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 장: 방황하는 제사장에 이는 타락한 제사장
제사장의 부패는 근본의 부패이다. 종교의 부패는 민중들의 정신이 부패된다. 종교가 부패된 국가가 패망하지 않는 국가가 없다. 그런 사사기의 상황에서 요구는 ‘왕’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패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방법은 ‘왕’인가? ‘부흥’인가?
(1-9절) 첩을 둔 레위인의 우유부단함 레위인은 구별된 지파로서 정결한 아내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음란한 여인을 첩으로 취했을 뿐만 아니라, 집을 나간 첩을 찾으러 쫓아간 레위인이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1-3a절) 자기 딸을 찾아온 사위에게 장인은 현란한 접대로서 계속해서 함께 머물도록 간청하고, 레위인은 그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다(3b-9절).
1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In those days Israel had no king. - 17:6, 18:1의 반복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의 문제이다. 백성들은 왕을 요구하는데,,, 진정한 해결방법인가에 대한 복선을 갖는 말씀이다.
첩을 둔 레위인의 정욕: 자기 처소를 떠난 레위인(18장)에 이은, 제사장의 타락이 드러난 부분이다. 전자는 가난해서 처소를 떠났고, 후자는 부유해서 처소를 떠났다. 가장 공평해야 될 제사장들의 소득의 불균형은 커다란 문제가 있다. 제사장에 대한 비판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힘든 제사장에게 부를 소유하라고 권면할 수 없고, 부유한 제사장에게 무능하라고 권면할 수 없다. ▷ 제사장은 첩이 행음을(unfaithful, NIV)1) 하고 이탈했음에도 그 여인을 그리워한다. 행음한 여인은 다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죽음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기관에 속한 레위인이 율법을 어기고, 자기의 첩을 데리러 간 것이다. ▷ 개역 성경에는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지만, KJV, NASB는 원문에 충실히 “against him”로 번역했다. 즉 남편의 어떤 행동에 대한 반항으로 행한 행음이 된다. 남편의 어떤 행동이 아내로 말미암아 행음을 부추겼는지는 추측이 될 수 있다. 시대의 악함을 알 수 있으며,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이러한 모습은 발생한다. 오히려 부부 스와핑은 신사적으로 행음하는 부패가 만연된 모습이다. ▷ 제사장은 4 개월 후, 집나간 첩을 찾으러 장인 집으로 간다. 그는 첩에게 권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첩을 얻은 것, 간음한 여인을 사모하는 것, 레위인의 정욕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시대(21세기)의 일그러진 정욕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딸의 미모만 사모하며, 하나님의 딸들은 아들의 능력만을 사모한다. 순결에 대한 개념, 배려는 없다.
(4-9절) 우유부단한 레위인: 정욕이 많은 레위인은 또한 결단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자기 딸을 찾아와 준 사위에게 집요하게 접대하는 손길을 레위인은 뿌리치지 못한다. 장인은 사위에게 삼일은 인사치레로(4절), 기력을 위한 보양식으로(5-6절), 반나절의 시간을 허송하게 보낸 후에 다시 유혹해서 갈 길을 가지 못하도록 권유한다(7-9절). 죄에 대한 교정이 없이, 향락으로 보답하며 함께 즐기는 장인과 사위의 모습이다.
[통치자를 갈망하는 본성] 통치자는 구조적으로 피지배 계층에 억압을 준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죄악된 본성은 어느 정도의 억압 혹은 피동적인 면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보호할 통치자(왕)를 요구하지만, 통치자는 보호 기능과 함께 통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즉 완전한 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부족한 무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2%가 부족할 때에 전체가 부족함을 느끼는 본성의 갈망을 충족시킬 것은 무엇인가? 현상적인 것(말로만)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며, 본질적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그러진 인간 본성(=죄악된 본성)은 항상 그릇된 것을 욕망하게 된다. 참된 채움을 받기 위해선 성령과 회개로만 가능하다. 형식이나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석자이며 적용자인 인간 본성을 고쳐야 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 구조로는 창조자인 인간의 본성을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영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개조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율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율법을 따라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여호와께서 백성의 규범으로 율법을 주었지만, 백성은 율법을 보지 않고 가나안 주민들의 우상숭배를 쫓는다. 결국은 이방 국가들의 제도인 “왕”을 세우기까지 나아간다.
