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 장 2009년 5월 3일(주일 오전)
제목: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습니다.
[누가 구속사의 정통인가?] 아브라함의 장례에서 상주는 이삭(9절)입니다. 이삭의 상주는 에서(35:29)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정통한 상주가 될 수 없으며, 메시야의 계보의 연결 고리가 되지 못하는 위치입니다. 둘은 혈통적으로는 장자가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뒤에 태어났지만 정통한 혈통입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의 조그마한 실수가 장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보다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정통한 장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에서의 한 번의 실수가 장자권을 바꿨지만, 아버지 이삭의 신실함이 에서에게 기회를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계보는 야곱에게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족장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과 사람의 열심히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열심히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고, 야곱에게는 인간의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품은 뒤에서 다시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구속 경륜의 그 오묘함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사에서 아주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를 삶]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에서 이삭이 가장 오래 산 족장입니다(180세). 야곱은 147세(창 47:28절)입니다.
이삭은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 160세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에서와 야곱이 15년을 함께 산 것입니다. 통상 14세가 성인된 나이임으로 에서와 야곱은 성인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때는 아브라함의 시대가 아니라 이삭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아브라함에게도 받게 됩니다. 또한 이삭은 180세를 살았는데, 야곱이 갈대아 우르로 가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손자들을 본 뒤에 죽었습니다. 즉 족장들은 3대가 항상 함께 공존하여서 믿음의 확증이 두 세대가 함께 증언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증언하는 말씀을 에서와 야곱이 들었고, 이삭과 야곱이 증언하는 말을 야곱의 자녀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녀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 우리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보지도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12아들의 고백을 그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12아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항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자신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은 ‘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또 다시 사도들이 믿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만났던 그 예수님, 도마 사도가 경험했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사도 바울이 고백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직접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습니다.
셋째,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태의 문을 닫혔습니다. 이삭은 결혼해서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자 아내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21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잉태를 위한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잉태는 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는 것인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신 잉태의 사건은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적으로 성도를 훈련시켜서 여호와께서는 능치못함이 없다는 것을 교육합니다. 아브라함이 몸소 그것을 경험하였고, 이삭은 오직 쌍둥이 한 번을 낳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시대에는 불행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양극화입니다. 어디에서는 아이가 낳아서 슬프고, 어디에서는 아이가 낳지 않아서 슬픕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서로의 아픔의 나눔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이의 잉태가 슬프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잉태가 되지 않기에 다양한 임신 시술을 하는 것 또한 비일비재 합니다. 모두가 다 비생산적이며 비윤리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가 함께한다면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낙태되지 못해서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떠나야 되는 어린 아이의 운명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잉태되지 못할 때에 성경처럼 꼭 기도해서 자기의 아이를 낳겠다고 하는 것은 꼭 바른 행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언약적 관계이기 때문에 혈육에 얽매이는 행동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비록 혈통적 관계일지라도 철저한 언약적 관계로 가정도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아비의 집을 떠나 독립적인 개체, 독립적인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3- 둘째,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서부터 서로 싸웠고,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겠다고 하셨습니다(23절). 그러나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삭이 여호와의 말씀에 불충하고, 리브가가 여호아의 말씀에 충성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삭은 여호와 앞에 신실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법은 공의롭기 때문에 순리를 어긋나게 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장자로 세우셨다할지라도 정당한 법의 정리가 없이는 야곱은 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하였다할지라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부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 땅의 값을 다 지불하였어도 등기를 이전하지 않으면 그 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마지막까지’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계시대로 야곱에게 바로 장자권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삭의 직무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리브가는 그 충실한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이 했기 때문입니다(34절). 자기에게 주어진 명분을 소홀이 하는 것은 자기의 위치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위치 파악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위치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구원을 주셨고, 또한 은사도 주셨습니다. 은사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때에는 은사는 철수됩니다. 철수된 은사는 다시 회복되기가 거의 어렵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명분(위치, 은사)를 소홀히 여겨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분은 주어졌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호시탐탐 노리는 이리들이 있고, 또한 선한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거나 뒤져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비젼을 주셨는데,,,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혈통적 兄)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벽도 넘었습니다. 그것은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실재적 장자권 그러나 딱 하나 메시야의 혈통을 잃었습니다. 구속의 반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에서의 나라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해도 그것을 위한다는 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 야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12 방백을 두어서(16절) 조용한 이삭과는 전혀 대조적인 삶을 살았고, 에서는 호통한 사나이로서 야곱과는 전혀 대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이 땅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되는 이 땅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보여주셨고, 영원한 나라를 위한 믿음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한 믿음의 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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