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 장 2009년 9월 20일(주일 오전)
형제의 화해와 아버지의 기쁨
요셉의 시험에 형제들의 답변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44장). 형들에게 쉽게 나아갈 수 없었던 요셉은 유다의 감동적인 고백에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의 고백이 감동적이었고, 다시 요셉이 자기의 모습을 밝히는 것은 더욱더 큰 감동을 줍니다.
1. 요셉의 고백: 화해의 성취
형들을 시험했던 요셉이 감정에 복받혀서 결국 자신이 요셉임을 고백하게 됩니다(1절). 요셉의 통곡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정의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3절).
요셉은 형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말해주었지만(5-13절), 형들은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유다가 진정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옛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모습이 아닌 너무나 사랑스러운 형제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토록 가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형제들과 부모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는 요셉을 보면서도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했던 형들인데,, 만약 요셉이 총리로 군대를 호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형들은 언제나 요셉을 두려운 통치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베냐민(14절), 그리고 형들과 입맞춤을 통해서(15절) 형들은 요셉에게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과 형들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요셉의 말에 감히 형들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화해의 모습을 통상적으로 악수로 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악수가 조금 발달하지 않았지만, 악수를 하고 하지 않음에 화해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화해(和解)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백성은 화해의 성취인 임마누엘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제사를 통해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할 수 있는 것은 꼭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 제사가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된 인간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방식을 따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과 화해를 하는 것은 잘못을 시인하고 용인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잘못을 시인하지 않음에도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시비(是非)를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더욱 연단되어지는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통합시키는 사람, 즉 화평케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될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터널을 주실 때에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것보다, 하나님을 향한 정진을 원하십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와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나의 옮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요셉과 형제들이 화해를 한 것과 같은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2. 요셉의 기쁨: 충(忠) = 바로의 기쁨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퍼졌습니다(16절). 이 소식을 들은 바로는 기뻐서 형 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속히 궁궐로 초대하였습니다(17-20절).
요셉은 충성된 바로의 신하입니다. 충(忠)이란? 충성은 마음의 중심이 변하지 않는 것, 마음에 중심을 세우는 것이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충신(忠臣)에게는 충신(忠信)된 왕이 있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충성(忠誠)을 다하였을 때에, 바로는 요셉에게 충신(忠信)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기쁨이 바로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충신은 주군에게 청을 할 때에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주군의 유익을 위해서 간언을 합니다. 그래서 충신은 간언에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고 할 때도 있고, 죽음으로 자기의 간언을 포기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임금은 그 충신의 간언과 그의 충심을 알아주는 자가 현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신들 속에서 놀아나는 왕은 간신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충신의 기쁨은 오직 왕이 기뻐하며 번성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충신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바로 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번성은 곧 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놓아지는 곳과 모습은 나의 심장이 가장 흥분될 때입니다. 반면에 나의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곳이라면 생명을 바쳐서 항거를 해야 합니다. 만민이 하나님의 이름의 모욕을 위해서 결의를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 회중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기쁨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되며 또한 우리의 이웃과 교제할 때에는 충(忠)으로 교제합니다. 곧 이웃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며,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충성된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항상 기쁨이 넘쳐나길 원합니다.
[결 론]
요셉과 형제들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잘못을 고백함으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화해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겨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어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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