▷ 1절, 18절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a Levite who lived in a remote area in the hill country of Ephraim(NIV), there was a certain Levite sojourning on the side of mount Ephraim(KJV), was a certain Levite staying in the remote part of the hill country of Ephr(NASB).
07/12/25. (10-21절) 여부스가 아닌 기브아에 들어간 레위인: (10-13절) 해가 질 무렵 여부스에 도착한 일행은(11절) 이방인의 근거인 여부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동족인 베냐민의 땅인 기브아를 선택한다(14절). 그러나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제사장이 청한 집은 모두 거부당했다(15절). 그러나 노인이 그 일행을 영접하여 들인다(16-21절).
10-14절) 여부스가 아닌 기브아에서 유수하기를 원하는 레위인. 레위인은 이방인의 땅인 여부스보다 베냐민의 땅인 기브아에서 유숙하기를 원한다. 본 구절에서(10절) 여부스가 아직 성취되지 않는 땅으로 제시된다. 왕의 땅이 될 예루살렘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여부스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레위인. (1) 그리스도인 제품을 애용하는 사람에게 더욱 큰 기쁨을 줍시다. 기독 경영인들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불신 경영인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서, 기독 경영인의 제품을 애용하는 지체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나그네가 유숙할 곳이 없는 기브아] 레위인이 여부스를 피해 기브아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기브아에 유숙할 곳이 없다(15절). 여호와의 백성들은 나그네의 벗이 되어야 하는데, 나그네를 접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들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다(15절). 그런데 에브라임의 동향 사람을 우연히 만나 유숙을 하게 된다(16절). 이 노인은 자기도 이방인으로서 홀대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베풀어 준 것이다. 기브아의 노인은 자신 또한 “우거하는 사람(개역개정=거류하는, 공동번역= 몸 붙혀 사는, living(NIV), sojourned(KJV), stayed(NASB))”으로 제시한다. 번역에 따르면 노인이 거주함이거나, 아니면 나그네로 생각하는 여전한 이방인 상태라는 것이다. 게르'(*)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동향의 레위인이 자신이 에브라임 산지 구석의 사람이며(16, 18절=동향이 됨).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겠다고 간언을 하였다(19절).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집이 없는 레위인의 모습은 마치 현대의 풍부한 물질 속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정신의 공황 상태와 견줄 수 있다. 돈으로 평안한 안식처를 찾을 수 없다. 평안한 안식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가능하다. 레위인과 베냐민의 기브아 족속 모두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켰다면 평안한 상태를 맞았을 것이다.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18절)”이라고 레위인은 노인에게 말한다. 여호와의 집은 에브라임 산지의 실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첩을 둔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는 주장에 많은 번역과 주석가들은 의구심을 품기에 다양한 번역과 해석들이 나타난다. 본 절을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다(Cassel).
공동번역은 단순히 “집으로”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집으로”로, 쉬운성경은 단순히 “에브라임 산지로”라고 번역하였다. NIV, NASB는 “the house of the LORD”로, NASB는 “my house”로 번역하였다.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고 말한 레위인의 말은 형식적인 말이며, 자기의 레위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여호와의 레위인을 접대하지 않는 기브아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나그네를 접대하는 기브아의 노인] 기브아에 사는 노인은 자신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거한 이방인임으로 동병상련에 의해서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은 당시의 패역한 시대와는 조금 다른 여호와의 다스림에 기억이 있는 세대이다.
