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목회칼럼] 개혁하는 교회: 장로교회. 희망인가? 절망인가?

형람서원 2014. 2. 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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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개혁하는 교회: 장로교회. 희망인가? 절망인가?

 

한국의 기독교는 “장로교”라 해도 손색이 없다. 해외에는 장로교가 많이 없다라고 하면 많은 평신도들은 믿지 못할 소리로 생각할 정도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장로교로 세계선교에 장로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각 선교사들은 선교단체에서 파송하는데 반해, 한국교회는 장로교 교단선교사들이 많고 장로교에서 훈련받은 선교사들이 많다. 이런 장로교가 한국교회의 개혁의 대상이라고 한다. 개혁교회를 이룬지 500년이 된 후 한국에서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로(長老)는 계급이 아니다. 당연히 목사도 집사도 계급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은 전혀 계급이 아니다. 은사에 “권위”도 있는데, 계급이 아니다. 이것을 망각하니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남용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다. 목회매뉴얼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보다 못하지 않는다. 장로교의 목회 매뉴얼은 가장 탁월하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가?

 

그것은 장로교 목회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로교 목회매뉴얼은 너무 단순하다. “법과 질서를 지키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가 장로교 노회와 총회에 법과 질서를 무력화시키는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법과 질서를 제정한 주체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오히려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목민심서]가 자세하게 목민관의 업무방침을 제시했지만 결국 조선은 멸망했다. 그런데 공동체가 협약한 공문서를 무시한다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내부와 외부에 비판을 받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표리부동(表裏不同)과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불법과 전횡은 계속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불행이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로교는 칼빈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교회제도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와 심한 격돌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질서”였다. 칼빈은 질서가 없는 것을 큰 악으로 생각했다. 규제가 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법을 초월하는 세력은 무한한 자유 곧 방종한 세력이다. 법을 초월하는 세력은 장로교라고 할 수 없다. 장로교는 언제나 법에 순응하며, 바른 법-생명과 화합을 위한-을 만들기를 사모한다. 질서가 없는 장로교는 더 이상 장로교가 아니며,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됨은 자명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바로 서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기독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서구의 기독교들이 쇄락할 때에 한국 기독교가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이젠 어쩔 수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 시대에 희망을 주는 장로교는 법과 질서를 바로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세속의 법이 아닌, 우리의 법과 질서를 지킴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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