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욥기 11-19장 간이 묵상-고경태

형람서원 2014. 7. 3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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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1:1-20절. 소발의 판단. 너의 환란은 하나님의 지혜이니 회개하라.

 

1. 소발의 그릇된 판단. 그릇된 판단은 그릇된 결과를 낳는다. 소발은 욥의 진술이 "자기가 깨끗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욥은 자기가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소발은 자기판단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을 제시하였다. 욥은 "자신은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고백했다(욥9장). 소발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의 대변자로서 역할을 한다.

 

2. 소발의 전개: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 하나님의 지혜의 광대함을 네(욥)가 어찌알 수 있겠느냐? 곤경에 처한 사람이니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12절). 하나님의 지혜는 평안한 상태인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었다.

 

3. 소발의 결론: 네가 회개하면 네가 환난을 잊을 것이고 네게 희망이 있을 것이다. 소발의 결론은 욥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죽이시고 등으로 하나님으로 결론이 된다. 소발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결론된다.

 

 

 

욥 12:1-25. 욥의 1단계 총정리.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논하지 말라.

 

1. (1-6) 욥은 친구들이 너무 평이한 내용으로 반격한 것으로 평가한다. 단순한 지식 혹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의 체계로는 온전히 평가할 수없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냐?"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2. (7-12) 창조주 하나님은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도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생명도 지으신 여호와께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이 구졀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는가? 늙은자의 지혜와 명철이 있어야 한다.

 

3. (13-25) finitum non capax infinitum. 무한은 유한을 파악할 수 없다. 모든 영역에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표현한다. 한나의 기도와 비교할수 있다.

진실과 충성이 파기되는 불합리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은 빛이 난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파악할 수 없다.

 

-> 속단하는 초보들의 질문과 공격에 대해서 너그러이 받아주며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욥은 심한 곤경에서 대답하는 과로움이 있다. 주의 백성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너그러움과 예리함이 있어야 한다.

 

 

 

욥 13:1-19. 욥의 만용, 하나님과 변론을 요구함.

 

1.(1-4) 이사야 1:18에서 여호와께서 범죄한 유다에게 선포하신 말씀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이다. 백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욥은 세 친구와 대화의 한계를 분명하자, 하나님께 변론을 청한다. 세상사람보다 아무리 깨끗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잠해야 한다.(열광주의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2. (6-12) 세 친구의 한계. 외눈박이 왕국에서 온 외눈박이들. 집단기억상실에 걸린 21세기.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역사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 미국은 인디언 위에 국가를 세워 세계경찰국가로 인권을 자부한다. 구교는 남미에서 인디오를 혼혈과 방탕으로 정신을 혼미시켰다. 현재도 변론으로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오직 잠잠하라. 죄인도 의인도 잠잠하라.

세월호의 아픔, 충격 그리고 놀람.

 

3. (12-19) 욥은 친구들에게 잠잠하라고 촉구한다. 더 이상의 수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항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아버지이시지만, 그의 죄를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시다. 욥은 그 심판주를 부르고 있다.

 

 

 

 

욥 13:20-14:22. 하나님께 변론을 위한 조건(손을 대지 않음, 위엄으로두렵게하지 않음)과 허무한 인생의 끝에 주의 보호와 부르심.

 

1. (13:20-28)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소서. hand far from me, let not afraid, 욥이 하나님께 청원했지만 지존자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이 젊은날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한다.

손을 대지 않음은 신성과 접촉이 되지않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절대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욥은 자기 한계에서 죄악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2. (14:1-22) 허무한 인생, 죽음과 그 이후의 소망. 인생은 꽃처럼 빨리시드는 날이다. 그러나 나무는 찍혀도 그루터기의 연한 가지의 희망이 있다. 장정이라도 반드시 죽으며, 누우면 눈을 뜨지 못한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스올에 감추시고, 부르실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주께서 욥의 죄악을 감찰하니 희망이 끊어진 절망이다. 사람들은 주께서 존귀 혹은 비천한 대우를 깨닫지 못한다. 다만 괴롭다고 외칠 뿐이다. -> 욥은 자신의 처지의 난감함 속에서 여호와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렵고 무지에 대해서 확신하면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 아무리 확실한 것도 여호와 앞에서는 초개보다 못하니, 너희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 겸손히 주의 자비를 구하라. 그리하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욥 15:1-16. 엘리바스의 정죄.

 

1. (1-16) 그는 욥이 동풍을 배에 채우는 행동이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을 엎신 여긴다고 주장했다. * 동풍은 뜨거운 바람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반론에 체계적인 답변이 아닌, 자기중심적이고(8-9절) 나이많음(10절) 등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엘리바스는 자기 말이 무시된 것으로 생각하고 불쾌한 마음으로 욥에게 항변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고집은 교정을 거부하는 자기세계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더 크고 강한 장벽을 쌓는다. 이 벽은 죄로 인한 것이기에, 오직 십자가로만 제거된다.

 

 

 

욥 15:17-35. 자칭 인생 고수 엘리바스.

 

1. (17-25)엘리바스는 스스로 조상으로부터 지혜, 비법을 받은 사람으로 자처했다. 그 지혜는 현재 환난과 역경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1) 누가 우리 일상에서 이렇게 말할까? 그러나 마음으로도 이러한 정죄를 하지 않아야 한다. (2)자칭 지혜자는 자칭그룹안에서만 효력을 발생한다.