노인은 레위인에게 평안을 제공한다. 자기의 아픔을 알고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07/12/26. (22-30절) 포악한 기브아의 비류와 더 냉혹하고 잔혹한 레위인:
노인의 집에서 쉼을 갖고 있을 때(22절), 기브아의 비류들이 노인의 집을 급습하여 남색(男色)을 요구한다(22절). 노인과 레위인의 반항은 불가능하였던가?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비류들에게 보낸다(25절). 비류들의 윤간(輪姦)으로 방치된 여인은 새벽까지 곤고함을 당하게 된다. 레위인은 이 여인의 몸을 12덩이로 나누어 각 지파별로 나누어 발송한다(29절). 경악한 만한 일에 모든 지파들은 연합을 도모한다(30절).
[성경난제: 28절. 여자가 나귀의 등에 타기 전에 죽었는가? 탄 후 에브라임으로 가는 도중에 죽었는가?] (개역과 개역개정 비교)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개정개역) //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개역) - 개역 개정에서 ‘그 시체’를 ‘그의 시체’라고 번역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이다. 이 구절은 영역 성경들이 공통적으로 번역한 것처럼 “그 사람이 그녀를 취하였다(Then the man put(took) her)”고 번역해야 한다. 개역개정의 번역대로 이해는 시체의 소유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절을 문장대로 이해한다면, And he said unto her, Up, and let us be going. But none answered. Then the man took her up upon an ass, and the man rose up, and gat him unto his place(KJV). 레위인은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일어나라, 떠나자”고 외치자,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녀를 당나귀 위에 싣고서, 그 사람은 일어서서 자기의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영역에서는 “시체”라는 말은 없다. 공동번역은 “그는 첩을 나귀에 얹어가지고 자기 고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고 번역하였다. 원문에서는 “그 사람이 일어났다(the man rose up)”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원문의 이해는 그 사람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바로 일어나서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28절에서 레위인의 첩이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냉혹한 행동으로 자기의 생명의 은인을 돌보지 않고 방치한다. 그리고 기브아에서 에브라임까지 돌아가는 여정의 길에서 끝까지 방치된 여인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인의 몸을 12로 나누는 잔혹한 행동까지 일삼는다. 사랑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려온 아내를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파렴치한 행동, 돌아온 그녀를 돌보지 않는 냉혹한 행동, 죽은 그녀의 몸을 나누는 잔혹한 행동의 레위인은 상식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베냐민의 비류들의 포악한 행동, 22-25절] 베냐민의 비류들의 행동은 마치 소돔성의 무질서, 탐욕과 비슷하게 제시된다. 소돔이 멸망되었지만, 이스라엘은 멸망되지 않았다. 노인 또한 롯처럼 행동한다. 소돔과 다른 것은 비류들이 남색만을 주장하지 않고, 레위인의 첩으로 만족하고 취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더욱 더 큰 문제를 야기 시켰다.
낯선 방문객에게 동성애를 강요하는 불량배들의 극악한 모습과 손님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딸들과 첩을 내놓겠노라고 제안하는 노인의 생각은 소돔의 롯이다(창 19:4-8). 그리고 자기 첩을 윤간의 자리에 강제로 밀어내는 레위인의 무책임하고 마비된 양심은 사사시대의 심각한 성적 타락뿐만 아니라 양심의 몰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새벽에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온 여인, 26-27절] 비류들에게 농락당한 여인이 동틀 때에 돌아왔는데(26절), 집 안에서는 잠을 자기 아내가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27절). 그리고 여인의 안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떠나려고 하는데, 그 여인이 엎드러져 있었다. 남편에게서 도망하였지만, 다시 함께 살려했던 여인의 마음이 비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레위인은 자기 첩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매정한 레위인이다.
[여인의 몸을 12로 나눈 놈, 28-30절] 그 사람은 자기 첩의 상태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는 비정하고 냉혹하게 바로 나귀에 실어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죽은 여인의 몸을 12덩이로 나눈 잔혹한 행동을 한다.
자기가 이길 수 없었던 비류들에게 대한 보복을 죽은 첩의 몸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징벌하는 수단이라 할지라도 시체를 도막내는 행동은 상상할 수 없다. 더욱이 시체는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공히 존중하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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