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창세기 17 장 제목: 언약식의 웃음

형람서원 2009. 3. 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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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 장 2009년 3월 8일(주일 오전)

 

제목: 언약식의 웃음

 

 

창세기에서 장이 넘어갈 때에 시간을 보는 것은 시간의 무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16:16에서 17:1절의 시간은 (16:3절) 가나안에 들어 온 뒤 10년이 지났고, 다시 13년이 자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13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13년은 아브람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요? 그런데 17장에서 이삭이 낳은 것은 21장입니다. 즉 1년의 세월에는 17에서 21장까지 긴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년은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1년에 대해서는 장황한 기록이 있습니다.

17장의 언약에 대해서는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언약이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체결을 17장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시간을 보는 관점] 우리의 시간 또한 의미 있는 시간과 의미 없는 시간으로 분류됩니다. 의미 없는 시간은 너무나 빨리 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덧없다는 것은 시간이 의미 없이 많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만큼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니(딤후 4:7-8) 얼마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죽을 때를 알고 편지한 베드로 사도 또한 시간을 아끼고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 시간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시간을 잘 관리하여 하루를 천년같이? 하루를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멀티형 인간이 등장합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문가 시대를 외쳤지만, 이제는 멀티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전문 실력으로 현재의 복잡한 세대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봉사와 선한 사람의 봉사를 해야 될 복합적인 사명이 더해지기에 더욱 멀티형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한 시간 관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아브람이란 이름의 뜻은 '높임을 받는다, (큰 아버지)'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비"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임을 받기를 원했던 아브람을 이젠 열국의 아비로 전환시키십니다. 사래(영화, 헌화)에서 사라(열국의 어머니)로 이름을 바꾸었다. 둘은 모두가 높아지는 이름을 뜻에서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이름이 전환되었다.

 

이름의 전환이 로마 교회처럼 세례명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후에 이름을 부가하여 받지 않았고, 어느 사도행전의 세례에서도 세례 후에 이름을 부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이름을 바꾸셨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조상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적 후손과 영적 후손으로 나뉘게 됩니다. 육적 후손은 여전히 아브람의 후손이 되고, 영적 후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육적 후손은 인간의 영화를 위해서 고군분투를 할 것이고, 영적 후손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언약의 증표를 몸에 갖게 되는 할례를 명받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에 할례를 행하고,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게 됩니다. 이 할례로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가 항상 아브라함과 함께 있게 됩니다. 언약의 증표가 항상 함께 있지만 아무도 볼 수 없고 자신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의 증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그리스도됨을 말하고 다닐 수 있는데, 언약의 증표는 쉽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웃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는 육적 할례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였습니다. 아직도 (24년)의 훈련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웃음을 짓는 육적 사람입니다.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육에 매이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웃을 짓게 됩니다. 아무리 긴 세월을 교회 생활을 해도 육에 매이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웃음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에도 믿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8장에서 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중보기도 위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체험한 뒤에도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속이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의 출생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순종은 창세기 22장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몇 년 했습니까? 긴 신앙생활의 년 수가 믿음을 담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육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할례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산법과 자신의 계산법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계산법이 맞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거나, 불평과 원망을 의심을 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음이 언약의 기본 요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00만 원짜리 물건을 10만원에 판다는데 조건을 붙일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일을 하는데 수 억 원을 지원해준다는데 왜 지원하느냐고 꼬치꼬치 불친절하게 물을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면 하나님께 어떤 이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이 신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가?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정답은 알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은 놀라운 변화, 놀라운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언약의 대상이 되신 것을 감사하고, 언약의 부요한 은택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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