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 장 2009년 9월 6일(주일 오전)
요셉: 야곱과 그의 아들들
야곱의 아들들은 두렵고 떨리는 애굽의 총리의 심문에 결국 시므온은 볼모로 놓고, 9명의 형제들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져온 곡식 자루에 있는 돈 뭉치는 두려움을 더욱 크게 증폭시켰습니다. 이러한 큰 위기가 야곱과 그의 12 아들이 완전히 회복되며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편애하였고, 아들들은 편애하는 아버지를 싫어했고 사랑받는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1. 야곱의 변화: 신앙의 결단
야곱은 볼모로 있는 시므온을 애굽에 방치하고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습니다(6절). 이러한 모습을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왔을 때에 시므온이 돌아오지 않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확인해야 시므온을 풀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아들들은 적지 않는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 왜 베냐민에 대해서 말했느냐?(6절). 자세히 물어보니까 말했는데, 데리고 오라고 할 줄 알았게는가? 등으로 부자간에 왈가왈부(曰可曰否)가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들어가 시므온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야곱의 편애는 계속되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양식이 다 바닥난 상태에서 야곱은 결단을 합니다(2, 14절). 그것은 자기의 일의 경영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은 “잃으면 잃으리라(14절)”입니다. 이 고백은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가기 전에 고백했던 말과 유사합니다. 에스더는 허락받지 않는 상태에서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죽는 것이었지만, 민족을 위해서 결단하였습니다. 그 결단은 “죽으면 죽으리라(스 4:16)”입니다.
야곱의 결단은 대단한 변화의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화하지 않는 야곱을 변화시키는 것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서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으로,,, 명예를 사랑하면 명예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로 시험을 받게 되는데... 그 시험을 벗어나는 길은 결단입니다.
야곱은 이 결단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고백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받을 만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육의 정욕은 항상 시험을 부릅니다. 그래서 시험과 함께 즐겁게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육신의 즐거움은 나중에는 아픔의 가시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육신의 즐거움은 꼭 아픔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울면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웃으면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는 원리는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한 아들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했지만, 결국 사랑하는 아들 때문에 큰 시험에 부딪혔습니다. 그 시험을 벗어나는 길은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14절). 아들 없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공급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야곱은 여기에서 완전히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과 아들을 맡기게 됩니다.
2. 형제의 회복: 서로 사랑함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형제들은 서로 미워하는 불화의 관계였습니다. 그 불화로 결국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 보다 한 단계 낮게 동생을 먼 나라에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한 큰 죄악 때문인지... 베냐민만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베냐민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요셉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사건은 항상 형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픔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람은 죄의 아픔의 알아야 합니다. 죄의 상처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의 행한 범죄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반성을 하였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어떤 정당성도 부여하는 것은 죄를 은닉하여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그 죄의 아픔을 인식한 형제들은 우애를 가져왔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요셉을 대신해서 베냐민을 사랑했지만, 아버지도 베냐민도 서로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고 위로하였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의 결단으로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에 섰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29절). 형제들이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베냐민에게 5배나 더 주었습니다(34절). 그러나 그 잔치 상은 즐거웠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더 이상의 분규가 없게 되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지막으로 형들을 시험하게 됩니다(창세기 44장).
형제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인가? 사랑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는 공평하게 주실지는 모르지만, 능력과 분깃은 다르게 주셨습니다. 사랑은 같지만 길이가 서로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서로 미워하고 사랑을 갖는 쟁탈전을 벌어야 할까요? 형들은 동생 요셉이 없어지면 다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자기들을 사랑할 것이라고 기대했을까요? 그러나 야곱은 변하지 않았고 베냐민을 대신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요구에 의해서 공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을 요구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이지 않는 사랑의 공급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행할 의무만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한 것이 죄요, 사랑받지 못한 것은 의로운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 론]
요셉의 사건으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아픔만큼 큰 성장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형제들은 완전한 사랑을 실현하게 됩니다. 아픔이 성장을 준다면 아픔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 훈련입니다. 우리는 아픔을 겪지 않고, 경건의 깊은 훈련을 통해서 탁월한 영적 수준으로 성장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형제의 사랑이 충만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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