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에서 욥이 생일을 저주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내면의 모습...
"내가 왜 태어났을까? 차라리 그 때 죽었더라면~~"
이 욥의 발언에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집중 공격을 하게 된다.
욥의 마음을 위로할 이 누구인가?
나의 진심을 알아줄 이 누구인가?
욥의 세 친구처럼 위로한 척하면서 괴롭히지는 말자.
나의 진심을 교류할 수 있는 친구를 구하자.
나의 참된 친구이신 주 예수
나를 위해 생명을 주어 구원하신 나의 주
[잠언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요한복음 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욥 5장.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 엘리바스의 말이 어찌그리 맞은지, 만물까지 화합정도의 형통을 말한다(22-25).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보호다.
엘리바스가 추구하는 것은 욥의 고난에 대한 분석이다(27).
그런데 그 공부의 정당성에 대해서 먼저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다 맞는 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상한갈대를 꺽지않기를 바라신다.
욥 6:1-13. 친구의 말에 깊어가는 고통
괴로울 때 하나님을 찾아 회복하라는 말이 욥에게 아무런 위로나 힘이되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다.
욥은 인간의 한계의 정점에서 하나님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의를 베푸셔서 우리를 한계까지 몰아넣지는 않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나의 고난의 순간에 죽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새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욥 6:14-30. 의리있는 친구.. 친구의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음. 신의란 친구를 끝까지 믿고 후퇴가 없음.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롬 11:29).
욥은 엘리바스와 친구들이 자신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아쉬워한다.
예측불가능한 와디( wadi), 산위의 얼음이 녹으면 맑은 아래에 홍수가 날 수 있다. 또 필요한 물은 제공하지 않는 시내다.
그런데 욥은 자기 정당성에 대해서 변론하기 시작한다. 욥은 엘리바스보다 더 완전할 것이지만, 결국은 더 진보를 해야될 사람이다. 자기 정당성에 대해서 변호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믿음의 경주가 필요하다.
욥 7:1-21. 완전한 욥과 완전한 하나님.
욥은 힘든 노동, 고달픈 인생을 살아감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영혼의 아픔에 대해서 불만이 나왔다(11).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단련시켜 거룩하게 살도록 하셨다. 그런데 욥은 자기에게 환란(당신의 과녁)을 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고통은 죽음(흙에 누움)에서 끝나는 고통이며, 권징이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부족이 있다.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셨는가?
욥 8:1-22. 빌닷의 주장: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악인을 징계한다. 하나님의 징계에 있는 욥은 더욱 청결하고 정직해서 다시 회복하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욥기를 읽을 때에 세 친구의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의 방법으로 해석할 것을 제시한다. 바른 말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컴플렉스가 있다. 잘나가던 욥에게 그들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인데, 비참한 처지의 욥에게 더 잘하면 하나님께서 회복할 것이라는 권면은 자기 열등감을 폭로하는 것이다.
비록 욥이 친구들과 함께 지냈지만 그들의 열등감까지 감싸주지는 못한 것 같다. 진정한 도움과 위로는 마음을 새롭게하는 것이다.
욥 9:1-16. 욥의 변론,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coram Deo 와 finitum non capax infinitum.
욥은 빌닷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비참한 처지에 있음"의 주장에 대해서, 의로운 척하는 빌닷에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불가해하다. 하나님의 불가해성. incomprehensibility. 위의 라틴문장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로 불가해성을 고백하는 신학문장이다. 개혁신학의 제1원리이기도 하다.
라합. 신화적인 동물인가? 거의 모든 구약학자들은 궁켈 이후로 보고 있다. 라합은 하나님의 실재 창조물로 보아야 한다. 리워야단도 마찬가지다. 풀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로 보아야 한다.
욥의 0.01%의 과오. 하나님 앞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써서 의롭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간구함,
하나님이 대답하셔도 내 음성을 들었다고 내가 믿지 않겠다(16절).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형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돼나? 의인은 끝없는 정진만이 있다. 잠시의 안위나 쉼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불충한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soli Deo gloria.
욥 9:17-35. 욥의 탄원. 자기보다 못한 악인의 폄훼에 대해서 증명하지 못하는 답답함.
세상에 기가 막힌 일이 많다. 그 중에 하나는 똥X묻은개가 겨X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이다. 유사한 성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친구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했다면 이런 결과가 없을 것인데...
그러나 사람의 입은 바꿀 수 없기에 욥은 하나님께 신원을 한다. 욥의 신원은 정당하면서 부족함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 후 사도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라고 대적자들을 행동에 대해서 술회했다. 그 이유는 빌 1:8. "하나님이 내 증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은 고요에서 평안해야 하는데, 외로울 때 평안한 하고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인 밖에 없다. 세상사람모두 날 버려도 나는 주님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네...
오늘도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욥 10:1-22. 죽음을 토로하는 괴로움...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고통은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받은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의 외침은 아버지의 외면이었다. 죄없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무고한 욥은 자기의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고난으로 생각해서 고통의 신음을 한다. 욥은 종으로 피조물로 충성을 다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서 나오는 죽음의 탄식은 나의 고난에서 침묵을 부른다. 주의 성전에서 너는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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