 

2. (26-35) 악인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엘리바스의 주장이 절반만 옳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 허락하시기도 하고, 애매한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십자가 이후로는 백성에게 애매한 고난은 상당히 주어지고 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고난의 성격을 잘 분별해야 한다.(벧전 2:19)

결국 엘리바스의 성급한 판단은 욥 환난이전부터 자기안에 있던 분노와 억눌림에 대한 표현이다. 고난받은 형제를 위로하거나 존대할 자를 존대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뿐이다.

 

 

 

 

 

욥 16:1-22. 재난을 주은 위로자 VS "나의 증인, 나의 보인"을 구함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데 계시니라. -> "보인"(개역)이고 개역개정에서는 "중보자"로 바꿨다. 전 번역이 더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보인은 niv, advocate로, kjv에서는 record로 번역했다. 중보자로 개정된 것은 아쉬움이 있다. 원어도 나의 대변자, 변호인의 개념이다.

 

1. (1-5) 엘리바스의 발언을 욥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로 평가하며, 자기입으로 자기의 근심을 풀었다고 지적한다. 남의 환란에서 위로를 얻는 것, 강건너 불구경. 남의 어려움에서 위로를 얻으며 기뻐하는 것은 악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가 쓰는말 "그럴줄 알았어"라는 것에 이미 엘리바스와 같은 마음이 있다.

 

2. (6-14) 도움과 위로를 찾지 못한 욥은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욥의 고통이 매우 클지라도 하나님은 정당하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 하소연을 계속한다. -> 원수에게 내어준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욥은 종으로써 충성한 믿음의 선진이다. 십자가로 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자로 스스로 종이 되어 입술과 행동으로 범죄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3. (15-22) 욥은 자신의 순수함과 기도에서, 증인과 변호인을 구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간청하는 역할을 한다. 욥은 자기가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날 동안에 이루어질 공의를 기대한 것이다.

 

 

 

 

욥 17;1-17. 무덤 문 앞에 고독자의 심정. 외로이 믿음에 정진할지라도 자기 의로움에 대해서 현세에서 인정받으려 한다.

 

욥은 10자녀의 죽음, 부인의 도망, 친구들의 모욕적 위로에 땅의 소망이 사라졌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든다. 오직 하나님이란 것이 얼마나 인생에서 처참하고 비극인가? 그럼에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큰 신비다.

 

욥은 자기의 마음과 육신이 무덤 문 앞에 놓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세 사자가 으르렁 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자의 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는 신묘막측하다. 그 상황에서 욥은 믿음의 정진을 결심한다.

 

욥은 무덤 속에서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으로 고백한다. 그것은 자기의 눈으로 악인의 징계 멸망 회개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의 의로움을 현세에 알리고 싶은 육의 본성의 모습이다. 육의본성이 악하지는 않지만 육의 본성에 머무는 것은 부패한 것이다.

 

 

 

 

욥 18:1-21. 수아 사람 빌닷의 재반격 - 그렇게 맞고도 깨닫지 못하는 너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네가 잘낳냐? 지금 너의 모습이 전형적인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상황(폭삭 망하고,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욥 15장)는 나이 많음 등으로 우월적인 지혜를 내세웠고, 수아 사람 빌닷은 다수의 의견으로 욥을 공격한다(욥 18장). 모두가 그렇다는 데 왜 너만 아니라고 고집하고 있느냐?

-> 주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신다. 대형교회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연약한 형제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뽐낼 때... 그것을 부러워하는 무리가 있는데... 상한 갈대에는 언제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2. (5-21)빌닷은 욥의 고난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면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과거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뜻"을 맞추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얼마전 모 인사가 우리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해서 회자가 된 적이 있었다. 빌닷의 욥의 사실의 일을 갖고서 판단했지만 욥에게 그 사실에 대한 제시는 더욱 가중되는 아픔이 되었다. 즉 빌닷이 욥에게 말한 의도는 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당성(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집단으로 진리를 묵살하고 소수의 진리를 폭압하는 것이 본성이다.

 

 

 

욥 19:1-29. 억울함을 풀어줄 구속자.

 

1. (1-5) 진흙탕 싸움에서 깨끗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격진영과 피해진영이 있다. 욥은 자신이 학대를 받는 다고 느끼며, 그들의 자만을 지적했다.

 

2. (6-12)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억울하게 하며, 자신의 관모(면류관, crown)를 벗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으시며, 성도는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찬양한다.

하나님이 나의 편으로 느껴지지 않음의 답답함은 성도가 갖는 영적침체다. 욥기에서 영적침체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극복된다.

 

3. (13-22) 형제, 친구, 종, 자녀, 아내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한 욥의 심정. 마음 둘곳이 없는 삶. 제자의 심정도 된다.

욥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느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의 주를 보고 모두 도망하면서 느끼는 것과 비교해본다. 그 상황에서 주를 부인하지 않을 자누구랴! 오직 십자가를 지는 제자만 가능하다.

 

4. (23-29) 욥은 구속자를 구한다. 욥은 육체 밖에서라도 하나님을 뵈려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심판주에 신원을 한다.

하나님은 구속주이시고 심판주이시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구속주, 심판주로 등장하신다. 이 세 사역은 성자 하나님께서 하신다.

 

한국성경연구원. 고경태 목사, www.ctim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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