어 사용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사용하는 것이 하나이다. 동일형태의 어휘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 혹은 유사 의미 등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독자는 저자가 사용하는 어휘를 명료하게 파악한 뒤에 사용해야 한다. 저자가 나와 다른 의미로 사용한 동일어휘를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결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도 다양한 신학자들이 사용하기에 그 의미를 잘 살펴야 한다.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부활”과 “전통적인 부활”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게쉬히테(Gesachite) 부활”과 “히스토리에(Historie) 부활”로 나눌 수 있다. '부활', '부활', '부활' 그러니 '나의 부활'도 '같은 부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게으름'이거나 '불충성'이다.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와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사용하는 것 같다.
첫째, ‘이중전가’는 소요리문답 32문(효력있는 부르심)과 33문(칭의)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6–19문답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전가(轉嫁, imputation)’는 ‘허물이나 책임(責任) 따위를 남에게 넘겨씌우다’는 의미이다. 이중전가에서 문자대로 “나의 죄를 주께 넘기고(전가), 주의 의가 나에게 넘겨 온다(전가)”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罪)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장 18절)
이중전가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넘겨받아 십자가에서 사하시고, 주께서 택한 자를 부를 때에 부르셔서 의롭다하심(소명)이 의를 넘겨주는 선언, 칭의되는 방식”이다. 주의 구속의 은혜를 복음 전도자에게 들은 그리스도인은 바로 믿음의 주를 믿어 의에 이른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십자가의 피의 효력이 나의 죄를 씻으심을 믿고, 거룩 정진을 진행한다. 이 때 나의 삶의 짐을 주께 맡기는 것이지, 나의 죄를 주께 전가시키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죄를 고백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의 효력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인이 그리스도인 되도록 할 때도 피의 효력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식에도 피의 은혜가 유일하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둘째, ‘이중칭의’에서는 먼저 justification이라는 단어부터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justification은 ‘의화’, ‘칭의’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영어 사용자는 justification에 두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한국어 사용자는 justification를 자기 의미를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이중의화(이신득의)’, ‘이중칭의(이신칭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전자는 로마 카톨릭의 이해이고, 후자는 마틴 루터와 칼빈의 이해이다.
마틴 루터는 1517년 95개조항 반박문에서 교황주의(면죄부 효력)에 대해서 전면 거부를 선언했다. 죽은 자의 죄 사면은 인정할 수 없었고, 산자의 죄의 사면도 교황의 면죄 효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효력이 발생한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sola fide). 그리고 루터의 칭의와 성화에서 유명한 선언 Simul Iustus et Peccator이 있다. 루터의 이신칭의 선언은 파격적이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쉽게 대처할 수 없었다. 결국 1564년에 트렌트 공회의를 열면서 정경성과 의화교리에 대해서 부랴부랴 확정했다. 그것도 justification이고, 주입(infusion)이다. justification과 infusion으로 연결된 ‘의화교리’가 있다. 의화교리의 시작은 세례에서 시작하여, 견진성사, 혼인성사, 종부성사 등으로 일생을 진행한다. 그리고 사후(死後) 면죄까지 교회가 관장하는 방식이다. 의화교리를 견지한다는 것은 결국 연옥 교리, 사후 사면권 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신학 구도이다. 지금은 보편구원론까지 확장되었다. 보편구원론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7)
루터의 이신칭의와 Simul Iustus et Peccator은 종교개혁 후예들의 기본 신앙 명제이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그런데 칼빈은 성화에서 은혜를 강조했다(duplex gratia). 칼빈이 주장하는 ‘이중은혜’는 ‘이중칭의’와 동의어이다. “처음 은혜로 시작한 구원은 진행과 마침도 은혜이다. 처음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은 진행과 마침도 믿음이다.”의 의미로 ‘이중칭의’이다. 칼빈의 성화론(기독교강요 3권)에서는 자기 심장을 내어 놓은 칼빈의 뜨거운 심장을 보아야 한다(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원수의 소굴에서 바른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긴박감을 느껴야 한다. 이중칭의에서 시작은 은밀한 구원을 믿음으로 세례를 베풀고, 은밀한 예정은 성도의 견인을 확정한다. 칼빈은 이중예정을 불변하는 절대작정(decretum horrible)으로 밝혔다. 그래서 '세례'는 구원론에서 다루지 않고 교회론에서 다룬다. 칼 바르트 신학은 처음부터 성례전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원의 시작이 교회에 있지 않고, 십자가 구속의 은헤에 있고,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두었다.
참고로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justification을 의화, 칭의로 번역함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라이트가 사용한 justification은 의화로 번역해야 더 합당할 것이다. 그것은 법정적 칭의 이해가 없고, 피의 효력으로 이루어진 구원 개념도 없다. 전혀 다른 복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수준으로 기독교를 재구성한 것이다. 라이트는 의화 교리에, 전가와 주입 교리를 사용하지 않고, 언약 안으로 들어가고 머뭄(getting in, staying in)으로 신학을 전환한 것이다. 법정적 칭의, 십자가 피의 구속 등이 없는 justification은 ‘의화’로 번역해야 한다.
고경태 ktyhb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